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걸친 한문과 부전공 자격연수가 2월 4일 모두 끝났다.
늦은 나이에 한문을 공부하는 것이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전부터 관심이 있는 분야라 흥미가 있기도 하였으며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기업체에서도 입사때 한자능력을 테스트한다고 하니까 한자에 대한 기초 능력은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수능이 끝나고 원하는 학생이 10명 이상이 되면 고3을 대상으로 한자를 지도할 계획도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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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급수 공부를 시작한 것이 지난 2002년 가을이었다.
2급(2500자)은 쉽게 합격을 하였으나 1급의 합격은 쉽지를 않았다.
4번의 도전 끝에 지난해 12월 1일 1급에 합격하였다.
한문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부전공 연수가 있게 되었다.
전공과목이 관련 교과도 아니고 과학과목의 시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선순위에 해당되지 않았으나 신청자가 적은 관계로 운이 좋게 연수에 지명이 되어 자격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 후반기에 한자 문화의 원류가 되는 공자 유적지를 견학하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중국 산동성 지역을 관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해외 여행과는 원래 인연이 멀었다.
나랏돈으로 여행을 하던 초기에는 젊었다고 IMF 직전 국가의 지원에 의한 해외 여행이 종료될 무렵에는 나이가 많다고 해외 여행에서 제외가 되었다.
뒤늦게 내돈을 내고 가는 여행이지만 기회가 있어 신청을 하였고 난생 처음 여권이라는 것도 발급을 받았다.
그간 생활에 여유가 없어 가족들과 국내 여행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터라 같이 고생을 하고 산 아내와 같이 가기로 하였다.
1월 30일 14시 30분 인천항에 집결을 하여 통관 수속을 밟고 17시 30분경 중국 석도항을 향하여 배가 출항을 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선상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잠을 자게 되었다.
밤중에 갑판 위에 올라가서 쳐다본 밤하늘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왔다.
광공해가 없는지라 별이 더 많이 보였고 또렷하게 보였다.
밤 하늘은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듯 아름다웠다.
상현달(오른쪽 반달)이 떴는 데 달이 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새벽 3시경에 달이 진다고 하여 볼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한시간이 늦기 때문에 1월 30일 하루는 25시간이었고 밤은 그 어느날보다 길었다.
새벽에 일어나 동트는 것을 보려고 밖을 보았으나 밖은 계속 깜깜하였다.
수평선에 구름이 끼어 있어 바다에서 해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1월 31일 아침 9시(중국 시간 8시)에 배가 석도항에 도착을 하였으나 세관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통관이 되지 않고 대기를 하다가 9시가 넘어서야 통관 수속이 시작되었다.
하선하여 여권 검사를 받고 대기하고 있던 배에 승차를 한 것은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석도항은 인구가 3만이 약간 넘는 작은 도시로 장보고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집집마다 붉은 천에 노란 글씨를 쓴 천을 문 양옆에 걸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새해의 복을 비는 내용이라고 한다.
버스는 석도항을 출발하여 위해시로 향하였다.
점심때 위해시에 버스가 도착하였다. 위해시는 꽤 큰 도시로 항구도시인데 도시가 잘 정비되어 있고 깨끗한 도시였다.
공원에를 갔는 데 공원은 넓고 깨끗하였는 데 규화목에 새겨놓은 것처럼 보이는 조각상들이 인상적이었다.
해외로 웅비하는 중국을 상징하는 탑이 높이 솟아있었다.
황해바다는 물이 흐린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석도항이나 위해시에서 보는 황해바다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인천항에서 보는 바다의 모습과는 달랐다.
위해시에서 난생 처음으로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먹고(10가지 정도의 요리가 나옴) 유방시로 향하였다.
위해서 유방시로 가는 고속도로는 새로 건설된 것으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고 도로 주변에는 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꾸는 것이 보였다.
시내를 떠나 농촌지역으로 들어서자 중국 특유의 단조로운 풍경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인지 농촌의 주택은 모두 같은 형태였고 집단 부락으로 되어 있었다.
붉은 시멘트 기와 지붕에 일자형의 주택이었는 데 우리나라의 '70년대의 풍경을 연상시켰다.
