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초는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때이다(당시는 4월 1일 새학기)
1980년은 필자가 강원도 횡성군 면단위의 병설 중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이다.
학생이던 1960년과 20년 후인 1980년 교사이던 시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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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은 온 나라를 경악시켰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박대통령의 국장이 시행되었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까지 온 나라가 애도분위기였고 다수의 국민들이 박대통령의 서거를 슬퍼하였다.
필자가 근무하던 면단위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학생들을 인솔하여 단체로 분향을 하였다.
국장이 끝나자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언론은 그동안 억눌려 참았던 유신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차기 대권을 노리는 3金의 대권경쟁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교감선생님의 동생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교무실에서는 정국의 전개 방향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관심이 있는 인물은 당연 3金 중 누가 대권을 잡을 것인가였다.
또 한명의 인물은 만약 군이 정권장악을 한다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일 가능성이 있는가였다.
교감선생님은 3金도 정승화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누가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교감선생님은 중정에 근무하는 동생을 통하여 강력하게 부상하는 차기 권력자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3월 개학이 되면서 대학가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개헌과 권력이양에 대한 일정이 계속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그러다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광주에서 모종의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짐작하였을 뿐 그 실상을 강원도 시골에서는 일 수가 없었다.
5.18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교무실에서 활발하게 벌어지던 정치관련 토론은 사라졌다.
광주항쟁이 진압되고 국보위가 설치되고 국회가 무력화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필자가 춘천에 와서 대학후배를 만나 광주에 대한 진실을 전해들을 수가 있었다.
1980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자마자 교무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교장선생님은 복지사업이라는 제 5공화국 헌법 제정을 위한 계도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며 지시사항을 전달하였다.
격일로 오전수업만 하고 교사들은 자기반 학생들의 집으로 가정방문을 갔다.
가정방문의 목적은 학부모를 대상으로 오공헌법을 홍보하여 찬성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농촌지역에서 교사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는 상당하였기 때문에 교사를 통한 홍보는 효과가 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의 매주 1회씩 반상회를 했다.
가정방문이 학부모 대상 개헌홍보라면 반상회는 주민 대상 홍보였다.
누가 어느 지역 반상회에 참석할 것인가는 면사무소에서 선정하였던 것 같다.
필자는 담당 면직원이 이웃에 살고있는 빽(?) 덕분에 거주하고 있는 면소재지 지역의 반에 배정되었다.
원거리 지역에 배정된 교사들은 당일에 올 수가 없어서(반상회는 야간에 개최되었고 차량이 없었던 당시에는 밤에 귀가할 수 없었다.
현지의 반장댁이나 학부모 가정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 출근해야 했다.
1980년 여름은 미국의 세인트헬레니스 화산의 폭발로 인한 미세먼지가 한반도 상공을 휘감고 있어 서늘한 여름이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날이 4일인가밖에 되지 않았다.
여름인데 시원한 여름이었다. 당연히 열대성 작물인 벼의 생육상태가 나빴다.
벼가 여물어 고개를 숙여야 할 때인데도 벼는 여물지 않은채로 이삭이 빳빳하게 서있었다.
나는 어쩔 수없이 시키는대로 가정방문을 가야 했고 반상회에 참석해야 했다.
가정방문을 가서 개헌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주로 학생에 대한 교사로써 일반적인 상담을 했을 뿐이었다.
반상회는 리장이 주관을 했는 데 홍보자료를 배부하고 설명하였고, 교사가 보충설명을 하여주었다.
투표일이 가까와진 어느날 리장은 개헌에 반대표가 많이 나오면 김일성이가 좋와할 것이라고 했다.
기권은 반대보다도 더 나쁘다고 했다.
나는 "상부의 지시사항을 읽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유인물을 가감없이 읽어주고 토론에서는 개헌관련 의견은 일체 말하지 않았다.
오공헌법은 일부 조항에서 유신헌법보다는 진전된 면이 있기는 했지만 대통령을 선거인단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한다는 데서 유신헌법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유신헌법의 복사판으로 신군부가 집권을 하기 위한 절차라고 생각했다.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는 면소재지에 있었지만 산간지역이라 면소재지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지 않고 골짜기마다 분산하여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가 다니지 않는 곳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원거리에서 도보나 자전거로 통학하였다.
필자는 자전거를 타고 담임하는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였다.
학교에서는 매일 회의를 열어 개헌홍보를 독려하였다.
교장실에 상황판을 설치하고 계획과 실적을 매일 기록하였다.
