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읽고

방송대 일본학과 '일본 사회문화의 이해'라는 교과의 과제물로 제출한 리포트임.

 

과제 : 루이스 베네딕트의『국화와 칼』(김윤식․오인석 역, 1974 을유문화사)를

읽고 서평을 작성할 것.

========================

 

Ⅰ. 각 장별 내용 요약

 

1. 제 1장 연구과제 - 일본

 

일본은 미국이 상대한 적 중 가장 알 수 없는 적이었다.

미국은 전쟁 상대인 일본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적인 일본을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전후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를 문화인류학자인 루이스 베네딕트에게 연구를 의뢰하였다.

문화 인류학자인 루이스는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지만 문화인류학 연구 방법을 차용해 방대한 일본 관련 문헌들과 선행연구, 해외 거주 일본인의 면접, 일본인의 습관과 관습, 영화와 소설 등 예술작품들을 연구하여 일본인의 전형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간접적인 연구를 통해 루이스는 일본인의 독특한 사유체계와 견해, 국가에 대한 관념, 독특한 일본적인 것 등과 장단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2. 제 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전쟁 중의 일본인들의 행태는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베네딕트는 전쟁에 임하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서구와 다른 것을 일본인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문화 행동적인 측면에서 일본인이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연구하였다.

일본인들이 전쟁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전제가 미국과는 달랐는 데 일본인들은 저마다 알맞은 위치를 찾게 하기 위하여(일본이 覇者가 되는) 전쟁을 한다고 했다.

일본인들이 전쟁에 임하는 두 번째 태도로는 정신력이 물질을 이긴다고 보았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정신력의 우월을 강조했고 최후의 승리를 확신시켰다. 후퇴와 패전도 계획되어 있던 것이라고 강조하며 국민들을 이끌었다.

일본군부는 세계인들이 일본인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일본정신을 충분하게 발휘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비판적인 충성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천황을 비판하거나 모욕하지 않았다. 즉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종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부는 이러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이용해서 천황에게 순종하고 천황을 위해 죽자고 선동하며 독전하였다.

부상병의 구조에 미군은 최선을 다했고 이러한 행위가 용감하고 영웅적인 행위가 된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우는 부상병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였다. 이러한 행태는 포로들의 부상과 질병 치료도 등한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여 많은 전사자를 냈다. 항복자와 전사자의 비율이 서양의 경우는 평균 4:1이나 일본군의 경우는 1:120이나 되었다.

이는 포로들에 대한 처우에도 반영되어 포로들에 대한 학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포로가 된 일본군 병사들은 연합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 제 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일본인들은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한다. 일본인들은 국제관계에서도 국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계층제도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일본은 계층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대미선전포고문에도 일본의 정책은 “모든 국가가 세계 속에서 각자 알맞은 위치를 갖게 하려는 데 있다.”라고 했다. 이는 미국의 평등과 불가침의 원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일본의 ‘알맞는 위치를 갖는다.’라는 신념은 사회적 체험을 통해서 그들에게 깊이 뿌리를 내린 생활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일본은 비록 서구화했지만 귀족주의적 사회이기도 하고 예의를 중시하고 있는 데 이는 가정에서부터 학습된 것이다.

효도는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일본의 도덕율이다. 충효는 6-7세기경 불교와 유가 사상과 같이 일본에 들어 왔다. 중국은 姓을 통한 종족의 공동체가 존재하지만 일본은 귀족과 무사 계급만 성이 허용되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평민에게도 성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일본인의 조상숭배는 가까운 조상에게만 행해졌다.

알맞은 위치는 가족내에서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나이와 성별 서열에 따라 지켜졌다.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낮았으나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계층조직은 계급간에도 철저하다. 일본사회는 철저한 카스트 제도적 사회였다. 일본의 관료는 과거에 의해 발탁된 중국과는 달리 세습적 귀족이나 봉건영주에게 주어졌다.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가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왕조교체가 없었다. 쇼군(將軍)이 실질적인 지배자이고 천황은 무력한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1603년 德川家康이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쇼군이 되었으며 이후 25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막부정치가 행해졌다. 막부는 복잡한 계층으로 나누어지고 개인의 신분이 세습으로 정해지던 제도를 고정시켜 각 카스트별로 일상행동을 세밀하게 규제하였다.

황실과 귀족 밑에 무사, 농민, 상인, 공인의 네가지 카스트가 있었다.

막부정권은 무역의 제약, 번간의 교역 제한 등을 통해 상인계급의 성장을 막았다.

도쿠가와 정권은 상인과 무사간에 엄격한 분리를 행하였고 두 계급을 고정화시켰다.

사무라이는 생산활동이 금지되었고 봉록을 받아 생활하였음으로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농민들은 땅을 소유하였으나 많은 연공미를 바치며 무사와 귀족계급을 부양하는 의무를 졌다. 농민들이 다이묘나 막부에 탄원할 수는 있었지만 주모자는 계층의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막부는 다이묘의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제도로 제약을 가했다.

일본은 실권이 없는 천황과 쇼군과 다이묘로 이어지는 다중 통치구조였다.

