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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시험성적 통계처리에 얽힌 추억

학교 교육현장에서 행해지는 주된 교육활동은 교수학습 활동과 평가라고 할 수 있다.

평가는 교수학습활동이 목표에 도달한 정도를 측정하는 것으로 지필고사 수행평가 등을 통해 시행된다.

필자의 초임시절에는 일부 예체능 교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지필고사를 통해 평가가 이루어졌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때로는 월말고사)는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학기 중 큰 행사였다.

학생들에게 시험은 큰 부담을 주지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정기고사 일정이 공시되고 교사들은 출제에 학생들은 시험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출제는 교사들에게도 큰 부담이 된다.

최근에는 정해진 틀에 따라 출제하고 채점하고 성적을 산출해야 하는 데 모든 과정이 까다로와 평가는 교사들에게도 큰 업무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초임시절인 '70년대(1980년 이전까지)에는 출제와 채점 성적산출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

출제지만 결재를 맡으면 되었고 이원목적 분류표 작성이나 정답율 등에 대한 검토도 대부분 생략되었다.

출제와 채점 성적산출만 하면되었다.

그렇지만 시험은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되는 데는 변함이 없다.

 

'90년대 말부터는 성적처리 전산 프로그램에 의해 성적이 처리되고 있다.

서술형이나 단답형 문항만 교사가 채점하여 카드에 표시하면 학생이 작성한 객관식 문항이 채점되어 자동합산이 되어 성적과 통계까지 산출된다.

따라서 답안지에서 점표에 이기(移記), 합산, 평균 및 수우미양가로 표시되는 성적의 등급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처리해야 했다.

 

학생들이 성적처리 과정에 개입한다는 것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필자의 초임시절에는 학생들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관행으로 용인되고 있었고 교사나 학생들 모두 이에 대하여 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어떤 교사는 채점까지 애들에게 맡기는 경우까지 있었다.

교사가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채점과 점수 합산과 통계작성이었다.

'80년대에 휴대용 계산기가 보급되기 전까지 성적통계처리는 주판으로 해야 했다.

필자는 주판을 잘놓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적통계 처리에는 부득이 주판을 놓는 애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채점이 끝나면 답안지의 성적을 성적점표에 이기(移記)를 했다.

이기한 성적을 합산하여 학급별 총점을 내고 평균을 산출해야 했다.

1년간을 결산하는 학년말 고사의 경우 각 교과별로 총점을 산출하고 수우미양가라는 5단계의 성적을 부여했다.

교과별 성적을 산출하면 교과담임들에게 넘겨받은 성적을 합산하여 개인별 학급별 성적을 산출하였다.

 

학년말 성적처리를 수작업으로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고 주판을 써서 계산을 해야 했다.

그런데 60-70명의 성적을 암산이나 필산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판을 놓는 애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필자가 수업하던 학급이 6학급이었다.

6장의 과목성적표를 작성해야 했다.

성적처리를 하는 날 필자는 읍내에 거주하고 주핀을 잘놓는 녀석들 세명을 하숙집으로 불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적처리로 교사의 부름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

자신의 성적과 관심있는 친구들의 성적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선생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 성적처리 도움 요청에 기꺼이 응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한번에 세명정도를 불렀다.

필자는 지켜보고 한명은 숫자를 부르고 둘은 주판으로 계산을 했다.

둘의 합산결과가 일치하면 그대로 기록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다시 계산을 했다.

개인별 성적을 산출할 때 교과별 성적을 모두 더해서 총점을 산출한디.

교과담임에게 넘겨받은 교과별 성적표의 총점과 합산된 개인별 성적의 총점을 비교해서 가로와 세로가 맞으면 처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넘어온 교과별 성적의 합산이 틀리는 경우가 많아 단번에 처리가 완료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교과담임이 넘겨준 성적점표의 총점을 다시 계산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개인별 교과별 총점이 일치할 때까지 반복하여 계산을 해야 했다.

성적처리에 도우미로 참여했던 녀석들에 의해 사전에 성적결과가 애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아마 아이들이 기뻐했던 것은 성적처리를 하면서 먹는 간식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성적처리를 돕는 애들을 위해 꽤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간식을 준비했다.

학년말 성적처리를 하던 겨울이었다.

거리에서 파는 홍합이 식욕을 자극했다

성적처리에 동원된 녀석들을 시켜서 홍합을 사왔다.

홍합의 양이 꽤많았다. 넷이서 홍합을 실컷 먹었다.

사실 거리에서 파는 홍합을 사먹고 싶었지만 선생 체면에 거리에서 먹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아 군침만 삼켰는 데 이날 먹고싶던 홍합을 포식하였다.

 

위와 같은 풍경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휴대용 계산기가 보급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주판보다 덧셈 계산이 느리기는 했지만 주판처럼 숙련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성적통계 처리에 주판기능자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성적처리 프로그램이 보급되어 전산화되면서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어졌다.

교과별 성적표만 작성하여 전산담당 교사에게 넘기면 컴퓨터부 학생들이 입력을 하여 자동처리가 되어 인쇄되어 출력되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생활기록부 작성까지 전산화가 되면서 생활기록부에 교사의 필적은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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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불러다가 성적통계 처리의 도움을 받고 간식을 사다가 함께 먹던 일이 아득한 먼 옛날의 추억이 되었다.

학교 현장을 떠난지도 10년이 되어 간다.

초임 교사의 꿈을 안고 모교에 첫부임을 한지도 반세기가 되어 간다.

'코로나 19' 사태로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하랴 온라인 수업 준비를 하랴 교사들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사제간의 관계도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후배교사들이 많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