강수량이 우리나라의 절반을 약간 넘는 700mm정도라 논은 거의 없고 밭농사를 주로 하는 데 우리나라 호남지방의 기후와 비슷하여 가을에는 밀을 심고, 여름에 밀을 수확한 후 옥수수를 심는 이모작을 한다고 한다.
경지 정리는 잘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도 보였다.
땅이 넓은 나라라 같은 농작물을 심은 곳이 버스로 30분 이상을 달려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위해서 유방시로 가는 곳에는 과수원이 많았다. 배와 사과 복숭아 등의 과수원이 30분을 넘게 달려도 계속되고 있었다.
갑자기 중국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량 생산된 농작물이 우리나라 시장을 공략한다면 적은 규모로 농사를 짓는 우리나라는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가계(楊家界)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는 데 이곳에는 연을 제작하는 곳이 있었다.
연을 만드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댓가지를 불에 휘고 있는 등 분업을 하여 연을 제작하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종이에 연의 문양을 찍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수십년간 연을 제작한 장인답게 숙련된 솜씨로 문양을 찍고 있었다.
연을 만드는 모습을 견학하고 전통적인 중국 상류 주택을 견학하였다.
대지주가 사는 큰 기와집으로 일부는 연을 만드는 작업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농기구, 생활 용품 등도 전시가 되어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제대로 관람하지 못하였다.
흥미 있는 것은 부엌이었는 데 부엌 옆에 있는 방에 조그만 창이 나있었는 데 부엌에서 일하는 며느리의 모습을 감시하는 시어머니의 방이라고 하였다. 양가계에서 출발하여 치박시에서 2박을 하였다.
관광지에 있는 호텔은 규모도 크고 깨끗하였다. 다만 화장실 문화는 뒤떨어져 있었다.
산동성 음식은 우리 입맛에 맞았고 음식때문에 고생을 한 일행은 거의 없었다.
다음날 태산(泰山)에를 갔다.
태산은 우리나라의 속담이나 시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산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로 시작되는 양사언의 시조나,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 등에서 말해지는 태산이 바로 이 태산을 말한다.
태산의 높이는 1500m가 조금 넘는다고 한다.
우리 기준에서 보면 그리 높은 산은 아니나 평야지대인 평지 가운데에 높이 솟아있는 태산은 굉장히 높은 산으로 보이며 산세가 웅장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는 산이다.
바위로 된 악산이고 웅장하기는 하지만 금강산이나 설악산과 같이 경관이 아름다운 산은 아니다.
태산을 오르려면 6666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15분에 태산 정산 부근까지 올랐다.
태산 정상에는 도교사원과 기상관측소가 있었다.
화강암 등으로 된 돌계단을 만든 돌은 밑에서 인력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 하루에도 3번씩 태산을 오르내린 사람이 있다고 한다.
(버스가 오는 데서 정상까지는 두시간이 더걸린다고 한다)
산위라 바람이 강하였으며 응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도교 사원에는 계속 향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였으며 향을 사르고 복을 비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50년이 넘는 공산주의도 중국인들의 고유한 신앙을 꺾지는 못한 것으로 보였다.
비록 정상 부근까지 케블카가 운행되지만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리고, 강한 바람이 불었다. 먼저 태산을 다녀온 일행이 있어 아래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길을 따라 정상에를 올랐다. 여행에는 체력이 필요하고 그래서 가능한한 젊어서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산에서 하산하여 점심을 먹고 곡부로 향하였다.
곡부로 향하는 중에 태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로 양식을 하였다는 민물 진주를 파는 곳에를 들렸다.
진주의 값이 싸다고 한다. 이곳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들려 중국인 사장이 조선족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진주를 팔고 있었다.
곡부는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의 사당과 무덤 등 공자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공자의 사당에는 우리가 본 공자의 대형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고 벽에는 공자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있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곳에는 중국의 역대 황제가 지은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고 비석이 있었다.
