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서 퇴임한지 꼭 10년이 되었다.
며칠 전 초임시절 인연을 맺었던 제자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깊은 감회를 느꼈다.
제자 아들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제자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와 같이 근엄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제자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생각이 났다.
활발하고 장난기가 있었던 깎까머리의 모습이.
녀석의 고모와 같은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고모가 조카를 잘 부탁한다고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행사가 있어 양구에 갔을 때 중간중간 만난 일이 있었던 제자였다.
나이를 헤아려 보니 초임 시절 처음 만났던 제자들 다수가 올해에 환갑이 된다.
제자들의 나이가 초임 시절 내 나이의 두배가 넘게 되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제자 녀석에게 전화를 하여 근황을 묻고 세월의 빠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57년 전인 1974년에 교사생활을 시작하여 37년을 재직하고 2011년에 퇴임을 했으니 첫발령을 받았을 때부터 두 세대 의 시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른만큼 필자가 재직하던 시절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많이 다를 것이다.
이제는 경험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기억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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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이 되기 전까지 학교에는 당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24시간 학교를 비우지 않고 비상사태에 대처하고 학교의 시설 등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야간 당직을 숙직, 공휴일에 근무하는 주간 당직은 일직이라고 하였다.
학교에 따라 상황이 다르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 숙직은 남교사가 일직은 여교사가 맡아서 근무했다.
학교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학급수가 많은 학교에서는 대략 20일 정도마다 한번을, 규모가 작거나 초등학교의 경우는 1주일도 안되는 주기로 숙직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서무과(지금의 행정실) 소속인 기능직과 교사 둘이서 근무를 했다.
근무수칙에는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게 되어 있었지만 그대로 지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하교를 하고 교직원들이 퇴근을 한 후 교실을 돌아보며 문이 걸리지 않은 곳이 있는가
(시건확인) 등을 점검하였다.
난방을 하는 겨울에는 난로에 불씨가 남아있는지 난로 부근에 가연성 물질이 있는지를 점검하였다.
겨울에는 전국 어디에선가 화재가 발생하는 학교가 있었다.
불이 나면 안되기에 난로 점검만은 철저히 하였다.
이렇게 교실과 특별실과 부대시설을 돌아보고 나서는 숙직실에서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지나면 대부분 잠을 잤다.
원칙적으로 자면 안되지만 숙직을 하여도 다음날 정상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 했다.
교직원의 근무 기강확립에 꼭 당직근무 철저가 포함되어 있었다.
1년에 몇번 기강확립을 한다고 법석을 떨었고 예고를 하거나 때로는 불시에 당직근무 점검을 나오는 때가 있었다.
당직자의 취향에 따라 숙직실에서 술판을 벌리거나 고도리나 카드를 하다가 적발되어 곤욕을 치르고 징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숙직을 할 때 보안점검을 나온다고 하면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안점검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학교에 좀도둑이 침입하여 카메라나 녹음기 등 기자재를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경우 당직자가 배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운이 나쁜 경우 도난을 당하거나 하여 배상을 하기도 하였지만 필자는 운좋게 이런 재앙은 피해갔다.
숙직을 할 때 귀챦은 점의 하나는 전통(전언통신문)을 받는 것이었다.
이동 통신 시설과 팩스가 없던 시절 급한 업무연락은 유선망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공문을 발송하여 처리하기엔 시간이 촉박한 경우 전언통신문의 형태로 연락망을 통하여 릴레이 식으로 각 학교로 업무내용이 전달되었다.
전화 벨이 올리면 이전 연락망에 있는 학교의 당직자가 전통이 와서 전달한다고 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전통수신 대장에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기 시작한다.
대부분 급하게 연락할 행정사항이 있으나 공문서로 보내기에는(대개 일주일에 2-3회 지역 교육청에서 공문을 수신) 시간이 급박할 경우 전통을 이용하였다.
먼저 일시와 제목을 받아 적고 발신자와 수신자를 기록한다.
다음에는 본문을 불러주는대로 받아 적었다.
문서 양식이 있는 경우 가로와 세로로 줄을 쳐서 양식을 그리고 해당란에 내용을 받아적었다.
나중에 다시 한번 보낸 측에서 내용을 불러주며 확인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번 학교에 전달하였다.
이 전언통신문은 다음날 서무과를 통해 교감과 교장에게 보고가 되고 해당 업무 담당자가 처리를 하였다.
짜증나는 것은 국회의원 요구자료 제출이었다.
국회 감사 시기에는 어느 국회의원의 요구자료라고 하며 자료를 작성하여 제출하라고 하였다.
필자뿐 아니라 대부분의 교사들은 수업 이외의 업무처리를 잡무라고 하여 귀챦아 했다.
특히 정기적인 업무가 아닌 국회의원 요구 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고 쨔증나는 일이었다.
각하 지시 사항이라는 것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각하 지시사항을 이행해야 했다.
대개는 대통령이 각 부서를 순시할 때 말한 내용을 받아적기를 하여 일선학교로 지시하는 것이다.
지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인을 하기 때문에 각하 지시 사항이 떨어지면 이것을 실행할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각하 지시사항을 내려보내거나 실시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급한 경우 이것도 전통을 통해 지시가 내려오고 보고를 했다.
전통이 당시로서는 가장 신속한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팩스가 보급되고 행정이 전산망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전통은 사라지게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교사의 비율이 증가하게 되고 남교사의 비율이 줄면서 남교사들은 잦은 빈도로 숙직을 하게 되었다.
50세 이상의 교사들에게는 숙직을 면제하여 주던 것이 교단이 고령화가 되고 남교사의 비율이 감소하면서 숙직 면제 연령(비공식적인 것이며 학교에 따라 달랐음)이 55세로 60세로 상향되었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무선전화기가 보급되고 보안시설이 설치되며 학교 구내에 있는 관사에 거주하는 경우 문단속을 한 후 전화기를 들고 관사로 가서 쉬면서 당직을 하였다.
숙직제도의 폐지를 앞두고 있던 시절 무선 전화기를 가지고 관사에서 당직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학교에서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급하게 학교로 가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즉시 파출소 경찰관이 출동을 하고 읍내에서 보안업체 직원이 출동하여 점검을 했으나 화재나 무단침입 도난 등의 흔적은 없었다.
보안업체 직원은 쥐나 나방이 센서 가까이를 지나도 열감지가 되어 경보음이 울리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1999년 춘천으로 전임한 후 첫해는 당직근무를 했다
한번은 전화가 와서 받았는 데 잔뜩 술이 취한 소리로 교장선생님 댁 전화번호를 묻는다.
누구냐고 하니 교장선생님 동생이라고 한다.
필자가 동생이 형님의 전화번호를 모르느냐고 반문하며 알려줄 수 없다고 하니 욕설을 퍼부으며 숙직실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고 위협했다.
학교 운동부가 해체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학부모의 전화였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가 근무하던 춘천에서는 2000년부터 당직이 폐지되게 되었다.
숙직이니 일직이니 하며 교사들에게 부담을 주던 당직제도가 보안 시스템의 보급과 별도 인원에 의한 숙직 전담제도가 시행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교육 현장을 떠난지 10년이 되어가고 이제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는 시기가 되었다.
교직을 천직으로 선택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추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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