그렇지만 일본의 경우는 부유한 상인와 대금업자는 결혼과 양자 등을 통해 계층간의 이동이 가능한 인도보다는 유연한 카스트였다. 막부의 권위가 약해지는 와중에 미국의 압력으로 개국을 하게 되면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막부는 타도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4. 제 4장 메이지 維新

 

일본 근대화 초기의 구호는 尊王攘夷였다. 외세배격과 더불어 왕정복고를 하자는 구호였다. 막부를 몰아낸 웅번의 다이묘들은 왕정복고를 통해 자신들이 막부를 대신한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으로 들어선 신정부는 모든 번에서 다이묘의 과세권을 철폐하고 카스트나 계급을 상징하는 상투나 패검 등을 철폐하였으며 불교를 국교의 지위에서 추방하였다. 다이묘와 사무라이에게는 질록공채를 일시불로 지급함으로 봉건제도를 청산했다. 이러한 개혁은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주도세력의 의도와는 달랐기 때문에 왕정복고와 외세배격을 주장하는 사이고의 사무라이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농민들은 학교설립, 징병제 실시, 단발령 등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유신 개혁을 단행한 주도세력은 하층 무사계급과 상인들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정치가들은 자신의 업무를 혁명이 아닌 사업으로 취급했다. 일본을 문명 열강의 수준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쇼군을 몰아내고 천황을 정점에 세워 계층 질서를 단순화했다. 이들은 계층적 관습의 발판을 제거하지 않고 새로운 위치를 부여했을 뿐이다.

1889년 일본 헌법이 공포되었고 의회가 설치되었다. 이들은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활동 분야에서 국가와 국민간에 알맞은 위치와 의무를 세밀히 규정했다.

미국이나 영국과는 달리 여론에 따르지 않고 위로부터 강력한 지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배는 계층제의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리했다.

의회도 있었지만 견제를 받아 권한이 크지를 못했다.

도나리구미와 部落은 지방자치의 기초 조직이 있었다. 시, 정, 촌의 지방자치 조직이 있었으며 이들의 수장은 지주 농민 집안 출신이 맡았다. 시, 정, 촌은 초등학교의 교육비 지출, 마을의 재산 관리, 호적업무 등을 맡았다. 전국적 정당이 태동했지만 지방 조직은 정당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생활양식은 알맞은 권위를 할당하고 각각의 권위에 알맞은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국가신도는 국가가 관리하였고 모든 종교의 신앙은 개인의 자유에 맡겼다. 일본 정부는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국가 신도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가장 다수인 종교는 불교다. 신사자 절의 행사일은 축제일이다.

군대의 경우 군내부에서 카스트 제도가 철폐되고 능력에 따라 진급하였다. 군대는 내각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육해군 장관이 직접 천황을 알현할 수 있었다.

군부는 정책 결정과정에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산업분야도 정부가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공급하고 발전을 주도하였다. 사업이 신장하면 재벌기업에게 헐값으로 매각하였다. 중공업 우선의 발전 정책을 시행하였다.

재계에도 재벌이라는 귀족을 만들어 내어 많은 특권을 주었다.

일본은 끊임없이 계층제도를 고려하면서 사회질서를 세워나갔다. 가정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산업, 군대에서도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일본이 국내에서 잘 작동되는 계층 제도를 타국에게 수출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하였다.

자신의 제도를 타국에게 강요한 것이 결정적 오류였다.

 

 

5. 제 5장 과거와 세상에 빚진 사람

 

동양인들은 과거에 빚을 진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양육받고 교육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모두 세상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채무자라는 인식이 일본인에게 큰 책임을 느끼게 하고 화를 잘내게 한다. 채무라는 말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온(恩)이다.

온은 obiligation, loyalty, iove, kindness 등으로 영역되지만 모두 정확한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 온이라는 여러 용법을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일본인들은 윗사람이나 적어도 자신과 동등한 위치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에 불쾌한 열등감을 느낀다.

일본인들은 天皇에게 최대의 債務를 졌다고 생각하며 皇恩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드린다.

전쟁시에 섬을 지키다가 玉碎를 하거나 가미카제 조종사가 되는 것 모두 천황의 무한한 온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父母에게서 받은 온은 동양의 효행사상의 기초가 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그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인의 조상숭배 대상은 기억에 남아있는 최근 조상에 한정한다. 부모에게서 받은 온의 일부를 갚는 것은 자신의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교사와 主人에게도 온을 느낀다.

일본인들은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서 온을 받아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와하지 않는다.

이웃이나 예부터 정해진 계층적인 관계에서 온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서 신세를 진 경우 일본인들은 편치 않은 감정을 느낀다.

이때 쓰는 말로 ‘氣の毒’과 ‘有難ぅ’ ‘すみません’ 등이 있다. 이는 모두 온을 입었을 때 감사를 표현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더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는 ‘かたじけなぃ’가 있다. 이 말에는 온을 입게 됨으로 부끄럽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온을 입는다는 것에 불편한 감정을 가졌더라도 계층 속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이나 자신도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느끼는 경우(바람이 불 때 날아간 모자를 주워 주는) 나를 숭배하는 사람인 경우에 한해서 일본인은 안심하고 온을 입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온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6. 제 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온恩이란 부채이기에 갚아야 한다. 일본인은 보은을 온과 별개의 범주로 생각한다.

온은 일본인에게 중요하고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채무다. 변제가 덕행인 것이다. 덕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보은에 몸을 바칠 때 시작된다.

미국인에게 경제거래는 계약서대로 이행할 의무가 있다. 애국심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은 이것과는 다른 조건없이 베푸는 최상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에게 온恩이란 일본인은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이며 황은, 부모의 은혜, 스승이나 주군에게서 받는 은혜 등이 있으며 은을 준 사람은 모두 恩人이 된다.

온恩의 반대인 은인에게 부채를 갚는다라는 적극적인 갚음의 견지에서 본 경우는 기무

義務이다. 의무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결코 다 갚을 수가 없는 시간적으로 한계가 없는 의무인데 천황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 자신의 일에 대한 임무가 있다.

