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험지옥 - 科擧를 읽고
Ⅰ. 들어가며
대입전형 발표가 학교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합격한 당사자나 부모, 주의의 사람들의 기쁨은 크겠지만 탈락한 당사자나 부모와 주위 사람들은 실망과 아쉬움이 클 것이다.
입시지옥이라는 말은 40여년전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도 있었던 말이다.
그때보다 대학입학정원이 무려 20배가 가까이 늘어났고, 만성적인 미달사태로 학생을 모으는 것도 힘든 대학이 많지만 여전히 입시지옥은 존재하고 합격이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내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시 지옥은 왜 생겼고, 언제부터 유래되었을까?
겨울방학을 하고 몇권의 책을 읽었다. 그중의 한권이 ‘중국의 시험지옥 - 科擧’라는 책(청년사 간)이다. 이 책은 일본의 동양사학자인 마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라는 분이 쓴 책(박근칠, 이근명 번역)이다. 미야자키 박사가 이 책을 저술한지는 40년이 넘는다. 1963년에 저술된 책이 번역되어 국내에 출판된 것은 1996년이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마치 최근에 씌여진 책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천사백년간이나 시행되다가 폐지된지 100년이 넘는 제도인데도 얽힌 이야기가 마치 오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노라면 입시지옥이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닌 1500년도 넘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것임을 알 수 있고,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1000년전이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비록 科擧라는 시험은 백년전에 폐지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이름과 모양만 살짝 바꾼 과거시험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이것을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적용하여 왔다.
문명을 분류할 때 우리나라는 중국, 베트남과 같이 유교문화권으로 분류된다.
중국과 같이 한자를 사용하였고, 중국에서 나온 고전으로 공부를 했고 그 윤리를 최고덕목으로 숭상하며 실천하였던 우리 조상들과 그 후예인 우리들은 21세기 세계화된 개방된 사회에 살면서도 중국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중국의 유교문화를 20세기초 서구의 어느 학자는 동양이 서양에 뒤지게 된 원인으로 보았지만 중국이 무섭게 발전하고 세계로 뻗어가는 지금 우리나라와 중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눈부신 발전을 유교문화때문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같은 문화를 가지고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재로 썼던 四字小學이라는 책에 보면 “立身行道 揚名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서 부모의 명성을 드러냄이 효도의 끝이며 완성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줄여서 立身揚名이라고 하는 데 이것이 우리의 선인들이 공부를 하는 궁극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관직에 나가는 것인데 관직에 나가는 출발점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때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진언에 따라 과거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우리보다 400년가량 앞선 6세기말 수나라 문제때 과거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게르만민족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혼란이 겨우 수습되어 중세가 막 시작되려는 무렵에 중국에서 과거가 시작되었다. 과거제도가 도입된 목적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꺾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도가 시행되었든지간에 과거는 획기적인 제도였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공무원을 공채로 뽑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중반에서 후반부터라고 하니까 중국에서는 그보다 1400년이나 앞서 인재를 공채하는 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수나라 이전 한나라때까지는 귀족들이 지방에 근거를 두고 할거하고 있었으며 중앙의 관직도 귀족층에서 독차지하였었는 데 과거의 시행으로 평민층에서도 능력만 있으면 관직에 진출하여 황제를 보좌하며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科擧라는 시험은 아주 신분이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었으며 세습에 의한 신분에 의해서가 아닌 능력에 의해 발탁되고 관직을 맡게 되는 열린 제도였던 것으로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야 공무원을 공채하기 시작한 미국이나 영국 등 서양에 비해 과거제도가 얼마나 선진적이고 앞선 제도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견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고 능력에 따라 발탁이 되는 제도로 보이는 과거가 수많은 폐단을 보였고, 우리는 그 잔재의 하나인 입시지옥 속으로 아이들을 떠밀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중국의 과거 제도에 대하여 간략하게 서술하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논하고자 한다.
Ⅱ. 시험공부
1. 早期敎育 熱風
오늘날 조기 영재교육이 유행하고 있다. 책장사들이 말하는 “영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라는 말이 많은 젊은 부모를 현혹하고 있다. 필자의 30여년간 교직경험으로 볼 때 필자의 기준에 따른 영재(좁은 의미로 자연과학 분야)는 대략 1000명에 하나 꼴로 출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예체능이나 다른 분야의 영재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늘겠지만 누구나 영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자식이 영재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동서고금이 같을 것이다. 영재로 태어나지 못했다면 적절한 교육을 통해서라도 영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을 이용한 것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조기 영재교육 프로그램들이다.
