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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1987년 6월

2021년 6월 29일, 오늘 방송과 인터넷 뉴스는 온통 대선 출마선언 후보 관련 소식을 전하기에 하루 종일 분주하였다.

1987년 6월 29일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단합된 행동에 집권당 대표자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0선언을 이끌어 낸 역사적인 날임을 알리는 주류 언론의 보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87년 6월은 나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주었을까?

한 세대도 더 지난 34년전의 기억을 끄집어 내보고자 한다.

1987년 필자는 춘천여자중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다.

1987년 새해 벽두부터 정국은 요동쳤다.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주화 요구에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현행 헌법을 고수하고 선거인단에 의한 체육관 선거를 치러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전두환의 고뇌에 찬 결단이 발표되자 이를 받아드릴 수 없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봇물처럼 터져나와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불난데 기름을 붓는 사태는 1987년 새해 벽두에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경찰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던 시도가 5월 김승훈 신부에 의해 폭로되자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시위를 주도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늘 그랬듯이 대학생들이었다.

필자가 재직하던 춘천여중은 강원대 정문까지 5분 이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강원대 캠퍼스가 내려다 보였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학생들이 시위하는 모습이 잘 보였다.

학생들은 교문밖으로 나가 시내로 진출하려 했고 경찰은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이었다. 강당이 없던 시절이라 운동장에서 스승의 날 행사를 하였다.

행사가 끝나고 스승의 노래를 부를 때였다. 

강원대에서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며 시내로 진출하려 했고 경찰이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최루탄을 발사한 것이 풍향이 바뀌면서 최루가스가 춘여중 운동장으로 날아왔다.

갑자기 매캐한 가스가 운동장을 덮으며 눈물 콧물이 흐르는 속에서 스승의 노래를 끝내고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최루가스를 맡은 아이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라고 했다.

이때 캐나나에서 교육대학원에 다니는 대학원생 두명(이 교생실습을 위해서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 와 있었다. 

나는 서툰 영어로 국민들은 민주화를 원하고 있으나 정부가 이를 거부하여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을 했다. 하교후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시위현장을 다니며 사진촬영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한국에서 민주화 시위는 이들에게 흥미있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시위가 시내에서도 벌어졌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항의하는 집회가 있었다. 

나는 공무원 신분이라 직접 시위대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관중들 틈에 끼어 시위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신부님들이 박종철의 사진을 들고 앞장을 섰고 항위하는 군중들이 뒤를 따랐다.

어느 선까지는 시위가 허용되었고 경찰이 물리적으로 군중을 해산시키지는 않았다. 

교사들도 시국 선언 등을 통해 민주화 요구에 동참을 하였다.

필자의 고교 대학 동기인 김경림군이 YMCA 중등교사 협의회(약칭 Y교사) 멤버였고 필자와 친한 관계로 시국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경림이를 통하여 시국선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서명하지는 못했다.

 

.학생들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사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요즈음 사태와 학생들의 데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필자의 담당교과가 과학이라 교과와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고 대답을 회피할까? 

아니면 나중에 징계 등 불이익을 받더라도 내 소신을 따라 대답을 할까?  

짧은 순간 내 머릿 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려말 대학자 원천석 선생과 태조 이방원에 대한 일화가 생각났다.

원천석 선생을 존경하던 이방원이 선생을 모시려 했으나 원천석 선생은 고려에 대한 충절로 이방원의 부름을 거절하고 원주 치악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태종이 피신하는 선생을 추격하여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선생이  도주를 하는 데 갈림길 앞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었는 데 어떤 노파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노파에게 자신이 어느 길로 갔는지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중 어느 한 길을 따라 피신을 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거느린 태종의 일행이 들이 닥치고 태종은 노파에게 선생이 어느 길로 갔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임금님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선생과의 약조를 깰 수도 없는 노파는 빨래터에 빠져서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이 일화를 이야기하며 지금 내 심정은 그때 노파와 같은 심정이라는 말로 답변을 하였다.

내 말을 당시 열다섯 살인 중2 학생들이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6월에 들어서도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각 시군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체와 조직이 생기고 집회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개신교회와 가토릭도 시위를 주도하며 동참하였는 데 특히 명동성당은 시위대에게 성역 역할을 하였다.

서울 아현교회애서 개신교회 목사들이 모여 시국 기도회를 하였는 데 경찰이 교회에 난입하여 참가 목사들을 연행하여 승합차에 싣고 난지도로 데려다가 풀어준 사건이 보도되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무척 분개하였다.

공중전화로 가서 경찰본부에 전화를 하여 항의를 하였다. 

말단 실무자가 전화를 받을 것이고 윗선으로 보고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민심을 읽으라는 뜻에서였다.

 

시내에서 시위가 있다고 하였다. 비록 시위대와 함께 하지는 못하여도 둘러싸고 있는 군중의 한 사람이라도 되어 이들의 함성에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앙시장에서 강원대로 가는 큰 길에서 시위대가 데모를 하고 있었다. 

주로 대학생들과 일부 시민들이 가담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도심을 향해 진입을 하려 하고 경찰은 결사적으로 저지를 하고 있었다.

도로를 점유하고 있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쏘는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다른 전경은 최루탄을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인도를 가득 메운 구경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쏘지마! 쏘지마!  이 개XX들아 쏘지마!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도심방향으로 진출하려 하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결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6월 10일에 6.10 항쟁이라고 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마침내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근간으로 하는 조치를 시행하겠다는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마침내 국민들이 독재와 싸워 이긴 것이다.

물론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주화 조치로 민주화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유월 항쟁은 민주화를 향해 나가는 길에서 첫걸음을 뗀 것일 뿐이다. 

 

1987년 6월 필자가 비록 중학교 교사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시위대에 직접 참가는 못하고 구경꾼들 사이에서 시위 모습을 지켜 보거나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질러 응원하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동참하는 시늉만을 하였지만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에 함께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큰 긍지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