기리義理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 갚으면 되고 시간적으로 제한된 부채를 말한다. 근친, 주군, 타인, 먼 친척에 대한 의리인 세상에 대한 기리와 이름에 대한 기리가 있다.

중국은 忠孝 위에 서는 또 하나의 덕인 런仁을 요구한다. 인은 충성의 기초가 되는 조건이다. 중국의 윤리는 이 仁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중국의 윤리체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윤리체계 밖으로 추방된 덕목이 되었다. 진기仁義는 무법자 사이의 덕, 불량배 사이의 의리 등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효행은 어떤 경우라도 행해야 할 의무가 된다.

아들은 부모의 온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부모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하며 이는 간섭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 효는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최근의 조상에 한정되어 있다.

천황은 세속과 떨어진 신성한 수장이며 충성의 대상이다. 천황은 충을 받을 유일한 대상이며 상징적인 인물이다. 천황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법률에 복종하는 것이 황은을 갚는 길이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전까지는 격렬하게 저항하던 일본군이 천황이 목소리가 방송되자 모든 사람이 이에 승복하였으며 점령군을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7. 제 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들에게 기리義理 역시 기무처럼 갚아야 할 의무이다. 기리는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忠孝와 다른 일본 특유의 범주다. ‘기무는 혈육이나 천황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출생과 동시에 맺어지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기리는 세상에 대한 기리와 이름에 대한 기리(명예)가 있는 데 生得的인 ’기무와는 달리 기리는 계약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리는 법률상 가족에 대한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며 직계 가족에 대한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는 기무와 구분된다. 부모 자식간에는 기무, 며느리와 시어머니, 데릴사위와 장모의 관계는 기리가 성립되게 된다.

다수 일본인들이 법률상의 가족관계에 앞서 생각하는 전통적 기리는 영주나 전우에 대한 기리다. 가장 잘 알려진 기리에 대한 이야기로는 13세기의 영웅 벤케이의 이야기다.

주군에 대한 충절은 기리이다. 모욕에 대한 복수도 기리다.

오늘날 기리는 온작 종류의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자신은 하기 싫지만 세상의 압력이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일을 ‘기리라고 표현한다. 기리의 규칙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며, 기리를 갚을 수 없는 경우 미국인들이 금전 상 거래에서 변제 불능으로 파산되는 것과 같이 일본인들은 이를 파산으로 여긴다.

기무는 아무리 애써도 완전하게 갚을 수 없는 것지만 기리는 정확한 같은 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에서 차이가 난다. 선물의 주고 받음에서, 경조사에서 기리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8. 제 8장 오명을 씼는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다. 이는 여러 가지 덕으로 이루어진다. 온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명성을 빛내는 행위는 ‘분수의 위치’가 요구하는 잡다한 모든 예절을 지키고, 전문직업이나 기능에서 자기의 명성을 옹호하며, 고통에 임해서는 태연자약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방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버려야 하며, 복수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인들은 명예훼손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기리가 친절을 갚는 의무라면 이름에 대한 기리는 주로 복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씼는 행위는 일본인에게는 덕행이 된다. 이는 물질적 손실이나 이해득실을 초월한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동양적인 것이 아니며 일본 특유의 것이다. 중국인들은 모욕이나 비방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을 小人이라 생각한다. 복수는 이름에 대한 기리가 때때로 요구하는 하나의 덕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체면을 중시하며 自制 역시 기리의 일부분이다.

예를 들면 여자는 출산을 할 때도 큰 소리를 내서는 안되고,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해야 하는 것이다. 사무라이는 굶주려도 이쑤시개로 이를 쑤셨다. 또한 고통에 져서도 안되었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계급적 지위에 따라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이 다른 규정이 있었다. 또한 이름에 대한 기리는 알맞은 지위에 대한 채무 외에 다양한 채무를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직업상 채무에도 이름에 대한 기리가 수반된다. 빚을 갚아야 할 기한인 설날이 다가오면 채무자가 자살을 하기도 한다거나, 학교 화재에서 교실의 천황 사진이 불타서 교장이 자살을 한다거나 천황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불타는 학교 건물로 뛰어 들어 타죽은 교사 등에 대한 것 역시 이름에 대한 기리의 표헌이다.

전문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는 일본에서 대단히 엄격하다. 전문 분야에서 자신의 과오를 타인 앞에서 인정하지 못한다. 이때 기리는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을 극단적으로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행위나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 미국인은 자신이 해온 일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에게 경쟁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들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로 생각하지만 일본인들에게 경쟁은 작업 능률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시합에 진 경우 선수들은 격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가능한 직접적인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고 노력해왔다.

각 계급이 준수하는 규칙을 세밀하게 규정한 일본의 계층제도가 직접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며 가족 제도 역시 그렇다.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이다. 중개자는 당사자들에게 상대방의 의향을 전하며 절충하고 상대방에게 보고한다. 이러한 간접 거래를 통해 기리 때문에 화를 낼 수 있는 요구나 비난을 당사자들은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이름에 대한 기리에 문제가 될지 모르는 수치를 유발하지 않도록 갖가지 예의 범절이 규정되어 있다. 주인이 손님을 맞는 예절, 시골에서 동네 총각이 한밤중에 처녀를 방문하는 풍습, 결혼 중매자가 장래 신랑신부가 될 사람을 대면시키는 방법 등에서 실패로 인한 치욕을 당하는 기회를 회피하도록 한다. 일본인들은 일이나 계획에 대한 성공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될 수 있는 한 알리지 않도록 하는 것을 예절로 한다.

일본인들은 타인에게서 받은 오명을 씼는 의무를 대단히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욕을 느낄 기회를 가능한 차단하도록 일을 처리한다.

