본문 바로가기

어린 시절의 단상

억세게 재수 좋은 날

 

나도 고인돌 마을 사람이었다.

오늘은 내 이야기를 하나 쓸까 한다.

 

사람이 살아가며 운수 대통을 하는 경우가 있다.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하는 일인데 내 경우 인생역전을 일으킬만한 운수대통을 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이 아니지만 당시로는 큰 횡재(?)를 한 경우가 있어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엿장사에게 돈 안내고 얻어 먹은 엿  

 

 지금도 민속놀이 마당 같은 데서 엿장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엿장사는 역사적 유물이 되어 가고 있다.

엿은 단것이 귀했던 옛날에는 가장 구하기가 쉬웠고 값이 쌌던 군것질 거리였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 장마당 같은 곳에는 엿장사가 꼭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엿장사는 역사가 오래된 먹거리 장사였다.

철저히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실천하는 부모님 덕분에(우리집에서 구멍가게를 했지만 과자 등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군것질은 나쁜 것이라고 배웠고 군것질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우리 마을에서 살던 거지 가족이 우리 가게에서 빵을 사먹는 것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들었겠는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후곡리 약수터에 가서 후곡리 동무들과 놀다가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손수레에 엿판을 싣고(엿판 아래의 공간에는 엿과 바꾼 고철과 떨어진 고무신 등이 실려 있었다) 엿장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엿장사 아저씨는 술이 취했는지 비틀대면서 손수레를 밀고 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대며 손수레를 밀고 가던 아저씨가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대다가 손수레가 길가 배수로에 빠지며 엿판이 길바닥에 엎어지고 엿이 쏟아져 깨졌다.

 

나는 얼른 달려 가서 손수레를 바로 일으켜 길가에 세우고 엿판을 올려 놓고 온전한 엿을 추수려서 엿판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길에 떨어져 깨진 엿을 먼지를 털어가며 줏어서 엿장사 아저씨를 드렸다.

엿장사 아저씨는 내게 고맙다고 하면서 깨진 엿부스러기를 두손으로 겨우 움킬만큼 주는 것이 아닌가?

공짜로 얻은 엿부스러기를 먹을 때의 흐뭇함이란......

 

 

(2) 길바닥에서 뻥튀기 옥수수의 횡재

 

 우리집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간식거리요 군것질 거리는 옥수수 뻥튀기였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봄방학 직전이었다.

당시 양구의 시장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비포장 길이었다.

이른봄에는 언땅이 녹아 질퍽대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마른땅을 골라서 딛고 다녀야 했다.

시장에는 지금도 그렇듯이 뻥튀기 장사가 있었다.

지금은 가스로 가열하지만 당시는 나무를 때어 가열하여 옥수수 등을 튀겼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뻥'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보면 뻥튀기 기계에서 튀겨진 옥수수나 콩, 쌀 등을 쏟아서 자루에 담는 모습이 목격되곤 하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시장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뻥 소리가 나서 돌아 보니 튀겨진 옥수수가 자루로 들어가지 않고 공중을 솟구쳐 올라가더니 길바닥에 비오듯 떨어지지 않는가?

뻥튀기 장수 아저씨가 기계 입구에 자루를 잘못대어 튀겨진 옥수수가 모두 공중으로 흩어져 땅에 비오듯 떨어져 내린 것이다.

우리는 길바닥에 흩어진 뻥튀기 옥수수를 줏어서 허겁스럽게 먹었다.

흙에 닿은 것은 흙에 닿은 부분만 뜯어내고 먹었는 데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3) 빈병줍기

 

 고인돌 마을로 이사를 가기 전 후곡리 약수터를 가기 전 연대 후문이 있는 적리라는 마을에서 1년을 산 적이 있다.

아이들과 같이 부대 철조망 밖을 돌아다니며 빈병을 줏어 팔아 군것질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병을 줏으로 부대 울타리 부근을 돌아다니는 데 10개가 넘는 4홉짜리 소주병이 철조망 밖에 흩어져 있지 않는가?