가장 큰 비석은 중국 청나라때의 건륭황제(약 250년전)가 만든 비석으로 무게가 260t이나 되는 데 돌을 북쪽에서 운반하여 왔는 데 겨울에 길에 물을 뿌려 얼게 한 후 썰매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많은 비석들이 중간이 부러져서 땜질을 한 자국이 있는 데 '60년대 말 문화혁명때 홍위병들이 파괴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철모르든 10대 후반이던 홍위병들은 지금 내 나이 또래인데 복원된 공자의 유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공자의 무덤, 사당, 공씨 일가의 무덤 등을 관람하고 맹자의 유적지로 이동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입장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맹자의 유적지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한번 안을 들여다 본 후에 태안시로 향하였다. 태안시에서 중국에서 둘째날을 보냈다.
저녁에 야시장에를 가서 중국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정초라 장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철시상태였다. 다만 길거리에 있는 당구장과 노래방이 인상적이었다.
길거리 노래방은 한 곡을 부르는 데 중국돈 1元(우리돈 150원)이었는 데 바람잡이가 있어 노래를 부르며 고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같이 연수에 참석한 여선생님 한분이 영어로 팝송을 한곡 불렀는 데 수준급이었다.
다음 날 태안시에서 출발하여 제남으로 향하였다. 제남은 산동성의 성도로 인구가 300만이 넘는 도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 사라진 전차가 다니고 있었고, 2층 버스가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적한 중국의 농촌이나 소도시와는 달리 번화하였고 어느 중학교에서는 방학중인데도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남에서 박물관 견학을 하였다. 갑골문자가 씌여져 있는 거북의 등껍질을 처음 보았다.
청동기로 된 솥과 거울 등 청동기 유물이 특히 많았다.
당과 송, 원대의 도자기들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동식물의 표본과 화석을 전시한 자연사 박물관이 있었는데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어나 중국에서 사는 팬더곰 등의 박제와 더불어 호주에서 사는 캥거루의 박제도 전시되고 있고, 공룡의 알과 길이가 15m쯤 되는 공룡의 골격도 전시되고 있었다.
제남의 박물관을 견학하고 고차(古車)박물관에를 갔다.
이곳에는 마차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는 데 한나라 이전부터 명, 청시대까지의 각종 마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에는 춘추시대의 무덤인데 말과 마차가 20여개나 묻혀있는 무덤이 있었다.
이곳에는 말과 마차를 나란히 묻었는 데 모두 잘 보존이 되어 있었다.
완전히 발굴하지 않고 반쯤 묻힌 상태에서 관람을 하도록 한 것이 특이하였다.
고차박물관을 보고 황하에 갔다. 황하는 세계 사대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가 관람을 한 곳은 황하 하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한강으로 치면 미사리쯤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황하를 보고 실망하였다. 5000km가 넘는 큰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작은 강이었다.
한강보다 수량이 적어 보였고 강폭도 생각보다 좁았다. 물빛갈을 짙은 황토색으로 우리나라의 홍수때 흙탕물의 빛깔이었다.
이 속에도 물고기가 산다고 하였다. 잉어와 민물갈치가 사는 데 민물갈치는 별미라고 하였다.
아득한 하류쪽에 낮은 바위투성이의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정자들이 보였다.
아마 시인들이 나무 한그루없는 바위투성이의 언덕에 있는 정자에서 누런 황하를 보며 시를 읊었으리라.
황하에서 사진을 몇장 찍고, 황하물을 찍어 맛을 보기도 하였다.
밟히는 퇴적물을 밀가루보다도 더 고운 황토흙으로 상류에서 운반되어 온 것인데, 상류 지역이 건조하고 바람이 불면 황사가 되어 우리나라에 날아오는 것이다.
황하를 관람하고 청도로 이동하였다.
황하 물을 맛보다
제남에서 청도로 가는 길은 제청고속도로라는 길이었는 데 광활한 벌판을 뚫고 달리는 길이었다. 길가의 풍경은 단조로왔다.
우리나라처럼 산이 있고 개울이 있고 벌판이 있고 시가지가 있는 그런 아기자기한 풍경이 아니라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모습이었다.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를 버스는 달리고 있다.
근 한시간을 달려도 사방에 낮으막한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었다.
