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힘 대선 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 조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조부인 최병규님께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는가에 대한 논란이다.
최병규님의 손자가 되는 최재형 후보는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 측에서는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고 허위사실을 기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최병규님이 독립운동을 하였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겠다.
다만 춘천고등학교 90년사(2014년)에 수록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춘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춘천고보는 1924년에 개교하였고 3년후면 개교 100년이 되는 강원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인문계 고교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거의 모든 학교가 그렇듯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저항은 등교거부 동맹휴학 시위 교사배척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아래는 춘고 90년사 136-137쪽애 에 수록된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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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트는 배일맹휴(排日盟休)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신학문을 탐구하던 학생들에게는 당시 민족혼과 민족의 장래에 대한 애국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건은 1926년 10월 4일 당시 모리(森) 교무주임의 망언에서 발단되었다.
모리주임은 항시 입버릇처럼 한민족을 멸시하는 언투(言套)를 서슴치 않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나 모리선생 배척 맹휴를 결의하고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에 당황한 모리주임을 비롯한 전 교유들은 갖은 공갈과 회유로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응하고 맹휴를 단행한 학생들의 용기는 대단하였다.
이에 당황한 사토 교장은 당시 3학년 갑조 급장인 이명길과 을조 급장 최병규를 대동 총독부까지 가서 당시 학무국장과 함께 회유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불응하자 학교당국은 주모자(당시 급장)를 5일 새벽 2시 심야에 퇴학처분을 내리는 소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당시 1926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신문보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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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대정 15년(1926년) 10월 8일 동아일보 제 2187호
교무주임 배척코저
춘천고보 맹휴
(이삼학년 학생 일백 이십여명아 학교와 학무과에 탄원서 제출)
학교당국은 대책강구
지난 4일 오후 2시부터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춘천고보) 이삼학년 생도 일백이십여명은 돌연히 탄원서를 학교당국과 학무과에 제출하는 동시에 동맹휴학을 단행했는 데 원인은 동교 모리 교무주임이 평소부터 학생들에게 너무 사정없이 때림으로 그를 배척하기 위하여 일곱가지 조건을 제출한 것이라는데 학교측에서는 방급 대책을 강구중이더라(춘천)
심야흑출학(深夜黑黜學)
주모자 네명을....
별항 사건으로 학교 당국에서는 주범자로 인정되는 생도 네명을 오일 오전 두시반경에 네명에게 퇴학처분을 명한 후 그날 아침부터는 직원들이 각 생도를 호별방문하여 여러 가지로 등교를 권유하였으나 학생들은 최후까지 강경하게 나가겠다고 고집하는 중이라는 데 학교당국도 학무과에 보고를 아니하고 경솔히 하였다 하여 학무과에서도 매우 말을 한다더라(춘천)
(1926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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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필자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조부인 최병규님이 항일운동을 했는지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분이 항일운동을 한 독립 유공자인지 친일행위를 한 친일파인지는 당사자의 전 생애를 통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병규님이 춘천고보 1회로 입학하여 1926년 일인 교사의 만행에 항의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이 때문에 퇴학을 당했다는 것이다. 일제때 동맹휴학을 한 것을 항일운동으로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사건 발생 원인과 전개과정 처리 결과가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인 교사의 민족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은 학생들에게 공분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민족의식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병규님의 동맹휴학 주동은 분명 항일의식의 표출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 드러내 놓고 배일을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교사의 드러난 행위에 대한 불만을 사태의 원인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배일 사상이 행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식하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
최병규님의 동맹휴학 건도 비슷하다고 본다. 모리라는 교무주임이 분명 민족차별을 하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동맹휴학이라는 집단 행동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표현할 경우 받을 형량이 너무 컸기에 학교당국이나 교사나 보도한 언론 모두 단순한 교사의 행동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주장하고 학사 처리하고 보도했을 것이다.
최병규님은 필자에게는 39년 선배가 되는 분이기도 하다. 본고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다가 1999년 모교의 졸업식에 참석하였을 때 보았던 명예 졸업장을 받으신 분이 최병규님임을 알았다. 그때 90이셨는 데 정정하셨던 모습이 분명하게 기억난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조부이신 고 최병규님이 항일운동가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춘고 재학시절 동맹휴학을 주동했던 사건 뿐 아니라 그후의 그분이 걸어온 생애를 통해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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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항일주도 퇴학 73년만에 고교 졸업 (daum.net)
(춘천=연합뉴스) 김정선기자 = 일제때 교내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퇴학을 당했던 춘천고교 1회 입학생이 73년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아 관심을 받고 있다.
최병규(90.서울 마포구 성산동)씨는 12일 오전 열린 춘천고교 졸업식장에서 학교 설립이후 처음으로 첫번째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지난 26년 4월 당시 3학년이었던 최씨는 순종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학급대표들과 2주동안 상장을 착용하고 등교했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곤혼을 치렀다.
그는 같은해 10월 일본인 선생을 배척하기 위해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 춘천고에서 처음으로 항일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씨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주목돼 학생대표 3명과 함께 퇴학처분 통고를 받아 고향인 강원도 평강에서 3년동안 거주제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최씨는 "거주제한이 풀린뒤 만주 등지에서 한국인 지원사업에 동참했다"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뼈에 사무친다"고 회상했다.
최씨는 "당시 애국심이 앞서 실천한 일이었기 때문에 졸업장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남았다"며 "이제 명예졸업장을 받아 졸업생 명단에 끼게 돼 더욱더 기쁘다"고 말했다.
춘천고 관계자는 "1회 동문중 유일한 생존자인 최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처음으로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며 "최씨의 애국심은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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