영재를 태어나게 하고 기르기 위해 胎敎까지 행해지는 데 오늘날 행해지는 태교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올바른 심신을 가진 자녀를 낳기 위해 행했던 태교와는 아주 다른 형태의 胎敎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과거를 위한 경쟁은 자식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들이 사용하는 구리거울(과거에는 구리나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었음)의 뒷면에는 五子登科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아들 다섯을 낳아서 모두 과거에 급제시키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임신한 어머니들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좋지 않은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며 詩經에 나오는 좋은 구절을 듣는 것 등은 오늘날의 태교를 하는 엄마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하여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면 ‘壯元及第’라는 글귀가 새겨진 동전을 뿌려 하인들이 줍게 하여 축하 팁을 주었다고 한다. 장원급제야 말로 아들을 둔 부모뿐만 아니라 가문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학문은 가능한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다고 하는 것도 오늘날 부모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중국에서는 다섯 살때부터 가정교육을 시작하였다.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 데 물론, 처음에는 획수가 적고 간단한 글자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25자의 간단한 글자를 가르친 후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 데, 이 시대에도 배우는 속도가 무척 빠른 아이들이 있어 학교에 들어가서 배울 사서오경까지 진도가 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천재가 났다는 평판이 나서 황제의 귀에까지 소문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이들 중 대성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천재로 소문났던 어린이들이 커서는 평범한 인물이 되는 오늘날의 경우와도 상통하고 있다.
2. 교육과정
여덟살 무렵에 초등교육이 시작되는 데 서당에 가서 교육을 받게 된다. 四書의 하나인 論語부터 공부하기 시작하는 데 공부방법은 무조건 읽고 암송을 하는 것이다. 최소한 50번을 읽고 50번을 암송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해당하는 나이라 장난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은 고금이 같은 이치이고, 그래서 공부를 게을리하면 선생님에게 체벌을 당하는 것도 오늘날과 같다(요즈음은 학교에서 체벌이 거의 사라진 대신 학원에서 체벌이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때 배우는 책은 논어, 맹자, 주역, 서경, 시경, 예기, 좌전인데(중용과 대학은 예기에 포함되어 있음) 본문만의 글자수가 모두 431,286자나 된다고 한다. 이것을 암기하는 데 6년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암송이 끝나면 분량이 그 몇 배에 이르는 주석을 공부하해야 하고, 이밖의 다른 경전도 공부해야 하고 시와 문장을 쓰는 방법도 공부해야 한다. 놀기를 좋와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기에 이러한 공부를 해야 하니 당사자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오늘날 영어, 수학, 과학, 한자, 논술 등 수많은 과목을 배우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들보다 아마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오늘날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만 발췌하여 학습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을 추려서 학습하는 학습법이 있었고 이런 류의 책이 발간되기도 하였는 데 정도가 아닌 방법으로 공부를 한 경우 조금만 예상에서 어긋난 문제가 나올 경우 낭패를 보는 예도 오늘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Ⅲ. 과거시험 - 굽이굽이 험난한 고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옛 중국인들의 꿈은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었다. 어느 시인은 인생의 네가지 기쁨(人生四喜)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久旱逢甘雨 他鄕遇故知 東方華燭夜 金榜掛名時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나는 것, 타향에서 고향의 지기를 만나는 것, 신방에 화촉을 밝히는 것,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방에 붙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꿈도 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나는 것과 타향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쁨이지만 좋은 상대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과 출세하는 것은 오랜 노력과 운과 능력(부모와 자신)이 뒷받침이 되어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인 데, 부모와 당사자는 이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옛날과 같은 科擧는 없지만 고시에 합격한다거나 대학교수가 된다거나 의사가 된다거나 대기업체에 취업한다거나 하는 소위 잘나가는 괜챦은 직업을 갖는 것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하려면 학교에 입학하여야 하는 데 여기에는 현시(縣試), 부시(府試), 원시(院試)를 거쳐야 하는 데 이것은 오늘날 입학시험 비슷한 형태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지방소재 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生員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데 생원만 되어도 지역에서는 유지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학교에 재학 중 세시(歲試)를 치러야 하고 科試라는 시험을 치러서 1단계의 과거시험인 鄕試에 응시할 자격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기까지 다섯 단계의 시험을 치러야 하는 데 어떤 단계에서는 5회의 시험을 연속으로 치르는 경우도 있어 적어도 10번 이상의 시험을 치러야 향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의 생원시에 해당하는 鄕試에서는 본고사라고 할 수 있는 2차 시험에 응시할 자격자를 뽑는 데 보통 응시자 수의 1%정도를 선발하였다고 하니 100:1의 경쟁을 보이는 시험이었다. 이 향시를 통과하면 거인(擧人)이라는 칭호가 주어지며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영예가 되었다고 한다. 향시에 합격한 거인들은 다시 거인복시(擧人覆試)라는 추가 시험을 치르고 이어서 본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會試에 응시하였다. 이 회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거라고 할 수 있는 시험이다. 회시에 합격을 하였다고 시험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황제 앞에서 시험을 볼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회시복시(會試覆試)가 있었고 여기서 통과하면 마지막 시험으로 황제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전시(殿試)가 있었으며 이 시험에서 등위가 결정되어 급제자가 발표되었다. 殿試까지 통과하면 進士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받게 되며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본인이나 가문에 영광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그런데, 진사라는 영광을 얻는 사람은 한번 시험(회시는 3년마다 한번씩 치르어짐)에 300명정도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경쟁을 통과하여야 한다.