밖에는 같은 모양의 일자로 된 붉은 기와집이 모여 있는 마을이 가끔 나타나고 군데군데 저수지나 물웅덩이가 보일 뿐 끊임이 없는 경작지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주로 밀밭인 곳이 있고, 비닐하우스 속에서 채소가 자라고 있는 곳이 있고, 과수원이 이어져 있는 곳이 있었다.
중학교때 교과서에 나왔던 장기영전부총리의 글인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라는 글이 생각났다.
미국의 대평원을 가로질러 기차 여행을 한 기행문의 제목이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였다.
문득 이 글이 생각났다. 40년전에 배운 글인데 중국의 대평원을 보니 오랜 기억의 창고에서 그 내용이 생각났다.
나는 아내에게 "버스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라고 하였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의 앞과 양옆과 뒤를 보아도 사방의 하늘이 지평선과 맡닿아 있다.
지구과학에 나오는 천구의 그림이 생각난다.
지평선은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고, 내 머리 바로 위에가 천정이 되는 반구(半球)가 바로 천구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탄 버스를 중심으로 한 큰 반구 속에 원으로 된 지평면에서 버스는 원의 중심이 된다.
버스는 원의 중심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대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면서 40년만에 장기영전부총리가 말한 원의 중심을 달리는 기차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천구의 그림에 나오는 반구와 지평선이 이해가 되었다.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산동성의 고속도로의 특징은 아직은 차가 적다는 것과 휴게소가 아주 적다는 것이다.
두시간쯤 가야 휴게소가 나타났다. 어떤 곳에서는 고속도로 진입로에 있는 화장실과 작은 가게가 휴게소를 대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차가 서면 무조건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중국 특유의 화장실은 관광객을 골탕먹이는 것 중의 하나였다.
관광지에는 그래도 남녀의 칸막이 구별은 되어 있었지만 화장실에 칸막이가 없어 서로 나란히 앉아서 용변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른 분의 이야기로는 학교의 화장실도 칸막이가 안되었는 데 사회주의 국가라 평등주의 사상이 강해서 교사용 화장실도 따로 없어서 선생님과 학생이 나란히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제청고속도로의 진입로에 있는 간이 휴게소에서 어떤 30대 중반의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제남에서 청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다가 잠깐 볼일을 보는 사이에 버스는 떠나고 남자는 휴게소에 들른 다른 차에 가서 사정을 하지만 태워주지를 않자 우리 버스에까지 와서 무어라 사정을 하는 데 관광객들은 방향이 같으니 태우고 가자고 하였지만 가이더는 태워주지를 않았다.
남자는 울상을 짓고 애원을 하고, 버스는 무심하게 출발을 하고....
우리는 시간이라는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이 버스를 타고 거쳐야 하는 곳을 거쳐야 목적지에를 도착하는 데 중간에 딴짓을 하다보면 시간이라는 버스는기다려 주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
공부를 할 시기에 힘들다고 게을리 하면 일차적인 목표는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광활한 평야지대는 청도에 들어서자 끝이 나고 바닷가에 위치한 언덕들을 끼고 건설된 청도에 들어섰다.
청도에서 저녁을 먹고 일박하였다.
청도는 1894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 조차지였는 데, 1차세계대전때 일본이 점령을 하였고 1945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역사가 있는 도시다.
독일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앞선 도시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 와도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 아파트와 고급 주택들이 많이 있었다.
농촌의 낙후된 주택과 비교하면 시장경제로 들어선 중국에는 이미 상당한 빈부의 차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었다.
파이를 똑같이 나누자는 사회주의에서는 생산하는 파이가 적어서 결국 똑같이 적은 파이를 나눌 수밖에 없지만 능력대로 일하여 갖자는 자본주의에서는 많은 양의 파이를 생산할 수는 있지만 각자가 차지하는 파이의 크기가 달라지는 문제가 있다.
결국 많은 양의 파이를 생산하기 위하여 중국은 시장경제로 돌아서서 경제는 시장경제, 정치는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체제를 갖고 있는 데, 등소평이 자동차의 좌측 깜박이를 켜면서 우측으로 달렸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북한은 파이를 똑같이 나누자고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결국은 파이를 조금밖에 만들지 못하여 다수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을 보았다.
그래도 중국은 북한보다는 많이 앞선 것으로 보였는 데 이는 시장경제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청도의 명승지인 해수욕장을 관람하였다. 바닷물은 깨끗하고 맑았다.
