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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줄판(가리방)의 추억

문서를 대량으로 생산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인쇄를 하여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문서를 생산하고 유포할 수 있다.

또한 SNS를 통해서 신속하게 문자화된 정보를 다수에게 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 정보를 다수에게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자를 사용하기 전에는 구전만이 정보의 유일한 전달 수단이었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점토판이나 양피지 파피루스 죽간 등에 문자를 기록하여 전달하는 경우 기록에 시간이 많이 소요됨은 물론 한번에 생산할 수 있는 문서의 양이 적어서 다수에게 문자로 기록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때 많은 양의 문서를 생산하는 방법은 많은 인원을 동원해 필사를 하거나 낭독하는 것을 듣고 많은 수의 서기들이 받아쓰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필사는 필연적으로 잘못 베껴쓰거나 받아적는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번에 많은 양의 문서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인쇄술이다.

인쇄술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고 하는 데 목판에 문자를 새겨 그 요철(凹凸)이 있는 판을 만들고 여기에 먹을 묻힌 후 종이를 사용하여 인쇄함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문서를 생산할 수 있었고 필사자에 의한 오류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량 생산된 문서는 정보의 신속한 확산과 보존을 용이하게 하여 지식이 전파되고 전승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목판 인쇄를 기반으로 한 기술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하게 되고 이것을 기계화한 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다.

인쇄기를 이용한 인쇄술의 발전은 대량의 문서와 서적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정보의 전달속도를 높히고 보존을 용이하게 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쇄기에 의한 인쇄는 인쇄기 설치에 많은 비용이 들고 운용에 상당히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인쇄기에 의한 대량의 인쇄는 적은 양의 문서를 생산하는 데는 채산이 맞지 않는다.

수십 내지 수백장 범위의 문서를 생산하는 경우 필사나 대량 인쇄가 아닌 소규모의 인쇄술이 필요하다.

이런 필요에 의해 생겨난 기술이 등사를 하는 것이다.

이 등사기는 1980년대 중후반 복사기가 일반화될 때까지 중소 규모의 행정기관이나 학교 사업체 등에서 필요한 문서를 생산하는 데 가성비가 높은 기술이었다.

잉크가 스며들지 않는(파라핀으로 도포된 종이) 원지라고 불리는 종이를 줄판(가리방) 위에 놓고 골필이라는 끝이 뾰족한 금속 필기구로 파라핀 층을 제거하면 잉크가 스며들 수 있게 된다.

줄판으로 긁은 원지를 등사기의 망판 위에 놓고 잉크를 묻힌 롤러로 밀면 종이 위에 글자가 인쇄된다.

보통 500장까지 문서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는 데 숙련된 등사자는 1천장까지도 인쇄한다고 한다.

입학시험이나 학력고사 등 동시에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시험 이외의 학교 자체 시험이나 과제물 학습지 등은 거의 전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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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처음 등사를 시작한 것은 교회를 다니면서부터다.우리집 인근에 교회가 설립되게 되어 전에 1년가량 다니던 교회에서 인근에 설립된 교회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새로 출석하는 교회는 소양댐 수몰지구에서 보상을 받아 이전해온 교회로 처음 신설된 교회나 마찬가지였다.

수몰지구에서 이주해온 장로님과 성도들 몇가정과 새로 전도되거나 다른 곳에서 이명하여 온 성도들 몇 가정만이 출석하는 소규모의 교회였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필자와 필자의 친구와 후배가 중심이 되어 주일학교와 청년부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여러가지로 재주가 많던 후배는 주보를 만들자고 하였다.

그러나 신설된 교회에서 재정이 충분할리가 없었다.

청년부에서 등사기 구입을 논의하였는 데 새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청년(장기근속 부사관)이 등사기를 기증하였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러나 이 청년은 그해 초겨울 장로님 딸과 결혼한 후 교회에서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부사관이 좋와하는 아가씨가 생겼는 데 교회를 나오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였고(이때 등사기와 단 아래 강대상을 기증) 결혼을 하게 되자 목적달성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교회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배는 이 등사기를 이용하여 주보를 발행하였고 주일학교에서 필요한 자료를 만들었다. 필자도 후배를 따라서 등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교회 주보와 청년회 회지 어린이용 찬송가와 교재까지 이 등사기를 통해 생산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용이 서툴러 원지가 찢어져 다시 긁기도 하고 등사기에 인쇄를 할 때는 손에 온통 잉크가 묻어 시커먾게 되기도 하였다. 손에 묻은 등사용 잉크는 잘 지워지지 않아 비누로 오랫동안 씻어야 했다.

교회에서 배운 등사 기능은 필자가 교사로 근무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초임 시절에는 수학을 몇년 후부터는 과학(화학)을 가르친 필자에게 줄판을 긁을 때 가장 힘든 것은 그림을 그리거나 표를 만드는 것이었다.복사기가 나오기 전에 출제한 문제지를 보면 그림, 그래프, 표 등을 잘 사용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워낙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림이나 그래프 표를 그리다가 원지가 찢어져 낭패를 보기 때문이었다.

 

1983년에 탄광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 데 이때부터 복사기가 사용되기 사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원판이 되는 마스터 페이퍼 값이 비싸 제한된 범위에만 복사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상당히 알뜰하셨던(?) 교장선생님은 수학이나 과학 실업과목 같이 그림이나 그래프 등이 많은 경우가 아니면 복사기의 사용을 허락하여 주지 않아 전과 같이 등사기에 의존해야 했다.

1985년 춘천으로 전입한 이후에는 큰 규모의 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시험문제나 교재 등을 인쇄할 때 등사기가 아닌 복사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1974년부터 1985년까지는 등사기를, 1985년부터 2011년 퇴임할 때까지는 복사기를 이용하는 징검다리 세대가 되었다.

교재나 시험지를 인쇄할 경우 복사기 사용 초기에는 그림이나 그래프 표를 오려다가 붙였으나 워드를 사용하여 편집하게 되면서부터는 직접 그림을 불러다가 편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생산한 교재나 시험지를 보면 많은 그림과 도표 그래프 등이 사용되고 있는 데 이는 편집이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2011년 교직을 떠나게 되면서부터 시험문제 출제나 학습교재 작성의 기억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퇴임한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원지를 긁고 등사를 하던 일들이 컴퓨터나 복사기를 사용하던 일보다 더 생생하게 추억으로 떠오른다.

 

필자가 사용하던 줄판

 

등사원지. 이미지 출처 : 디지털 인쇄기 샤론기업 https://blog.naver.com/won12540/221861757359
1970년에 발간한 남부교회 주보

 

검색을 하다가 귀한 동영상을 발견했습니다. 

등사를 하는 동영상인데 링크시키니 접속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70년대 인기 프린터 - 가리방 등사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