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도 세대차가 난다는 말이 생겨날만큼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예전에는 할아버지가 배운 책으로 손자가 공부할 정도로 변화가 느렸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공부하는 내용과 수준을 질문 몇마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영농기술이나 수공업 기술 음식 문화 등은 거의 변화가 없이 세대를 통하여 전수되었다.
변화가 느려 오랜 시간이 지나야 감지될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해가 다르게 아니 실기간으로 변화를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
기술의 변화에 뒤따르는 제도와 생활양식의 변화뿐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풍습까지도 급변하고 있다.
변화가 느리다는 장묘[葬墓]와 제례문화 가족제도 등도 급변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새 천년 이전만해도 장묘문화의 대세는 매장이었던 것이 새천년 들어서면서부터 화장문화로 바뀌었다. 이제 묘지에 매장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게 되었다.
가족 내에서 가족구성원의 역할에 대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이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아내는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던 역할 분담은 여성의 사회진출과 맞벌이 등으로 이하여 역할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사회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직업에서 남녀의 역할 구분이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여성이 상급자로 부서를 이끌어 가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초중고 교사는 여성이 압도적인 다수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금남(禁男)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군사 치안분야와 전문 기술직이나 경영 분야에도 여성들이 진출하게 되었고 반대로 간호나 유아교사 등 여성의 전문 영역으로 여겨지던 분야에도 남성들이 진출하는 것이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와 가정 직업 분야에서 남녀의 고정역할이나 진입장벽 등이 철폐되며 여성들도 능력이 있으면 어느 분야로든 진출이 가능하게 되어 가족내에서 딸에 대한 기대수준도 달라지게 되었다.
오히려 20대 남성들이 제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서울과 부산 시장 서거를 통해 집권 여당에 반대표를 던질만큼 사회는 변하였다.
새천년 이전까지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두 세대를 조금 더 살은 필자가 직접 경험한 것을 회고할 수 있는 것은 두 세대 이전의 일까지다.
1962년 필자가 시골 남녀공학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남학생과 여학생의 비율은 2:1이었다.
중고교에서 남녀 학생의 비율도 대략 2:1 이상의 비율이었다.
여자는 결혼을 하고 가정내에 머물면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던 시대에 딸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은 높지를 않았다.
어느정도 경제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중둥교육 이상의 교육이 어렵던 시기 다자녀들 중 물적 자원을 아들에게 집중하여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딸들에 대한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었다.
많은 이땅의 딸들이 재능이 있음에도 가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또는 남자 형제의 교육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공장 등 일터로 진출하며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대학수준에서는 남녀 학생의 비율이 더 왜곡되었다.
교육대나 사범대 간호대와 여자대학교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남녀공학에서 여학생은 아주 드문 존재였다.
정확한 통계가 기억나지 않지만 남녀학생의 비율은 아마 5;1 - 10:1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의 기회와 사회진출의 기회를 얻는 것이 아주 힘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가족구성원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기뻐하고 딸이 태어나면 섭섭해 하였다.
이는 새천년 이전까지 일반화되었던 풍조였다.
1977년에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다.
첫 아이이기도 했지만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들이라 가족과 친족들 모두가 기뻐하였다.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데리고 올 때 택시 기사가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팁을 달라고 했고 나는 기쁘게 팁을 주었다.
또 병원에서 출산을 도운 간호사들에게도 촌지를 전달했다.
몇 달후 중학교 1년 후배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핖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첫딸을 낳았다고 한다.
그는 비록 딸이지만 서운하지 않았고 기쁜 마음이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에게 촌지를 전달하니 딸이라서 받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아기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택시기사에게 팁을 주니 택시기사도 딸이라서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딸을 낳아서 서운한 것이 아니라 딸이라는 이유로 촌지를 거절하는 것이 섭섭했었다고 했다.
몇 년 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대학동기가 둘째 딸을 출산했다.
위로도 딸이었고 당시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유행할 때라 둘째가 막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대였다.
둘째 딸을 낳았는 데 처형이 을더라고 했다.
‘80년대 초의 일이었다.
시골에서 근무할 때였는 데 하루는 개울 건너에서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여자가 늦은 밤에 서럽게 울고 있었다.
울음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나는 울음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주인댁 아주머니에게 밤에 개울 건너에서 초상이 났느냐고 물었다.
주인집 아주머니의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개울 건너 어느 집의 여자가 딸만 넷을 낳고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는 데 또 딸을 낳자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90년대에는 초음파 검사를 통해 아기의 성별을 미리 알아보고 여아이면 유산을 시켜 성비가 자연성비와 어긋나는 남초현상을 나타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06:100 정도의 성비가 정상인데 지역에 따라 120:100에 가까운 성비를 보이기도 하여 행정당국에서 사전 성별검사를 금지하기까지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꾸준하게 성차별에 대한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 왔다.
직업에서의 차별 가족내에서 재산상속에 대한 차별 등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여성들에 대한 출산과 육아에 대한 지원 체계도 개선되어 갔다.
이러한 차별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한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수십년간에 걸친 국가와 사회 전반의 노력으로 兩性平等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가족제도가 바뀌면서 가문에 대한 인식도 희미해졌고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도 약해졌다.
또 다자녀에서 한두명의 자녀만을 낳거나 아니면 출산을 하지 않는 사례까지 확산되면서 꼭 아들을 낳아야 하겠다는 관념이 아주 약하게 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더 이상 성감별을 금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여아라고 해서 유산을 시키는 사례도 거의 사라졌다.
남성위주의 가부장 문화가 사라지고 출가한 젊은 여성들이 시가보다는 친정과 유대관계가 강해지고 장남이 부모를 부양하는 제도가 약화되면서 아들보다는 딸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남아선호 사상을 급격히 약회시키고 아들 딸을 가리지 않게 되었고 젊은 충에서는 오히려 딸을 선호하는 여야선호시대가 도래하였다.
국내 입양에서도 여아를 원하는 비율이 대략 2:1의 비율로 여아가 높아 여아 선호사상이 대세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전 어느 산부인과 의사가 방송에서 대담하는 것을 듣고 세태의 변화를 실감하였다.
아들만 둘을 둔 어느 산모가 태아의 성별을 알아보고 또 아들이라고 하자 눈물을 주루룩 흘리더란 이야기였다.
그 의사는 산부인과 의사로 일을 하면서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자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산모는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40여년전 다섯 번째 딸을 낳았다고 밤새 통곡을 하던 산모의 생각이 났다.
한 세대의 시간이 태어나는 아기의 성별에 대한 선호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이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문화가 정착된 조선 중기로부터 300년만에 일어난 큰 변화인 것이다.
앞으로 가족제도가 가족 구성원간의 역할분담이 성별에 따른 역할분담이 어떻게 변화하여 갈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