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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박제가의 '북학의'를 읽고

Ⅰ. 『北學議』 內容 要約

 

1.『北學議』의 內容 構成

『북학의』는 1778년(정조 2년) 楚亭 朴齊家가 청나라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그 견문한 바를 쓴 책이다.

『북학의』는 모두 21편의 견문기록과 왕에 대한 보고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正祖께 보고하는 형식의 所懷(丙午 正月 22日 朝參時 典設署 別提朴齊家 所懷)와 疏(應旨進『北學議』疏), 중국 여행의 견문 및 발달된 중국 문물을 소개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중국에서 견문한 것을 토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 및 제도에 대하여 중국의 발달된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개혁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북학의』는 선박과 수레, 성벽, 도로, 교량, 궁실, 市井, 商賈, 목축으로부터 기와, 벽돌, 창호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거론하였고, 산업․제도․정치․풍속․사상 등에 관한 논술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중국을 통해 알게 된 서양문물에 대하여서도 소개를 하며 이를 배울 것도 아울러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하고자 하는 利用厚生의 실학사상이 깔려 있다.

 

2.『北學議』의 內容 要約

『北學議』는 벽돌의 사용에 대한 利點으로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저자는 중국과 서양의 建築物이 구운 벽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堅固하고 耐久性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구운 벽돌과 바르는 회를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는 중국에서 구운 벽돌을 생산하는 방법과 생산에 필요한 시설의 규격,인력, 공정, 시간까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는 박제가가 利用厚生을 강조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楚亭은 燕京의 상가가 번창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업이 발달하여야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하여 짐을 강조한다. 따라서, 서울에도 길을 넓히고 전문 상가를 만들어 상업을 발달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는 그의 重商主義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예로 볼 수 있다.

北學辨(1, 2)는 朴齊家의 실학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章이다.

저자는 丙子胡亂으로 인한 반청감정에 사로잡혀 중국의 것을 비하시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 중국의 것을 배척하려는 사대부들의 편견을 비판한다.

그래서,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소개는 외면하고 부정적인 소문만을 가려듣고, 淸의 문물을 모두 오랑캐의 것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만이 중국의 정통문명을 계승하고 있다는 당시 사대부들의 편견을 비판한다.

그는 중국에 수많은 학자들이 있고, 선진서적이 있고, 문물이 발달한 나라임을 강조한다. 또한 중국의 발달한 선진문물을 소개하며 중국과 서양에 대하여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正祖께 보고하고 上奏하는 형식의 ‘所懷와 疏’에서 중국에 布敎를 위해 와있는 서양의 천주교 신부들을 초빙하여 서양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울 것을 정조에게 奏請한다.

“臣이 들으니 중국 欽天監에서 책력을 만드는 서양인들은 모두 幾何에 밝았고, 利用厚生의 방법에 정통했다고 합니다. 국가에서는 진실로 觀象監의 비용으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두고 우리나라 자제들로 하여금 천문, 躔次, 鍾律儀器,의 度數와 농상, 의약, 한재, 수재, 건조, 습도를 알맞게 함과 벽돌을 만들어 궁실․성곽․교량을 축조하는 방법과 구리광을 캐고, 옥덩어리를 캐며, 유리를 굽는 것과 외적을 방어하는 화포를 설치하는 것과, 관개하는 법이며, 수레를 통행시키고 배를 꾸며서 나무를 베든가, 돈을 운반할 때와 같이 무거운 것을 멀리 운반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면 몇해가 가지 않아 세상을 다스리는 데 알맞은 인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백성들을 가난에서 구할 수 있는 방안으로 水路를 통한 중국 및 각국과의 통상, 국내 각지의 物貨를 교류할 것을 進言한다. 또한 교역을 위한 物流의 활성화를 위하여 수레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망의 정비, 漕運의 활성화를 건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주거환경의 개선과 농지의 정비, 농기구의 규격화, 축산의 장려, 선비계층의 생산활동 참가, 서얼차별 및 科擧의 폐단 시정 및 不偏不黨한 인재의 등용 등을 정조에게 상주한다.

 

朴齊家는 21편의 글 대부분에서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낙후됨을 비판하며 중국의 문물을 배워 이를 개선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견문하여 소개하는 문물은 다양하다.

朴齊家는 ‘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輕視하였던 당시의 시대풍조와 士大夫들의 일반적인 사상과는 달리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과 고관 등 사대부 계층도 직접 물건을 구매하는 등 상업활동이 양반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이는 상업을 통한 물자의 원활한 유통이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그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대외교역이 활발하였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대외적으로 고립정책을 쓰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고 백성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중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역을 적극 추진할 것을 강조한다.