또, 장개석과 모택동의 별장과 독일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는 곳은 경관이 뛰어난 곳이었다. 300만 가까운 청도시는 중국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답게 잘 정돈되고 깨끗하고, 기후가 좋고 잘사는 도시로 보였다.
우리나라의 기업이 이곳에 3000개 이상이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청도에서 다시 석도로 향하였다. 석도에는 장보고의 유적지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장보고의 유적지로 향하였다. 이곳에는 법화원이라는 절이 복원되어 있었는 데 '나무아무타불' 대신 '나무아무도불'이라는 중국식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특이하였다. 경내 곳곳에는 김영삼 전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각종 단체 등에서 세운 기념비 등이 있었다.
1200년전 청년 장보고는 이곳 언덕에서 동포들을 만났고, 고향인 신라를 그렸으리라.
그리고,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바다를 제패할 꿈을 꾸었으리라.
해상왕 장보고를 지금 한국과 일본과 중국은 다시 영웅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언덕에 40m 높이의 장보고상을 세우고 있다.
그옛날 중국과 우리나라가 교역을 하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활발한 교류를 하자는 몸짓일 수도 있고, 우리나라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돈을 벌자는 실리의 발상일 수도 있다. 장보고는
신라에서는 귀족들의 싸움에 휘말려 비명에 갔지만 장보고의 신세를 진 일본의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엔닌스님은 장보고를 존경하여 기록을 남겼고, 일본인과 중국인 덕분에 장보고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石島에서 장보고 유적지를 관람하고 점심을 먹고 인천항으로 오는 배에 승선하였다.
산동성에서 본 산들은 거의 모두가 돌산으로 나무가 별로 자라지 않았다. 우리나라 인천에서 정기적으로 배가 다니는 석도항은 돌산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배에는 관광객인 우리 외에도 인천에서 중국으로 오가는 보따리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야 말로 장보고의 후예인 셈이다.
상업은 물자를 유통시켜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기여를 하고 있다.
실학자인 박제가는 농본국가였던 18세기 후반에 이미 물자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도로의 건설과 수운의 원활을 주장하였고 박지원 역시 상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석도항을 출발한 배는 인천으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은 중국에서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할당된 선실로 돌아가 잠을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돋이를 보려 하였으나 역시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볼 수가 없었다. 배가 이미 인천 앞바다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 앞바다의 승봉도라는 섬이 고향인 선생님이 승봉도, 이작도, 영흥도, 영종도 등 섬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 주었다.
날이 밝기 전이라 등대불을 볼 수 있었는 데 멀리서도 밝게 보이는 불빛이 일정한 주기로 밝기가 변하여 배의 항로를 인도하여 주고 있었다. 배는 천천히 인천항 도크로 들어와 무사히 접안하였다.
다시 하선하는 수속을 밟았다. 여권에 도장을 받았고, 짐검사를 받고 검색대를 통과하여 항구 밖으로 나왔다.
5박 6일(2일 밤은 배에서 잠)의 중국 산동성 여행은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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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중국 산동성 여행에서 느낀 것은 중국은 역사가 깊은 나라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나라이며 지금 기지개를 켜고 도약하고 있는 나라이고, 15억의 힘은 무한히 크며, 앞으로 세계의 선두에 서게 될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뒤지고 있다고 하여 결코 가볍게 볼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중국과의 인연을 더 갖게 될 수밖에 없는 데 중국과 경쟁하여 앞서는 길은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는 길밖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적 자원의 질을 최대한 높이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지금 중국은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이런 중국과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부담은 매우 크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한때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다.
그렇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이 할일은 바로 젊은 학생들의 몫이다.
중국의 그 넓은 땅에는 농촌이나 도시에서 십자가를 볼 수 없었다.
중국은 우리가 선교를 하여야 할 지역이다. 바로 땅끝인 것이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지만 어느때인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될 것이고 젊은이들은 그때 중국에서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종사하며 중국과 세계 만방에 복음을 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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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인하대에서 실시한 한문과 부전공 연수 과정 중 중국의 공자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교회 고등부 카페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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