정보기관에서 홍보활동을 모니터링을 하기 때문에 절대 꾀를 부리거나 어물어물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골짜기 골짜기에 사는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였다.
어느 학생 집에서는 담임선생님이 방문했다고 닭을 잡아서 대접한 집이 있었는 데 정성껏 마련한 닭고기를 부끄러운 생각을 하며
먹어야만 했다.
가파른 고갯길은 자전거를 끌고 넘었다. 경사가 심한 길 역시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야 했다.
논이 있는 골짜기를 달릴 때는 벼가 여물때인데도 아직 꼿꼿하게 벼이삭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에 없는 흉작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을 길을 달리며 내 생각은 20년전 초등학교 4확년때로 돌아갔다.
3월 15일에 조기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Ⅱ.Ⅰ로 통일하자'라는 말씀을 하셨다.
대통령에 리승만을 부통령에 리기붕을 선출해야 한다고 부모님께 이야기하라고 했다.
3월 15일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투표가 실시되었고 학교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과 경찰관의 모습도 보였다.
큰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아버지와 술잔을 나누며 큰아버지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셋씩 다섯씩 짝을 지어 투표소에 들어가서 투표를 하는 세상에 이런 선거가 어디있느냐? "냐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큰아버지는 "신익희가 왜 죽었는지 알아?"라고 밖에서 들릴 정도로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밖에서 누가 들을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큰아버지를 말리셨다.
초등 4학년이던 어린이가 3인조 5인조가 무엇인지 신익희가 누구인지를 알 까닭이 없었다.
신익희 선생이 누구인지 두분의 대화가 3.15부정선거에 관한 것인지를 깨달은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내가 자라면서 어린 우리들에게 자유당의 후보를 정부통령으로 뽑으라고 했던 4학년때 담임선생님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다.
내가 교사가 된 후에도 비판적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나는 내 처지를 생각하여 보았다.
속 마음은 어떻든 간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五共 헌법을 홍보하러 다니지 않는가?
훗날 내 제자들이 내가 20년전의 담임선생님을 비판했듯이 나를 비판할 것이다.
내가 당시 담임선생님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훗날 내 제자들도 나의 본심은 헤아리지 못하고 홍보에 동원된 것만을 비판할 것이다.
1960년과 1980년, 당시의 담임인 진교원 선생님과 현재 교사인 나의 모습이, 대통령 부정선거와 강압적인 五共헌법 찬성 홍보에 동원된 모습이 영화의 자막처럼 머릿숙에서 교차되어 지나갔다.
그러면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교사를 담임이라고 신뢰하고 닭을 잡아 대접한 허덕구군과 덕구 부모님에게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다가 돌에 걸리며 자전거가 팽개쳐지며 망자지고 나는 몸이 붕뜨며 길바닥에 넘어졌다.
다행히 손바닥이 좀 까진 것외에는 다친 곳이 없었다.
교사로써 할일을 하다가 다쳤다면 떳떳하였겠지만 옳지 못한 일을 하다가 다쳤다고 생각하니 다친 부분의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투표일이 가까와지자 투표율 제고에 신경을 썼다.
기권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가정마다 외지에 거주하는 경우와 기권 예상자를 파악하라는 지시가 떨어졋다.
물론 100%가 투표할 것이라고 보고를 했다.
투표일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박대통령이 작곡했다는 새마을 노래와 '백두산의 푸른 정기'로 시작되는 노래를 하루 종일 틀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리고 옷에는 투표를 하자는 표어가 적힌 깃을 달으라고 했다.
면사무소에서 투표가 실시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나 환자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오거나 관용차에 싣고 왔다.
개표가 실시되었다.
3000명의 유권자 거의 전부가 투표에 참가했다고 하였다. 99% 이상 100%에 가까운 투표율이 기록되었다.
반대는 6표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반대표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는 동료들만 세어보아도 여섯명은 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90%가 넘는 투표율과 찬성율이라는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로(?) 오공헌법은 확정되었고
이어 치러진 선거인단 선거에서 선출된 선거인단의 체육관 투표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오공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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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한 정권인 五共정권의 출범에 타의지만 내 자신이 동원되었다는 데 대해 역사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1960년 대통령 부정선거때 리승만과 리기붕을 정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을 부모님께 이야기하라고 한 담임선생님을 비판했던 내가 20년 후인 1980년 비슷한 상황에서 五共헌법 홍보에 동원되었던 나 역시 제자들에게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교사들이 특정 정권이나 이념의 홍보에 동원되는 불행이 없기를 바라며 뒤늦게 마음 속에서만 머물던 반성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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