일본인들은 예의 바름을 모범으로 한다. 모욕을 불러 일으키는 분노를 성공의 자극제로 삼지만 이를 필요로 하는 사태는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자극을 이용해서 일본은 극동의 지배적 지위를 획득했고, 미국 영국과 전쟁을 수행해 왔다.

일본인들은 비방이나 조소를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살인자는 타인을 살해한 자이지만 조소자는 타인의 혼과 마음을 살해한 인간이라고 인식한다. 이는 일본인 화가 마키노 요시오의 자서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살인자는 사정에 따라 용서할 수 있지만 조소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비방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복수하고 했다. 복수는 누군가에게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때의 ‘바람직한 대응’으로 일본 전통 속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에게서 복수는 깨끗한 것을 좋와하고 불결한 것을 싫어하는 심리적 특징과 관련이 있으며 아침목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47인의 武士’나 ‘다이묘와 명검 이야기’ 등은 이러한 일본인의 특성을 잘 나타낸 사례이다. 가신은 주군에게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주군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는 보복을 한다. 이에야스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죽을 자’라는 비방을 들은 가신의 이야기가 그 예가 된다.

일본인의 옛이야기에서 복수를 크게 찬양하지만 실제로 복수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본인은 법질서 때문에 치욕을 느끼더라도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는 경우가 많고, 은밀한 공격 등 다른 방법으로 복수를 대체하였는 데 오늘날에는 이것도 드물어졌고 공격은 자신을 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불가능을 실천하려는 자신을 독려하는 자극으로 이용하던가 이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던가 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를 받기 쉽다. 타인을 괴롭히기 보다는 자신을 괴롭힌다. 일본 소설에는 러시아의 소설처럼 권태를 곧잘 묘사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행위는 자살이다. 이들은 자살이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씼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자살을 자포자기하여 굴복한 것으로 보지만 일본인들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자살하는 것을 훌륭한 행위로 본다.

이름에 대한 기리가 위협을 받을 경우 공격을 자신에게 행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열렬한 헌신에서 극단적 권태로 심리적 난파상태를 경험하였는 데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의 방향을 내면에서 밖으로 돌렸다. 다른 나라를 침략함으로 다시금 자신을 발견하고 불쾌한 기분에서 벗어나 자기 속에서 새로이 큰 힘을 느꼈으나 패전으로 그 신념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전쟁후 일본인들은 허탈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종전과 동시에 일본인들은 패전의 결과를 받아들였으며 전승국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일본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기분의 변화에 따라 열정적인 노력과 단순한 무기력 사이를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종전후 일본인은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데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에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패전후 점령군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나 지하 운동을 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인들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일본은 세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강대한 무력을 가진 나라가 되기 위해 비상한 방법을 썼으나 실패하였고, 이는 침략이 명예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인들은 패전과 동시에 침략행위에서 상호 존중으로 방향을 바꾸었는 데 그 목표는 여전히 명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쓰마와 조슈 번이 서양과 충돌하였으나 패한 후 서양을 배우는 데 열심을 냈다. 이는 일본의 현실주의를 반영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주의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지만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은 면이 공존한다. 해군군축 조약은 일본에게 국가적 치욕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 전쟁으로 내모는 단초가 되었다. 일본이 항복을 수용한 것은 일본 특유의 행동 양식에 의한 것일 뿐이다. 무사도와 사무라이는 동일시 될 수 없으며 무사도는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자들의 슬로건이었을 뿐이다.

기리는 모든 계급의 공통적인 덕인 것이다.

 

 

9. 제 9장 仁情의 세계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개인적 욕망을 인간의 가슴 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수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덕률은 五官의 쾌락을 허용하고 있다. 일본인은 욕망의 충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쾌락을 긍정한다. 그러나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머물러야 하며 인생의 중대 사항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되고 인식한다. 미국인은 쾌락을 일부러 배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일본인들은 의무와 마찬가지로 쾌락을 배운다. 일본인들은 육체적 쾌랙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쾌락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의무를 위해 쾌락을 희생한다.

일본인들이 좋와하는 소박한 육체적 쾌락의 하나는 온욕이다. 온욕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즐거움인 것처럼 신체의 단련을 위해서는 냉수욕이 있다. 혹한에 냉수욕을 실시하기도 한다. 잠 또한 일본인들이 애호하는 즐거움이다. 이들은 어떤 자세와 상황에서도 잘잔다.

시험과 같은 것이 있는 경우, 군대의 행군 훈련의 경우 등에서는 잠을 희생하기도 한다.

먹는 것 역시 온욕이나 잠과 같이 즐기는 휴식인 동시에 훈련을 위한 수업이다. 요리를 맛뿐 아니라 외관으로도 즐긴다. 그러나 단식 단련의 한 과정이다.

로맨틱한 연애 또한 일본인이 함양하는 인정이 다. 일본인들은 성의 향락에 대해서 仁情과 마찬가지로 성이 인생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내에 대한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둘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계약에 의해 첩을 삼기도 하지만 저마다의 영역의 ‘알맞은 위치’를 정해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본다. 동성애 등도 심하게 비난 받을 일로 여기지 않으며 자위 행위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술에 취하는 것 또한 용인되는 인정의 한가지다. 술에 취한 사람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음주와 식사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일본인들에게 육체는 악이 아니며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일본인들의 신은 선악의 성질을 겸비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흑백의 전혀 다른 두 그룹으로 나눈다. 일본에서 불교 철학은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도덕률을 경전 속이 아닌 깨달음을 얻은 청정무구한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인간 타락의 가르침을 설교하지 않는다. ‘인정’은 비난해서는 안되는 축복이다. 주나 기리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통을 겪고 쾌락을 단념하는 것을 칭송하는 미덕으로 보지만 쾌락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이 소설이나 연극은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다.

