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병원은 성골룸반의원의 별칭이다.
춘천시 약사동 죽림동 성당 인근에 위치했던 성골룸반의원은 수녀병원 또는 성당병원이라고 통칭되었다.
2021년 6월 30일 지역신문인 '춘천 사람들'에서는 성골룸반 의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다. 기사의 내용은 1955년 11월부터 춘천에 설립되어 2011년까지 의료봉사를 하였고 2013년까지 호스피스 봉사를 하다가 더 열악한 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춘천에서의 활동을 종료하였다.
춘천시에서는 성골룸반 의원의 이러한 사랑과 봉사를 기리기 위해 6월 25일에 기념비 제막식을 하였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55년 11월,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통받던 시민을 위해 당시 천주교 춘천교구장이던 퀸란 토마스 주교의 요청으로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 소속 의사 데이비드 수녀와 간호사 필로메나 수녀가 파견되어 ‘성 골롬반 의원’을 열고 극빈층을 위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가 늘자 아일랜드,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보내온 후원금을 모아 1962년 약사리 언덕에 확장하여 자리잡았다. 이후 2011년 10월 30일 폐원하기까지 56년간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 소속 51명의 수녀들은 가정방문 진료, 무의촌 진료, 방문 호스피스, 노인요양보호 등 다양한 의료봉사를 펼쳤다. 특히 1989년부터는 당시 이름조차 낯선 호스피스과를 설치, 방문 호스피스를 2013년까지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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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성골룸반 의원을 기리는 것은 이곳에서 받은 수혜[受惠]가 컸가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병원의 존재를 안 것은 막내 남동생의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어른들은 성골룸반 의원을 수녀병원 또는 성당병원으로 통칭하였다.
성골룸반 의원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쉽고 병원의 특징을 잘 나타냈기 때문이다.
막내동생은 아기때부터 귀에 염증이 생겨 잘 낫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동생의 증세가 심해지면 동생을 업고 양구에서 춘천까지 가셔서 치료를 받게 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수녀병원이라는 명칭을 알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느라 춘천으로 온 후에는(1965년) 내 자신이 치료를 받으러 수녀병원에 다녔다.
수녀병원이라는 호칭은 수녀님들이 병원에서 봉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수녀님들은 간호사 등 의료 인력으로 활동을 하셨다. 의사로 진료를 하셨던 수녀님도 계셨다.
이 병원은 진료비가 저렴하였다. 일반 병의원의 반값도 안되는 비용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병원에는 늘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로 붐볐다. 접수하고 대기하였다가 의사를 만나는 데는 2시간은 기본이었다.
조금이라도 대기 시간을 줄이려면 빨리 접수하는 길밖에 없었다.
접수시간 훨씬 이전부터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병원 직원들이 몰려드는 환자들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분주했다.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짧은 시간에 진료가 끝나야 했다.
간단히 증상을 묻고 약을 처방받았다.
환자는 계속 밀려들고 의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세하게 문진을 할 수도 없었다.
진단장비도 X - ray 등 간단한 검사장비가 있었을 뿐 청진기와 문진에 의해 진찰을 하고 병명을 판단하고 처방을 내려야 했다.
과장해서 말하면 환자 1명을 진료하는 데 빠른 경우 1-2분밖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진료를 받으면 대부분의 질병이 잘 나았다. 까닭은 병원의 설립 정신이 인간애의 실천이었고, 수녀님들을 비롯한 병원 종사자들이 신앙과 사랑과 헌신으로 환자들을 돌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들여오는 약을 투여하기 때문에 잘 낫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성골룸반 의원과 필자와의 인연은 고교시절로 끝나지 않았다.대학에 다닐 때 장기간 치료를 요하는 난치병에 걸려 이 병원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약값이 쌌기 때문이다.오랫동안 다니다 보니 수녀님들과 인사도 나누게 되었고 필자가 쓴 영어수필을 수녀님께 교정을 받기도 하였다.
다행히 완치가 되고 1974년 교사로 발령을 받아 가면서 성골룸반 의원에서 진료를 받는 일이 중단되게 되었다.
외지에서 근무하는 관계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상황이 좋와져서 굳이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할 필요성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 공무원의 건강보험이 시행되었고 이어서 전국민 건강보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국민들이 진료비 부담이 줄게 되었고 국가에서 저소득 계층에게 베푸는 의료 혜택도 커졌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에 빈민이나 저소득층을 위해 봉사하던 자선병원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 수녀병원을 찾는 환자수의 감소로 이어졌다.
더 이상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필자가 학교에서 근무할 때 병원에서 근무하셨던 수녀님이 방문하셨다. 양로원에서 봉사를 하시는 것 같았는 데 양로원 노인들이 만든 카네이션을 판매하러 오셨다.
나는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병원을 통해 받았던 은혜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수녀님은 할머니가 되셨는 데 고국을 떠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시고 봉사하신 그분의 삶이 존경스러웠다.
병원을 운영하는 가토릭의 선교회 측에서는 의료혜택에서 제외된 빈민들을 치료하던 병원의 설립 목적이 한국에서는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우리나라보다 더 의료환경이 열악한 나라로 봉사활동 장소를 옮기자고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2011년 진료할동을 종료하고 호스피스 뢀동으로 전환하였다가 2013년에는 호스피스 활동도 종료하였다.그러나 춘천 시민들은 돈이 없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떤 전후의 가난하던 시절 성골룸반 의원을 통해 질병을 치료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금년 6월 25일 성골룸반 의원이 위치하였던 곳에 병원이 베푼 인술활동과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낯선 나라에 와서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실천하였던 수녀님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한 것이다.춘천 시민들과 양구 가평 홍천 등 인근 지역 주민들은 어려웠던 시절 성골룸반 의원이 베풀었던 인술과 이곳에서 헌신 봉사하였던 수녀님들을 비롯한 종사자들의 사랑의 실천을 잊지 않고 길이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병원을 운영하였던 선교회가 다른 나라에서 계속 인술을 베풀어 나갈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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