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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호떡의 추억

 

 

호떡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설탕을 넣어 구운 뜨거운 떡이다.

흑설탕외에 야채 등 다른 재료로 속을 만들기도 한다.

호떡은 찐빵, 국화빵, 붕어빵 등과 같이 값이 싸서 주머니가 가벼운 어린이, 청소년,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다.

추운 겨울 뜨거운 호떡은 별미다.

내가 처음 호떡을 먹어본 것은 고등학교 때다.

밀가루 반죽에 흑설탕을 넣고 갖 구워낸 호떡은 나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가벼운 호주머니 사정 때문에 자주 먹을 수 있는 먹거리는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어쩌다 한번 먹을 수 있는 나에게는 고급 음식이었다.

춘천 시청 앞길에서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호떡을 구워서 팔았는 데 맛이 좋왔다.

고교생 시절 처음 맛본 이래 아주 가끔이지만 시내를 나올 기회가 있으면 그곳에서 호떡을 사먹었다.

교사로 근무한 후에도 방학때 춘천에 올 기회가 있으면 시청 앞에서 호떡을 사먹었는 데 어느 해인가부터 그 호떡 포장마차가 없어져서 시청 앞에서 호떡을 사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곳의 호떡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이가 들면서도 일년에 몇 번씩은 옛날을 생각하며 호떡과 찐빵을 사다가 먹는다.

마지막 근무지였던 서석에서 근무할 때다.

그곳은 5일마다 장이 섰다.

시골에서는 꽤 큰 장이었다. 없는 것 빼고는 온갖 물건들이 다 유통되었다.

장구경을 하는 것이 재미났다.

계절을 따라 산과 들에서 생산되는 산나물과 채소와 농산물들이 매매되었다.

맛있는 두부를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가끔씩 두부를 사다 먹었다.

겨울이면 호떡을 굽는 곳이 있었다.

그분은 홍천, 횡성, 서석, 내면 장 등을 돌면서 호떡을 구워 판다고 했다.

호떡이 무척 맛있었다.

미리 호떡을 주문하여 놓고 굽는 동안 장구경을 하였다.

주문한 호떡을 들고 교무실에 와서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다.

가끔은 집에도 가져왔지만 오면서 식은 호떡은 갖구워냈을 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지나온 삶의 자취를 돌아볼 나이가 되면서 겨울이 오고 호떡을 파는 계절이 오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대학교에 1학년때 초여름의 일이다.

비염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이비인후과에서 간호 조무사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러 왔던 C라는 교대 1학년 여학생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았다.

C가 숙소를 옮기면서 내가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선개헌 반대 움직임으로 대학은 일찍 방학을 하게 되었고 C는 시골 집으로 가게 되어 방학동안에는 볼 수가 없었다.

편지만 1-2번 주고 받고 긴 방학을 보낸 후 개학을 맞이하였다.

매주 교회에서 마주칠 수 있었지만 소심한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다.

예배시간에는 온통 그녀가 앉아있는 곳에 마음이 가있었지만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에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간단한 인사말만 주고 받을 뿐이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삼선개헌 국민 투표가 끝나고 늦게 개학을 했기 때문에 겨울방학이 늦어졌다.

196912월 중순경의 어느날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 데 C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나에게 영어 교재의 한 장(chapter)을 번역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가며 열심히 번역을 하였다.

내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신인 오르페우스(Orpheus)와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Eurydike)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였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을 때 독사에 물려서 죽은 아내를 저승에서 되찾아 오기 위해 리라를 들고 저승세계로 떠난다.

저승을 지키는 카론과 삼두견 케르베로스를 음악의 힘으로 감동시키며 길을 가서 마침내 저승의 주인인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리라 반주에 맞춰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음악의 힘으로 저승의 주인을 감동시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오게 되지만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금기 사항을 어김으로 그의 아내는 저승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되며 영원한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요일 예배가 끝나고 C를 만나 번역을 한 원고를 넘겨 주었다.

우연히 병원에서 만난 후 몇 달간 교회에서 마주쳤지만 처음으로 둘이서 걸어나왔다.

조금 걸어오다 보니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C는 고맙다는 인사로 호떡을 사겠다고 했다.

포장마차에서 같이 호떡을 먹었다. 처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에 만날 날짜와 시간도 약속을 하였다.

C와 함께 교회밖으로 나와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를 거쳐서 각자의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헤어지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꿈을 꾸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구름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며칠 후 만날 기대를 하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C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일 줄을 몰랐었다.

다음 주 예배에서 C는 보이지 않았다.

예배후 기도가 끝나고 보니 편지 한통이 놓여 있었다.

C의 남동생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편지를 읽어 보니 무언가 나에 대해 지독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힐난을 하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단호한 절교 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나는 멍할 수밖에 없었다.

방학을 하고 C가 집으로 갔으니 해명을 할 수도 없었다.

나를 도와주던 친구는 교대 복학생 선배가 C에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해서 오해를 하고 화가 난 것이라고 했다.

다음 해에 개학을 하고 C에게 만나자고 했지만 만나주지를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심한 상사병(相思病)을 앓았다.

나의 이성은 그녀의 거부가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C를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감성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를 잊어야 한다는 이성과 잊을 수 없으며 다시 시도해야 한다는 감성은 내 마음 속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재수를 하지 않고 들어 가서 졸업을 하고 교사로 근무하는 C의 친구인 신선생을 통해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다른 異性에게 관심을 돌리려고 시도도 하였지만 상대방의 태도가 경계를 하는 것 같으면 거절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더 이상 접근을 하지 못하고 포기를 하였다.

그리고 나면 다시 C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다.

어떤 때는 몇 달 동안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에서 떠나보냈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에 그녀에 대한 생각이 다시 타올랐다.

그때마다 C의 친구인 신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서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대학원에를 진학하게 되었다.

몇 년만에 신선생을 통해 보낸 편지에 대해 C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를 심하게 힐난하는 냉정한 거절의 편지였다.

아마 C가 편지를 보내놓고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을 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티이즈데일의 시가 있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잊어 버려요.

꽃을 잊듯이 잊어 버려요.

한때 훨훨 타오르던 불꽃을 잊듯이

영영 잊어 버려요.

세월은 고마운 벗, 세월따라 우리는 늙어가는 것.

 

그 누가 묻거들랑 이렇게 대답하세요.

그건 벌써 오래 전에 잊었노라고.’

꽃처럼, 불꽃처럼, 그 옛날에 잊혀진 눈 속에

꺼져버린 발자국처럼.

 

그의 강한 거부의 편지를 받고 심하게 다시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어 갔다.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대학원을 다니는 것이 어렵게 되어 중등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초임 교사로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면서 자연 C에 대한 생각은 엷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만남을 거듭하면서 가까워지게 되었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젊은 날의 꿈은 축소되어 현실 속의 소시민이 되었고, 직장과 가정을 반복하여 오가는 쳇바퀴를 돌며 나이를 먹어 가고

20112월에 37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게 되었다.

앞만 보고 나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나이가 되며 젊은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C의 친구를 통해 C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 역시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호떡가게 앞을 지나가면 호떡이 먹고 싶다.

호떡을 먹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시청 앞에서 먹던 그 호떡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C와 함께 호떡을 먹던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였던 그 순간도 이제는 반세기가 지난 아득한 옛추억이 되었다.

마지막 근무지였던 서석 장에서 호떡을 사가지고 가서 후배 동료들과 함께 나누어 먹던 것도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뒤돌아 볼 추억이 있다는 것은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며 이 역시 행복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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