 

 

10. 제 10장 덕의 딜레마

 

일본인의 인생관은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仁情 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들은 인생이 주, 고, 기리, 진, 인정의 세계와 그밖의 많은 세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을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하지 않고 ‘고를 모른다’, ‘기리를 모른다’ 등의 말로 판단한다. 그 사람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한 영역을 명시한다.

일본인이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나는 세계와 상대적이다. 일본인들이 고를 위해, 기리를 위해, 진의 세계에서 행동할 때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각각의 세계에서 법도는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행동 기준이 변한다. 주忠,은 항복하기 전까지 일본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천황이 항복을 하고 주忠 내용이 변하자 일본인은 정반대로 외국인에게 협력하는 양상을 보였다.

일본인이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하나의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일본인의 인생관은 획일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서양인의 인생관과는 다르다. 일본인이 구분하고 있는 생활 세계 속에는 악의 세계가 들어 있지 않다. 인생을 선과 악이 싸우는 세계로 보지 않는다. 이들은 악을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이나 칼의 녹과 같은 존재로 본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인생관 때문에 민간설화나 소설, 연극 등의 줄거리는 기리와 인정, 주와 고, 기리와 기무의 갈등에 얽혀 있다.

‘47 로닌 이야기’는 그 전형적인 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주군에 대한 기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1703년 봉건제도의 전성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47명의 로닌은 가족, 정의(기) 등을 기리를 위해 희생하였으며 최후에는 자살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忠)에 바쳤다. 이들의 주군인 아사노 영주가 쇼군을 영접하는 의식을 지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모욕한 기라 영주에게 이름에 대한 기리로 복수를 한 것 때문에 할복을 명받아 할복을 하고 영지는 몰수되었다. 가신인 오이시는 망군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무사 47명을 모아 복수를 맹세하고 온갖 역경을 감내하며 기회를 모색한다. 1702년 말 이들 47명의 로닌은 기라를 죽이고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 기라의 목을 아사노의 묘에 바치고 제사를 지낸 그들은 막부가 내린 명령에 따라 할복을 한다.

로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기리와 기무 양쪽에 최고의 채무를 지불한 것이다.

기리와 기무가 충돌하는 주제의 이야기는 많다. 이를 주제로 한 영화 한편을 예를 들면 쇼군 옹립에 실패한 다이묘 한 사람은 쇼군을 암살하려 했으나 가신인 사무라이가 주와 기리의 갈등으로 머뭇 거린다. 쇼군 일행이 자리를 피하려 할 때 다이묘가 건물 파괴를 명하여 압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가신인 사무라이의 인도로 지하통로를 통해 무사히 탈출한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자신의 기리를 지키기 위해 무너지는 건물 속으로 되돌아가 죽는다. 그는 죽음으로 주와 기리를 둘다 완수했다. 기무와 인정의 갈등이 일본 근대 소설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일본인의 견해로 강자는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약자는 의무와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다.

서양윤리와 대조적인 것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이다. 아내는 고孝의 세계의 주변에 자리하고 부모는 중심에 자리한다. 자식은 둘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부모의 명을 따른다.

일본인의 가르침은 주忠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 데 주어졌다. 도덕의 영역에서 하위의 덕을 모조리 주忠의 범주 아래에 둠으로 의무 체계를 단순화했다. 주忠를 도덕의 근본원리로 삼았다. 이와 같은 방책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표명이 1882년 발표된 군인칙유와 교육칙어다. 이 둘은 일본의 참다운 聖典이다. 군인칙유는 전체적으로 기리를 되도록 가볍게 다루고 주忠를 높이려는 정부의 노력을 보여 준다. 주忠기리를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마코토(誠實)을 일본인들은 도덕적 교훈의 기초라고 본다. 이는 군인칙유가 지지하고 있는 덕목이다. 군인칙유에서 최고의 덕은 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다음은 상명하복과 무용, 신의, 절약과 검소다. 이 다섯가지의 정신이 마코토(誠實)인 것이다. 마음이 성실할 때 이 5개조를 행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성실은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의 가르침과도 상통하고 있다. 마코토는 기리에 덧붙여지는 기호이다.

自重은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 많이 쓰는 말이다. 이는 예절을 지키고 타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을 가르킨다.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성공의 기회를 놓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도 있다. 자중에 자중을 거듭한다는 말은 경솔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무한히 조심한다는 뜻도 있다.

문화인류학적 연구에서 중요하는 것은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를 기조로 하는 문화를 구별하는 일이다. 도덕의 절대적 기준을 설명하고 양심의 계발을 의지로 삼는 사회는 ‘죄의 문화’다.

수치가 강제력이 되는 문화에서는 나쁜 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라서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신에 대해서도 고백의 관습이 없다.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으나 속죄의식은 없다. 죄의 문화에서는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해 선행을 하는 데 비해, 수치의 문화에서는 외면적 강제력에의해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미국의 경우 최기에는 죄의 문화가 우세했으나 차츰 수치가 무게를 더해 가고 있다.

일본인에게는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데 이는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사람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 그들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를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방침을 정한다. 일본인이 외부 세계에서 겪는 문화적 충격은 미시마의 자서전 ‘나의 좁은 섬나라’에 잘 표현되어 있다.

 

 

11. 제 11장 자기 수양

 

미국인은 자기 훈련을 위한 특별한 방법이 비교적 발달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세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훈련을 한다. 자기 훈련 실시 여부는 기술적 본능에 따라 달라진다.