物流의 활성화를 위해 수레를 사용할 것과 이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고 橋梁을 튼튼하게 놓아 수레가 다닐 수 있게 하고, 수레를 규격화할 것을 주장한다. 또한, 水運을 통한 物流와 중국 등 외국과 交易의 이점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선착장 시설의 개축, 물을 새지 않도록 하는 造船 技術의 개량을 주장한다.

 

『北學議』에서는 농업에 대한 著者의 관심도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는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정책을 썼고, 당시의 왕인 정조 또한 농업을 중시하였지만 당시의 농민들의 생활은 궁핍하였다.

朴齊家는 당시 농민들이 낮은 농업 생산력으로 인한 피폐한 생활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正祖에게 상주한 ‘應旨進『北學議』疏’에 잘 나타나 있다.

“매양 산골 백성을 보니 묵은 밭을 태우고 나무를 베어 열 손가락이 모두 닳았으며, 입은 옷은 10년이 넘게 떨어진 솜옷이었습니다. 그 집은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고, 연기로 그을렸으나 흙은 바르지 않았으며, 먹을 음식은 깨진 그릇에 받아 먹고, 소금없는 나물을 먹습니다. 부뚜막에는 나무 숟가락이 있고, 부엌에는 기와 그릇이 있어 그 연고를 물은즉 철 남비와 놋쇠 숟가락은 수차 里正이 빼앗아 갔으며, 이미 꾸어먹은 곡식값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부역에 대해 물어보니 노비가 아니면 軍保로 250-260전을 내어야 하니 이것이 국가 경비가 나오는 곳입니다”

그는 농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시급한 현안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농업 생산력 향상이 첩경임을 인식한 著者는 중국의 예를 들어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위해 밭고랑 사이를 좁혀서 곡식을 심고, 파종방법을 개선하여 작물이 고르게 자라게 하며, 농기구를 규격화하여 작업능률을 높히고, 버려지는 분뇨를 모아 거름으로 이용하고, 뛰어난 농사꾼으로 하여금 선진 농업 기술을 전파하게 하여 농업생산력을 제고시킬 것을 제안한다.

 

朴齊家는 단순한 중국 문물의 도입만이 아닌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한다. 정조에게 進言한 사대부계층의 생산활동 참가, 서얼제도의 폐단과 이의 시정 주장, 인재 등용 방법의 개선 등은 조선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심은 군사제도에도 미치고 있다. 중국의 활과 우리나라 활의 장단점을 비교하여 우리나라 활의 개량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군사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는 것도 민생과 연관되어 있으며 농업 생산력 및 산업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바 이는 오늘날의 總力安保의 개념과도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朴齊家는 당시 軍籍 管理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있다. 장부상 병력의 수와 실제 동원가능한 병력의 수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일 등을 지적하고 군적을 잘 관리하여 동원체제를 확립할 것을강조한다.

구운 벽돌의 제조법 소개와 사용의 강조, 석탄을 사용한 강철의 鍛造 방법의 개량과 교량, 도로와 항만, 건축, 활 등 兵器의 제조, 농경방법의 개량 등에서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배울 것을 박제가는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利用厚生의 방안임을 제시하고 있다.

 

Ⅱ. 讀後感

『北學議』란 본시 맹자에게 陳良이 “北學於中國”이라는 데서 인용한 제목으로 南蠻人이 중국의 정치제도, 예악문물, 典章制度를 배운다는 뜻이다.

승지 박평의 서자로 출생한 朴齊家는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 등과 교유하였으며 29세 되던 1778년 연경을 다녀 온다. 연경을 다녀 온 그 해에 『北學議』를 저술하였다.

朴齊家의 북학사상의 특징은 重農主義를 주장한 다른 실학자인 유형원, 이익 등과는 달리 重商主義를 주장한 데 있다. 그렇다고 하여 초정이 농업에 대한 중요성을 看過하지 않고 있었음은 『北學議』에서 농업에 관한 그의 서술에서도 알 수 있다.