생원이 되어서부터 향시와 회시를 거치기까지 경쟁률은 무려 3000 : 1이된다.
향시가 100:1, 회시가 30:1의 경쟁을 보였다고 하니 3000명의 생원 중 한명만이 진사가 될 수 있었으니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까지 감안을 하면 1만명이 넘는 입지자 중 오직 한사람만이 급제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경우와 비교하면 어떨까?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왕조시대와는 달리 官職만이 최고의 자리는 아니다. 관직이외에도 여러 전문직이 있지만 이는 시대 상황에 따라 모양만 바꾼 관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士자가 들어가는 직업은 예전보다는 그 인기가 떨어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자격을 얻기까지 엄청난 경쟁을 통과하여야 한다. 대학의 전임 교수자리나 대기업체의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은 피나는 경쟁을 뚫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王朝時代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를 얻기 위해 부모들은 자식을 경쟁의 대열로 몰아넣고 있으며 당사자들도 이를 성취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형태만 바뀌었지 과거의 관직과 같이 부와 영예를 가져다 주는 그런 직업을 얻는 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어려운 일인 것이다.
Ⅳ. 機會均等 뒤에 가려진 不均等과 열린 제도의 같으면서도 닫힌 제도
과거의 매력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다는 데 있다. 문벌의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능력만 있으면 발탁될 수 있었다(우리나라의 경우 비록 양반이며 적자인 경우만 해당되었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 평민층에서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것은 출신학교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다는 기업체의 선발방식에 불만이 있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확실히 열린 제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과거제도가 정말로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열린 제도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며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과거 급제자 중 20대 급제자는 소수였다고 한다. 30대에 급제하여도 빠른 편이었다고 하니 보통 40대가 되어서 급제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인명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분들의 급제 시기를 보면 20대 급제자는 그리 많지를 않다. 30대에 급제한다고 하여도 적어도 20년 이상은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옛날에는 대개 早婚을 하였음으로 처자를 거느린 상태로 공부를 해야 하는 데 누군가가 수험생의 생계를 도와주어야 하는 데 이는 부모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진 경우에나 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먹고 살기에도 바쁜 서민층에서는 과거 응시란 꿈도 꾸지 못할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다.
이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상통하고 있다. 사법고시를 예로 들면 매년 1000명 정도가 합격을 하고 있는 데 평균 연령이 30세 가까이 된다. 최종 합격까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평균 5-6년이 걸리는 셈이다. 합격자의 80%정도가 명문 몇 개 학교에 집중되고 있는 데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변리사나 공인회계사 행시 합격 등도 사시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의사나 한의사, 치과의사, 박사급 연구원 등은 해당 분야를 전공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제외하고라도 위에서 예를 든 자격시험은 100:1 이상의 경쟁을 극복하여야 하고, 합격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통과 과정을 거쳐야 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옛날의 과거와 비교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소요되고, 이 비용은 대개의 경우 당사자가 해결하기는 어렵고 주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예전의 과거와 아주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사법고시 등 각종 고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여기에는 응시자의 신분에 대한 차별(가문이나 출신학교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합격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수도권 지역의 몇 개의 특정 명문대가 합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들 명문대 출신 과반수 이상이 수도권의 특정지역 학교 출신자임을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고시제도도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열려 있는 제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科擧)라는 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古今이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500년전의 부모들도 자식이 출세하기를 바랐고 오늘날의 부모들도 이것을 바라고 있다. 교육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것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엄청난 경쟁을 치러야 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이를 아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키려 하고, 놀기 좋와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든지 꾀를 부리는 모습 역시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똑같다.
소위 엘리트가 되는 데는 본인의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많은 물적인 뒷받침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하층민에게서 엘리트가 나오는 것이 어려운 것 역시 古今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공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닫혀 있는 불평등한 제도라는 것 역시 오늘이나 옛날이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치는 동서고금이 동일하다는 것, 옛날에 있었던 것이 오늘날에도 반복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기회에 과거의 각 단계의 시험과 얽힌 뒷이야기를 서술하고자 한다.
2006.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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