일본인은 중학교 수험생이든, 시합을 앞둔 검도 선수든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훈련은 능력을 배양하는 것과 그 이상의 것을 배양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을 숙달이라고 부른다. 훈련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은 자진해서 하든 강요하는 훈련이든간에 훈련을 통해 사회화되며 이는 억압이라는 것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부모는 아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남편은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한다고 하는 것이 서양인의 신조다. 이들은 자기 희생이나 이타적인 일이 모두 상호 교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쌍방이 다 이익을 얻는 경우 자기가 수행하는 의무를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경우 자기 희생의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 일본인의 경우 당연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인은 훌륭한 경기자가 되기 위해 자기 훈련을 한다. 훈련은 엄격하다. 수양을 쌓아야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인생을 알 수 있게 하고 확대할 수 있게 한다.

일본에서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의 근거는 그것이 처세 태도를 개선한다는 점에 있다.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일본인은 상호의무 관념이 강제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인내력이 강하다.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 외에 그 이상의 것으로 숙달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 훈련에서 달인이 도달하는 심경을 표현한 말 중에는 무가(無我)라는 것이 있다.

무가라는 말은 선종에서 쓰는 말인데 숙달의 경지에서 느끼는 체험이다.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집중력을 기르는 것인데 인도의 요가에서 유래하였다. 요가는 극단적인 금욕과 고행을 하는 종파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불교국가이면서도 윤회와 열반에 대한 신앙이 없다. 윤회에 대한 관념도 없다. 일본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다. 일본의 신화에서도 죽은 사람의 생활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조차 버리고 말았다. 누구나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육체와 정신이 대립한다는 관념도 없다. 수행에서 고행이 제거되었고 금욕적이지 않다. 승려들도 가정을 이룬다. 금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상에 의해 수행의 공을 쌓고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된다. 요가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忘我立身의 경지로 인도하여 우주와 합일한다는 신조 또한 없다. 황홀 상태나 망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집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훈련법으로 간주한다. 일본인들은 인도 요가 수행의 밑바탕이 되는 가정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자기 훈련, 숙달을 획득하는 훈련 수단으로 만들었다. 무사들은 불교의 禪을 자신들의 종교로 만들었고 무사의 훈련법으로 이용하였다.

선은 茶道나 노가쿠(能樂)처럼 일본적인 것이 되었다. 선의 수행법을 강건한 개인주의를 바치는 지주로 이용했다. 선의 전통적인 훈련은 제자에게 ‘깨닫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종적인 것은 학습자의 내면 의식에서 효력이 확인되어야 한다.

정신적 훈련 또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자가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가장 애용되는 방법은 公安이다. 공안은 문제라는 뜻이다. 공안은 일본에서 숙달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숙달 훈련의 궁극적 목적은 막다른 골목이 존재하지 않는 것, 기무와 기리 사이, 기리와 인정 사이, 정의와 기리 사이에도 막다른 골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2. 제 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일본의 갓난아이는 서양과는 다르게 양육된다. 미국인은 일정한 시간에 젖을 주고 일정한 시간에 재우며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며 정해진 규칙대로 하지 않으면 벌을 주는 엄격한 육아 방법을 사용한다.

일본인은 예상과는 달리 갓난아기의 육아는 엄격하지 않다. 일본에서 갖난아기와 노인에게는 최대의 자유가 허락된다. 자라면서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할 자유가 최저가 되고 60세가 지나면 유아기와 마찬가지로 수치나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는 미국과는 상반되는 삶의 유형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장년기에 미국인의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최대한이 되지만 이 시기가 일본은 최대한 속박이 가해지는 시기다.

일본인은 아이들에게 관대하다. 일본인들이 아이를 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를 잇기 위해서다. 여자의 경우도 정서적 만족을 얻기 위해서만 아니라 아들을 낳음으로 가정에서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에게는 엄마 옆에 작은 침상을 만들어 준다.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때가 되면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잔다. 수유는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하며 외출할 때나 일을 할 때는 아기를 업는다. 아이가 많은 집에서는 큰 아이가 동생을 돌본다. 3,4개월이 되면 배변훈련을 시작하며 돌을 전후해 말과 걸음마를 가르친다. 아이에게 버릇을 가르칠 때 아버지나 친족, 이웃 등과 협력하여 역할극을 하기도 한다. 아이에게는 가족내의 서열을 가르친다. 아이의 훈육은 주로 여자의 손에 맡겨지며 어머니와 할머니가 양육을 담당한다.

동생이 태어나는 경우 하나 건넌 형제가 보호자가 되어 돌보아 준다.

아이들은 자는 방법, 앉는 방법 등을 훈련받는다. 유년기에는 남녀가 섞여서 놀지만 학교에 입학하여 2-3년이 지나면 학급도 성별로 분리되고 같은 성별끼리 놀게 된다.

초등학교 2,3학년이 지나면 아이들은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여자아이는 예의범절을 교육받으며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사내아이들은 자중과 세상에 대한 기리를 배운다. 6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부가 중학교에 진학한다. 중학교에서는 상급생이 하급생을 괴롭히는 관습이 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경우 군대에서 집단생활 경험을 한다. 이때 고참병이 신참병을 괴롭히면 이것은 대물림이 된다. 중학교나 군대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옛날부터 일본에서 내려오는 조소와 모욕의 습관에 기인한 것이다.

