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사육해 보면 형제들끼리 장난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아지라면 서로 엉켜 싸우는 동작을 하기도 하고 무는 흉내를 내기도 한다.
돼지 새끼들도 떼로 몰려 다니며 논다.
TV에 나오는 동물의 새끼들도 형제들끼리 놀이를 한다.
놀이는 모든 동물들의 성장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놀면서 자란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형제들끼리 놀고, 또래와 함께 논다.
그런데 노는 것이 단순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동물들은 놀이를 통해 생존에 필요한 동작을 익힌다고 한다.
서로 뒹굴면서 물거나 할퀴는 흉내를 내기도 하고, 공격과 방어의 동작을 흉내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생존에 필요한 동작을 익히는 것이라고 한다.
유아들도 흉내와 놀이를 통해 생활에 필요한 기본 동작들을 익힌다.
동화를 들으며 어휘를 익히고 이야기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선악을 구분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배운다.
강원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신석기 시대 유물 중에 어린이 손가락 크기의 아주 작은 토기가 한점 있다.
아마 어른들이 토기를 만드는 것을 본 어린이가 흉내를 내어 만든 습작품일 것이다.
이 토기에 지문이 새겨져 있는 데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래된 지문이라고 한다.
유아들은 부모와 형제와 친족들과 장난을 치고 놀면서 몸동작을 익히고 어휘를 익히고 예절을 배운다.
아이들이 좀 자라면 부모를 떠나 또래나 이웃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게 된다.
예전에는 골목이 아이들의 놀이터요 어린이집이었다.
걸음마를 배워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이가 누나나 형을 따라 밖으로 나온다.
이 아이는 누나나 형, 언니나 오빠 또래 아이들의 돌봄을 받는다.
그들과 놀면서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동작을 익히고, 말을 배우며, 예절을 배운다.
때로는 또래와 싸우기도 한다.
이 싸움도 성과가 없는 나쁜 것만이 아니다.
싸움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배우며, 또 싸움을 회피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좀 크면 또래들과 같이 산과 들로 뛰어 다니며 놀게 된다.
여기서 또래집단의 문화를 익히게 되고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농촌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에서는 골목이 사라지게 되었다.
농촌에는 놀 아이들이 없고, 도시에서는 놀 공간이 사라졌다.
핵가족화로 부모 이외의 다른 가족과 접할 기회가 사라지게 되었다.
어린이 집이 골목을 대신하게 되었고, 유치원과 초중등학교와 학원이 또래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산과 들과 골목이라는 놀이터가 사라지자 PC방과 게임기와 컴퓨터 스마트폰이 사라진 놀이공간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장과정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부모 이외의 친족이나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학교라는 사회와 마주치게 된다.
일부 어린이들은 부적응이라는 홍역을 겪게 된다.
대다수는 학교교실에서 또래집단과 어울리며 사회화 과정을 겪지만 일부는 적응에 실패하고 고립된 세계에서 살게 된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공부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노는 것을 시간 낭비로 보고 있다.
놀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동안 학습과 관련되는 무엇 하나라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또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원을 순례하게 된다.
부모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앞서야 하고, 앞서기 위해서는 남이 하지 않을 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노는 것을 게으름과 동일시하던 전통적인 사고방식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열이 너무 강한 엄마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한글이나 영어를 배우게 한다.
아이들을 조금 배려하는 교육열이 강한 엄마들은 지능계발을 위한다는 완구나 영상자료를 접하게 한다.
게임이나 놀이를 통해 학습을 시키려는 시도가 부분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아동들이 흥미있어 하고 무엇인가 배우려는 의욕이 있다면 효과는 더할 것이다.
그러나 흥미가 없거나 아직 학습할 준비가 덜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강요를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문자해독은 물론 셈과 외국어를 조기교육 시키고 싶어한다.
문제는 아이의 발달정도를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아이와 비교하며 학습을 강요하는 경우다.
또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한 의욕이 넘치는 경우다.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친구의 손녀딸의 예다.
그 친구가 퇴직하기 전 손녀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교육열이 넘치는 며느리는 손녀딸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손녀딸은 무려 여덟곳의 학원을 다녀야 했고 며느리는 아이를 해당 학원으로 운송하는 일에 몰두해야 했다.
요즈음 젊은 세대가 부모의 조언을 잘 듣는 경우는 드물다.
기가 막힌 그 친구는 "내가 초등학교 선생이다"라는 말로 우회적인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아이가 놀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벌써 한세대 전부터 학원이 학교를 우선하게 되었다.
서울 강남에 거주하던 필자의 친구는 아들의 학원비로 수입의 1/3이상을 지출하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중학교 과정을 선행학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교는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다니는 것이고 실질적인 공부는 학원에서 한다고 했다.
1993년 시지역에서 농촌지역으로 가서 근무를 하다가 1999년 다시 시지역으로 전입을 하였다.
필자가 도시를 떠나있던 6년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학급인원의 절반 이상이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를 다니고 있었고, 학원을 다녀보지 않은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어떤 아이들은 밤 늦게까지 학원수업을 받고 과제를 이행하고 학교에 와서는 쉬거나 잠을 잤다.
중학교 과정에서 이들이 놀 시간은 없었다.
지금과 비교를 할 수 없지만 필자의 학창시절을 회상하여 본다.
고교시절 입시로 인한 부담은 있었지만 대부분이 학교수업이 끝나면 자유시간이기 때문에 친구들의 집에 놀러가거나
어울려서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친구들의 집에서 놀다가 때가 되면 친구들의 식구들과 같이 밥을 먹기도 하였다.
그때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과 지금까지 50년 이상 우정을 나누며 지내고 있다.
자식의 자식 세대인 지금의 아동과 청소년들은 어떠할까?
공부를 강요당하여 학원을 전전하며 다람쥐 체바퀴를 도는 것같은 생활을 하는 아동과 청소년들은 물리적으로 놀 시간이 없을 것이다.
같은 학급과 학년의 동료들이 내신제에서 경쟁자 관계가 되는 청소년들의 우정은 우리세대와는 다를 것이다.
특히 유아와 초등학교 단계의 어린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배우고 또래 문화를 형성하며 성장한다.
그런데 노는 시간을 박탈당한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성장을 할 수 있을까?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놀이를 노는 시간을 부모나 교사들이 시간낭비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기본적인 학습은 해야 하겠지만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시간을 많이 확보해 주는 것이 좋은 부모가 해야 할 역활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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