 

실학파의 한 사람이던 『北學議』의 著者 朴齊家는 당시로서는 뛰어난 慧眼을 가진 先覺者임에는 틀림이 없다. 병자호란에서 당한 恥辱만을 기억하며 오랑캐라고 하여 淸을 배격하고, 망해 버린 漢族의 왕조인 명나라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私的인데서는 명의 연호인 崇禎 紀元後니 하는 年號를 사용하고 있던 당시의 세대 풍조를 감안할 때 오랑캐로 멸시하던 중국의 문물을 선진적인 것으로 보고 利用厚生을 위해 청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박제가가 이익, 유형원, 박지원, 정약용 등과 같이 經世致用, 實事求是, 利用厚生을 강조하는 실학파에 속한 학자였고, 비록 수용은 하지 못했지만 주장을 들어줄 수 있는 개혁군주였던 正祖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제가 역시 그가 살던 시대 상황을 완전히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당시 지배 이념인 주자학에 대하여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서얼의 차별을 철폐할 것과 선비계층이 비생산성을 비판하고 이들도 생산활동에 참가하게 할 것을 주장하는 등 당시 신분제 봉건사회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오랑캐라고 하여 배격하던 淸은 물론 서양의 문물을 도입할 것과 천주교회 신부들을 국내로 초빙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등 혁신적인 사상을 주장하였지만 신분제도의 완전한 철폐를 통한 평등한 사회의 건설이나 왕권을 제약하는 입헌군주제도 수립, 과거제도의 완전한 혁신 등의 주장에는 이르지 못한 것은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완전히 초월할 수 없었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럴지라도 그는 광범위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은 중국과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는 것과 더불어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구운 벽돌을 생산하여 이용한다거나,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교량을 가설한다거나, 水運의 활성화를 위해 중국의 조선 기술을 배워 우리나라 선박 건조의 기술을 혁신하자는 주장, 농기구의 규격화를 통한 작업능률의 향상과 노동력 절감, 석탄을 사용한 강철 단조방법의 개선 등 空理空論이 아닌 실질적인 방안의 제시를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北學議』를 읽으면서 느낀 점 하나는 박제가가 중국과 서양의 발달된 문물의수용을 주장하는 등 당시로서는 先覺者的인 卓見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 문물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숭상을 볼 수 있다.

그가 견문한 곳이 연경과 연경으로 가는 통행로 부근이었다는 한계가 있겠지만 당시 중국사회의 일면만을 보았다는 것을 불식시킬 수 없다.

중국의 건물들이 모두 장엄하고 화려하다거나, 도로와 항만, 교량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거나, 농기구와 선박, 수레 등의 성능이 뛰어나다거나, 상업이 활성화되어 있어 의복이 화려하고 생활이 윤택하다거나 하는 견문은 그가 당시 중국 사회의 한 면만을 보고, 백성들의 생활을 심층적으로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문물이 모두 중국보다 뒤떨어지고 있는 것 등으로 보고 있는 것 역시 중국 일변도에 치우친 그의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北學議』를 다시 읽으며 25년전 처음 『北學議』를 읽고 당시의 왕인 正祖가 박제가의 上奏를 받아들여 천주교회의 신부들을 초빙하였다면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을까를 상상하였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개혁적인 군주였던 正祖마저 그의 進言을 수용할 수 없었던 당시 조선왕조의 硬直된 상황이 16세기 중반 스페인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수용하였고, 17세기부터는 네델란드를 통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가 낙후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 박지원, 정약용 등 실학파 인사들이 가졌던 개혁사상과 이것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상이 좌절된 데에 대한 비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 個人的 所懷 -

朴齊家가 저술한『北學議』는 25년전 삼성출판사에서 간행된『한국의 실학사상』이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北學議』』를 읽으면서 박제가의 주장대로 중국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시도하였더라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을 터인 데 하는 아쉬움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특히, 박제가의 주장대로 중국에 와 있던 천주교회의 신부들을 초빙하여다가 그들에게서 서양문물을 배웠다면 지금의 역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하는 상상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고등학교를 다녔던 ‘60년대 중반기 理工系 열풍의 時流를 따라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국문학 대신 化學을 공부하여 敎師로 30년이 넘게 高等學校와 中學校에서 化學과 科學을 가르쳐 왔던 필자가 高等學校때 공부하고 싶었던 국문학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졸업한지 33년이 지난 금년도에 방통대 국문학과에 편입하여 40여년전에 하고 싶었던 국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침 ’동서양 고전‘이라는 과목의 과제에 『北學議』가 포함되어 있어 『北學議』를 과제로 택하였다.

30대 초반에 안경을 쓰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던 작은 글씨로 인쇄된 책을, 거의 한 세대를 건너 뛰어 50대 후반에 다시 읽게 된 지금 肉眼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어 돋보기 안경을 쓰고 다시 읽으면서 여러 가지로 감회가 깊었다. 물론 읽은지가 오래 되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나 느낌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전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었다.

 

  2006. 4. 29  한국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동서양 고전 과제 리포트로 제출한 원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