유아기의 특권적 생활이 일본인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상에서 배척당하며 비방을 받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 개인적인 즐거움을 포기한다.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이러한 인간이 부끄러움을 아는 훌륭한 인간이다. 전후 일본인들은 새로운 생활양식을 수립할 가능성도 있다. 칼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닌 훌륭하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의 비유다. 칼을 버리고 항복을 택한 일본은 녹이 슬기 쉬운 마음 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이다.

 

 

13. 제 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일본이 항복한 후 8월 29일 맥아더 장군은 미국의 정책을 발표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후 당면한 문제는 일본을 어떤 식으로 점령할 것인가였다. 미국은 일본 국민이 자국의 행정과 재건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최고 사령관의 지령에 따라 일본은 정상적인 정부 기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최고사령부는 일본국 정부에 통첩만할 뿐 주민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일본인은 미군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일본인들은 어떤 행동방침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으로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전쟁으로 알맞은 위치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 방침을 포기할 수 있었다. 실패한 주장을 버린 것이다. 맥아더 원수의 지도하에 행해진 미국의 일본 관리는 일본인의 새로운 진로를 받아들였으며 일본인에게 굴욕을 주는 수단을 강행하여 이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의 점령 정책은 일본인의 눈에 패전의 ‘당연한 결과’로 비춰지는 일만 이행하도록 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천황제의 보존은 중대한 의의가 있다. 천황은 맥아더 장군을 방문하였고, 1946년 1월 1일 미국의 권유에 따라 神性 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군비 유지의 부담이 없는 일본은 곧 경제 건설을 하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Ⅱ. 이 책의 논의에 대한 의의 및 한계

 

문화 인류학자인 루이스 베네딕트는 전쟁을 하고 있는 적국인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인의 특성을 연구하였다. 일본인이 보여주는 행동 특성을 일본인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직접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지만 방대한 문헌연구와 해외거주 일본인들의 면접, 문학작품 등 예술작품과 영화 등의 연구를 통하여

일본인의 사유 체계와 독특한 일본적인 것, 국가에 대한 관념 등을 도출하였고 일본인의 전형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을 일본 특유의 문화 사회 역사적 배경에서 고찰하였으며 현실적인 원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이 연구의 목적이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을지라도 이 연구가 지닌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베네딕트가 에도시대나 메이지 시대에는 통용되었지만 쇼와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 가치관이나 규범 행동양식이 많은 데 이 책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고려되지 않은 역사적 시각의 결여, 베네딕트가 말하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애매성, 일본인을 지나치게 동질적으로 취급하며 계층이나 신분 등에 대한 차이를 무시하여 일본인을 지나치게 일반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일본의 문화 사회 역사적 현상을 중국이나 태국과는 비교하면서 우리나라와는 비교하지 못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오는 한계였을 것이다.

 

 

1. 전쟁 중의 일본인의 행태

일본인들은 미국이 지금까지 싸웠던 어느 적과도 달랐다. 저마다 알맞은 위치를 찾기 위해(일본이 覇者가 되는) 전쟁을 한다고 했고, 정신력의 우월을 강조했으며,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였고, 항복을 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문화 행동적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일본인들이 전쟁에 임하는 태도는 일본인이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고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어떤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일본을 이해하는 데 올바른 접근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2. 각자 알맞은 위치 찾기

일본인들은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한다. 일본인들은 국제관계에서도 국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계층제도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일본은 계층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대미선전포고문에도 일본의 정책은 “모든 국가가 세계 속에서 각자 알맞은 위치를 갖게 하려는 데 있다.”라고 했다. 일본은 중국과 더불어 효를 중요한 도덕율로 공유했으며 가족 구성원은 각자 가족내에서 위치가 있다. 일본은 전형적인 카스트 사회로 천황과 쇼궁, 사농상공의 신분이 있었으며 이 신분은 세습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전통이 세계를 강대국과 약소국의 계층구조로 보았으며 일본은 그 상층부에 위치한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일본이 중국을 지배하고 동남아시아에서 패자가 되는 것이 제대로 된 국제 질서요 일본의 위치라고 생각하였다. 연합국과 전쟁을 한 것은 일본이 군축 등의 협상에서 부당한 압력을 받았다고 이러한 일본의 국제적 위치 매김이 미국 등에 의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일본과의 전쟁을 패권 다툼이나 경제적인 원인등 일반적인 요인분석이 아닌 사회 계층 구조와 문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가 분석한 전쟁의 원인은 그 일면만을 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전쟁을 시작한 것은 절박한 경제적 요인 등 현실적인 요인이 있었을 것인데 베네딕트의 분석은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3. 메이지 유신

정치적으로는 메이지 유신은 막부의 통치를 끝내고 왕정복고를 한 것이지만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개혁이다. 그러나, 일본은 전통적인 계층제도를 완전히 철폐하지 않고 끊임없이 계층제도를 고려하며 사회질서를 세워나갔다. 서구의 민주제도를 그대로 도입하지 않고 일본 특유의 정치제도(천황이 정점, 군부의 우위, 의회의 권한 제한 등)를 만들었다. 가정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산업, 군대에서도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일본이 국내에서 잘 작동되는 계층 제도를 타국에게 수출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하였다.

자신의 제도를 타국에게 강요한 것이 결정적 오류였다

베네딕트는 위에서와 같이 일본 고유의 제도를 국제 질서에 적용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계층 제도를 국제 질서에 강요하고 일본이 그 정점에 위치하려 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발생하였다고 보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베네딕트는 전쟁의 원인을 경제적, 정치적 요인에서만이 아닌 역사적, 일본 고유의 계층 제도에서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4. 온과 만분의 일의 은혜갚기

일본인들은 天皇에게 최대의 債務를 졌다고 생각하며 皇恩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드린다.

