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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선생님 오늘밤 우리집 도망을 갑니다." (2)

"선생님 오늘밤 우리집 도망을 갑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지 몇년이 지났다.

집수리를 앞두고 버릴 것과 보존할 것을 나누는 일을 하는 데 위의 이야기를 했던 제자가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S의 일가가 야반도주를 한 하고 두달 가량 지났을 때 보낸 편지였다.

40년만에 그의 편지를 다시 읽으니 감회가 깊었다.

40년 가까이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 데 그는 그후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춘천에 거주하는 그의 동기 성길이에게 전화를 했다.

성길이는 S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와 가까왔던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아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음 다음 날 성길이가 S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S가 고향을 떠난지 20여년만에 같은 마을에 살았던 초등학교 동기들에게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후 몇번을 만났었다고 한다.

그러나 10여년전 부터 연락이 두절되어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어쨌는 그가 학교를 떠난 후 안산에 정착하여 생활하였고 장년이 되어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만 오랜시간 연락이 두절되어 최근 소식을 알 수가 없고 연락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1982년 11월 S가 보낸 편지에서 그가 고향인 횡성 청일을 떠난 후 안산에서 가까운 군자에 정착하였고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S는 열심히 공부하여 꼭 성공할 것이라는 각오를 밝히고 있었다.

담임이었던 내가 계속 연락하여 주기를 바라며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더라도 꼭 연락을 해달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내가 S의 편지에 회신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해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후에는 연락을 하지 못했고, 그 역시 연락을 할 수가 없어 연락이 끊긴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연락이 다시 된다면 이점 사과를 하고 싶다.

 

상윤아 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여서 미안하다. 어디에서 살든지 늘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혹시 내 소식을 듣거든 꼭 연락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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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께

 

선생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저의 식구들도 염려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편지가 매우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 속 꽤 썩였지요.

그것이 저의 머리에 영영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에서 잘못한 일을 많이 눈감아 주셨지요.

저도 그것을 많이 알고 있어요.

저도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여 꼭 성공하겠습니다.

내가 형님 일로 낙심은 많이 했지만 그 일로 인하여 형이나 우리 식구가 더욱 열심히 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잘된일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여기는 불행히도 야간고등학교가 없습니다.

여기는 공장이 많이 들어서서 직장은 구하기 쉬운데 아직까지 미개발 지역이어서 학교는 군자 중학교 군자고등학교가 있고 새로 원곡 중학교와 원곡 고등학교가 건립 중입니다.

그러니 학교는 차차 다녀도 되겠어요..

다시 만날 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19821124

제자 상윤 올림

 

한가지 빠진 것이 있어요. 선생님이 내년에 전근을 가시면 꼭 편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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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올렸던 글

http://blog.daum.net/gdhyn0517/220

 

"선생님 오늘밤 우리집 도망을 갑니다." (1)

 

 

2 담임을 할 때다.

교사로 근무하며 처음 10여년 간은 시골에 근무할 때 담임을 맡으면 먼 곳에 사는 학생들 가정을 방문하였다.

 

일요일이 아닌 공휴일이나 토요일 오후를 이용하여 자전거를 타고 한번에 몇 가정씩 가정방문을 했다.

미리 일정을 예고하면 그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나와서 길 안내를 해주었다.

 

'80년대 초 당시 시골의 주거 환경은 아주 열악하였다.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이 스레트 지붕으로 대부분 바뀌기는 했지만 집이 낡아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집들도 있었다.

 

애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다.

8km니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S는 학교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어머니가 계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음) 형과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있었다.

형은 건실한 청년으로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소장사는 소를 끌고 장이 서는 곳까지 걸어서 이동을 하였다.

트럭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도보로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농사도 벼와 같은 일반적인 작물 외에도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등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을 하는 20대 중반의 농촌 청년이었다.

S의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가 화공약품이 폭발을 하면서 눈을 다쳐서 거의 실명을 한 상태였다.

 

희미하게 남은 잔존 시력에 의지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의 형의 부지런함과 동생을 생각하는 우애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S는 교과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생활태도가 좋은 학생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기억된다.

하루는 S가 나에게 와서 상담할 일이 있다고 했다.

교무실 옆방에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S는 형이 도박을 하다가 빚을 졌는 데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 식구들 모두가 야반도주를 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오늘밤 온 식구들이 도주를 하는 데 내일 자퇴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교사로서 무력감을 느꼈다. 내 힘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와 의논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날까지 비밀을 지켜 주는 것과 자퇴처리를 해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어쩌다가 모범적인 청년인 그의 형이 그런 잘못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도 학교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성실하면 살아갈 길이 있으니 어떤 경우에라도 열심히 살으라는 말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를 전송했다.

다음날 아침 출석을 부르니 같은 마을에 사는 아이가 S네 가족들이 전날 밤 야반도주를 했다고 말을 한다.

나는 행정절차를 따라 자퇴처리를 해주었다.

 

 

두달쯤 지난 후 주소와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편지가 왔다.

뜯어 보니 S가 보낸 편지였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반월공단(지금의 안산시)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살아가려니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그렇지만 착하고 성실하였으니 자수성가하여 잘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퇴직을 한 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교를 다녔던 제자들이 더 생각난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잘들 지내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2014.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