그때의 흐뭇함이란?

부대 철조망 주변을 돌아다녀도 빈병 한개를 줍기가 힘든데 열개가 넘는 병을 줏었을 때의 기쁨이란?

철조망밖의 빈 술병은 아마 군인들이 몰래 술을 들여다가 마시고 버린 것이리라.

한꺼번에 10개가 넘는 병이 버려진 것은 아마 어느 소대가 회식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 미꾸라지 잡기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의 전근 관계로(원당국민학교에서 도촌국민학교로) 남면 창리 마산 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미꾸라지를 횡재한 것은 마산 마을에서였다.

 

가을이 되면 메뚜기를 잡았다.

한낮에는 메뚜기의 움직임이 활발해 잡으려 하면 멀리 뛰거나 날아서 도망을 가기 때문에 잡기가 힘들지만 해가 넘어 갈 무렵부터는 메뚜기의 움직임이 둔해져서 잡기가 쉬었다.

4홉짜리 소주병으로는 부족하여 자루의 입구에 깨진 병주둥이를 묶어서 메뚜기를 잡곤하였다.

해가 넘어가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메뚜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줏어 담았다.

벼포기마다 메뚜기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벼를 베고 나면 논뚝에 심은 콩에 메뚜기가 열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 훑어 넣으면 되었다.

 

그런데 벼가 익어가서 논물을 뗄 때가 되면 봇도랑에 물을 내려 보내지 않아 도랑이 말라붙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던 시대라 논에는 메뚜기가 도랑에는 미꾸라지가 많았다.

 

논물을 뗄 때면 삽과 호미와 대야를 가지고 나갔다.

도랑에서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부터는 메뚜기를 잡았다.

도랑의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면 펄떡대는 붕어들이 잡혔다.

물을 퍼낸 웅덩이를 삽으로 파거나 호미로 캐면 꿈틀대는 미꾸라지들이 잡혔다.

도랑의 개흙을 호미로 캐어 흙덩어리 속에 있는 미꾸라지를 분리하여 대야에 담으면 되었다.

 

하루는 조그만 도랑의 물웅덩이의 물을 대야로 퍼냈는 데 붕어들이 많이 잡혔다.

붕어를 줏어 담고 호미로 개흙을 파헤치자 흙 반 미꾸라지 반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미꾸라지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없이 미꾸라지를 대야에 담았다.

다른 날의 몇배가 되는 미꾸라지와 붕어를 잡았다.

 

정신없이 붕어와 미꾸리지를 잡다 보니 메뚜기를 잡을 시간이 없어 미꾸라지를 담은 대야를 들고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가던 자가용이 멈추더니 대야 속의 미꾸라지를 팔으라고 하였다.

내가 미꾸라지를 팔았는지 안팔았는지, 일부만 팔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기대 이상으로 많은 붕어와 미꾸라지를 줏어 담은 것은 그날의 큰 행운이었다.

 

이렇게 잡은 메뚜기는 하룻밤을 재워 똥을 싸게 한 후 자루에 넣은 채로 끓는 물을 부은 후 물에 몇번을 씼은 다음 플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 먹었다. 특히 알가진 메뚜기의 고소한 맛이란?

남은 것은 말려 두었다가 먹었다.

 

미꾸라지 역시 하룻밤을 재운 후 소금을 넣어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뱉어내게 하고 조려 먹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육류나 어류를 섭취할 기회가 아주 적었던 시대에 내가 잡은 메뚜기와 미꾸라지는 아주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어린 시절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막국수에 대한 단상  (0) 2013.09.07
문둥이와 거지  (0) 2013.09.03
냉장고와 수박  (0) 2013.08.26
아줌마들의 싸움, 미친 여자 소동  (0) 2013.08.24
땅 속에서 캐어낸 석유 초롱 속에는 무엇이?  (0) 2013.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