일본인들은 천황에게 온을 지고 있으며 이를 갚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일본 군부는 참전하여 용감하게 적과 싸우는 것이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병사들에게 주입하였으며 일본군들은 이러한 교육에 힘입어 항복이나 포로가 됨을 거부하고 전원 옥쇄 등이나 가미가제 특공대 등으로 용감하게 목숨을 내던졌다.

베네딕트는 일본군이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천황에 대한 충성심에서 찾았으며 이는 일본인 특유의 온에 기인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5. 기리

일본인들에게 기리義理 역시 기무처럼 갚아야 할 의무이다. 기리는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忠孝와 다른 일본 특유의 범주다. ‘기무는 혈육이나 천황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출생과 동시에 맺어지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방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버려야 하며, 복수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인들은 명예훼손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기리가 친절을 갚는 의무라면 이름에 대한 기리는 주로 복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씼는 행위는 일본인에게는 덕행이 된다. 해군군축 조약은 일본에게 국가적 치욕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 전쟁으로 내모는 단초가 되었다.

주군에 대한 충성은 기리다. 모욕에 대한 복수도 기리다. 일본군이 전쟁에서 적과 싸우는 것은 온을 갚는 것과 동시에 기리를 지키는 의미도 있다. 또한 이름(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해서는 복수를 해 오명을 씼어야 한다고 인식한다. 연합국이 해군 군축조약이나 일본의 중국 침략등의 견제로 일본에게 국가적 치욕을 느끼게 하였고 마침내 전쟁으로 내모는 단초가 되었다고 본다. 베네딕트는 기리라는 일본인 특유의 관습 역시 일본인의 전쟁 행태를 나타내는 배경이 되고 있다고 보았다.

 

6. 仁情의 세계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 주나 기리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통을 겪고 쾌락을 단념하는 것을 칭송하는 미덕으로 보는 일본인 특유의 思考는 비록 쾌락을 부정하지 않지만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을 당하여서는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일본군이 열악한 조건에서도 전쟁을 수행한 것은 기무와 기리뿐 아니라 인정의 세계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본다.

 

7. 덕의 딜레마

일본인의 인생관은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仁情 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들은 인생이 주, 고, 기리, 진, 인정의 세계와 그밖의 많은 세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의 가르침은 주忠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 데 주어졌다. 도덕의 영역에서 하위의 덕을 모조리 주忠의 범주 아래에 둠으로 의무 체계를 단순화했다. 주忠를 도덕의 근본원리로 삼았다. 이와 같은 방책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표명이 1882년 발표된 군인칙유와 교육칙어다. 이 둘은 일본의 참다운 聖典이다. 군인칙유는 전체적으로 기리를 되도록 가볍게 다루고 주忠를 높이려는 정부의 노력을 보여 준다. 주忠기리를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마코토(誠實)을 일본인들은 도덕적 교훈의 기초라고 본다. 이는 군인칙유가 지지하고 있는 덕목이다. 군인칙유에서 최고의 덕은 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다음은 상명하복과 무용, 신의, 절약과 검소다. 이 다섯가지의 정신이 마코토(誠實)인 것이다.

일본군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인 忠으로 정신무장이 되어 있었으며 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최고 덕목이다. 충과 상명하복, 武勇, 信義, 절약과 검소 등 마코토(誠實)가 일본군을 지탱하는 정신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딕트는 다른 나라 군대와는 다른 항복거부와 포로가 되는 것보다는 자결을 택하는 것,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 등 일본군의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군인칙유와 교육칙어, 일본의 전통적인 문화와 교육에서 오는 것으로 보았다.

 

8. 自己修養

일본인은 중학교 수험생이든, 시합을 앞둔 검도 선수든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훈련은 능력을 배양하는 것과 그 이상의 것을 배양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을 숙달이라고 부른다.

일본인은 훌륭한 경기자가 되기 위해 자기 훈련을 한다. 훈련은 엄격하다. 수양을 쌓아야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인생을 알 수 있게 하고 확대할 수 있게 한다.

일본인은 상호의무 관념이 강제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인내력이 강하다.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 외에 그 이상의 것으로 숙달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 훈련에서 달인이 도달하는 심경을 표현한 말 중에는 무가(無我)라는 것이 있다.

베네딕트는 자기수양을 일본인의 특성으로 보았다. 전쟁 중 가장 많은 미군기를 격추시킨 어느 일본인 조종사의 회고에 의하면 적기와 공중전을 할 때 無我의 경지에서 전투를 했다고 한다. 자기수양으로 인한 극기와 숙달로 인한 무아는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보고 있다.

 

9. 어린아이는 배운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서양과는 다른 육아법이 일본인 특유의 인간상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았다. 사내아이들은 자중과 세상에 대한 기리를 배우며 중학교와 군대라는 집단생활을 통해 규율과 질서를 체득한다. 세상에서 배척당하며 비방을 받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육아방법과 성장기의 특성은 일본군인들의 특성과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배척과 비방를 피하기 위해, 명예와 타인의 시선 때문에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전선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10. 패전후의 일본인

베네딕트는 패전후 일본이 미점령군의 정책에 적극협조를 하며 순응하는 것을 일본 특유의 문화현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전쟁으로 알맞은 위치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 방침을 포기할 수 있었다. 실패한 주장을 버린 것이다.”라고 보았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했기 때문에 전후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고,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일본 정부를 존속시켜 간접통치를 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통치방법을 피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점령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는 주둔 초기부터 고압적으로 나오며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나와 한국에서의 군정이 큰 저항과 혼란에 직면하였던 것과는 상반되는 현상이다.

 

2012.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