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종교개혁 현장 순례(5) - 버킹검 궁전,타워브리지, 웨슬리기념교회

감리교회 본부 건물을 관람하고 버킹검 궁전으로 이동하였다.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은 영국 런던에 있는 궁전이다. 1703년 버킹엄 공작 존 셰필드의 저택으로 세워진 것을 1761년에 조지 3세에게 양도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증개축을 한 후 사저로 이용되다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 때에 궁전으로 격상되어 이후 역대 군주들이 상주하였다. 영국 군주의 공식적인 사무실 및 주거지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 영국 왕실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버킹검 궁전 정문

 

 

버킹검 궁전 광장에서 교우들의 모습

 

 

영국의 명물이자 중요한 관광 이벤트인 근위병 교대식은 4월에서 7월까지는 매일 1, 나머지 철에는 2일에 한 번씩 오전 11시 혹은 1130분에 열린다.

 

 

 

 

버킹검 궁전 광장에서 기마병의 모습

 

 

근위병 교대식, 우리가 버킹검 궁전을 관람하는 동안 이틀에 한번씩 열리는 근위병 교대식이 있었다.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위는 근위병 교대식 동영상이다.< 영상 박문숙 권사 제공>

 

트라팔가 광장은 1841년 완성되었으며, 1805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중앙에 높이 약 50m의 넬슨탑이 서 있다. 내셔널 갤러리,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가 있고, 분수와 그 주변에 모이는 수많은 비둘기가 명물이다.

트라팔가를 해전은 영국의 넬슨제독이 프랑스의 해상진출을 봉쇄한 전투로 기원전 480년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싸운 살라미스 해전

1587년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칼레해전,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일본 해군을 격파한 한산대첩과 함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4대 해전의 하나이다. 영국은 세계의 4대 해전 중 두번의 해전에 승리함으로 해가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트라팔가 광장

 

 

트라팔가 광장2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 밑의 사자. 사자는 모두 4마리인데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에서 이기고 노획한 대포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점심식사를 하러 이동하며 본 거리의 모습

 

런던타워는 영국 런던 템스강 북쪽변에 위치한 중세 시대의 왕궁으로 영국 왕권의 상징이자 노르만 군사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런던타워의 역사는 11세기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윌리엄 1)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복왕 윌리엄이 1078년에 중앙의 핵심 건물인 화이트 타워(White Tower)를 세웠고, 이어 헨리 3세는 1216년부터 1272년까지 내부의 원형 성곽을 건설하였다. 이후에도 증축과 개축이 반복되면서 14세기 무렵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런던타워가 세인(世人)들 사이에 유명해진 이유는 이곳에서 벌어진 권력과 왕좌를 둘러싼 피의 역사때문이다. 왕족을 비롯한 여러 고위층이 이곳에 유폐되거나 처형되었다. 12세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앤 불린(Anne Boleyn)을 포함한 헨리 8세의 두 부인, 헨리 그레이의 딸 제인 그레이(Jane Grey) 등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를 비롯해 유폐되었다가 풀려난 이들도 부지기수다.

 

 

해자에 둘러 싸인 모습의 런던타워

 

 

런던타워

 

런던 타워를 관람하고 나서 템스강으로 이동하였다.

영국의 템스강은 잉글랜드 남부에 흐르는 강으로 런던을 거쳐 북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가 334km이다. 우리 나라의 한강과 같이 런던의 도시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템스강은 19세기초까지 담수어가 살 정도로 깨끗한 강이었으나 영국의 산업화로 인하여 강이 오염되어 19세기 중반에는 여러 차례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를 내기도 하였다.

그후 하천의 정화를 위한 노력으로 수질이 개선되었다가 다시 악화되는 과정을 겪은 후 고도의 하수 처리 등을 통하여 괄목할 수질개선을 이루게 되어 지금은 물고기와 물범 등 민물 포유류가 살 수 있고 식수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강이 되었다고 한다.

 

템스강의 여러 교량 중 하나인 타워브리지는 1894년에 건설되었으며 국회의사당, 빅벤과 함께 런던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배가 지나가면 다리가 들리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템스강과 타워브리지

 

 

템스강의 모습

 

 

강건너 보이는 런던시내의 모습

 

 

 

타워브리지를 배경으로 필자 부부

 

 

테임즈강 관광을 마치고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웨슬리 채플과 살던 집, 웨슬리의 묘 등을 돌아보러 버스에 탑승하여 출발하였다.

호텔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과 중심지 관광을 마치고 웨슬리 사적지까지 가는 동안 가이더는 영국과 런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런던시내의 택시는블랙캡이라고 하는 데 런던시내의 지리를 숙지해야 면허를 내준다고 하였다.

택시 영업을 하는 데 8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데 비용을 대여하여 준다고 하였다.

택시기사들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하다고 하였다.

런던 시내에서 태극기가 걸려있는 건물을 두번 보았다. 대사관과 문화원 건물인데 타국에서 태극기를 보니 반가왔다.

 

런던 시내에 처음으로 지하철이 건설된 것은 1863년이라고 했다.

2층 버스, 공중전화 부스, 우체통 등이 빨간색인데 영국인들은 빨간색을 좋와한다고 한다.

런던의 인구는 930만인데 40%가 외국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항직원부터 길을 걷는 행인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흑인, 아랍계 사람들,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 등 마치 인종 전시장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런던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는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였다.

기독교의 50%정도가 성공회라고 한다. 강우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연중 강우 일수가 168일에 이르고, 비가 오지 않아도 흐린 날이 많고 쾌청한 날은 그렇게 많지를 않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쳐 영국에서 문학의 대가들이 많이 배출된 요인이 된다고 했다.

뮤지컬이 발달되었으며 무대 기술이 뛰어나다고 했다.

금속, 정밀공업, 금융산업 등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오후 3시 20분쯤 웨슬리 기념교회에 도착하였다.

웨슬리 예배당은 1778년11월 1일에 왕공 되었는데 설계는 조지 댄스가, 건축은 사무엘 투스가 하였다. 1779년 최초의 감리교 연회가 모였고 1881년에는 최초의 에큐메니칼 감리교 연회가 개최되었다. 3번의 화재로 인한 위험이 있었으나 무사하였고 2차 대전중에는 주위의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으나 웨슬리 예배당은 안전히 지켜졌다. (글 출처- 웨슬리 스토리)

   

 

웨슬리 기념교회

 

 

웨슬리 기념교회 내부

 

웨슬리 하우스  

웨슬리의 집은 1779년에 지어졌고 웨슬리는 그의 마지막 생애 114개월을 이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흔히들 '감리교 발전소'라고 불리워지는 기도방은 침실 뒤에 있으며 윗층의 방들은 방문 설교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웨슬리의 집에는 웨슬리의 오리지날 가구를 비롯하여 약 400여권의 책이 있는 개인적인 도서관, 친필서명노트, 밤에 썼던 모자, 어렸을 때 가졌던 방울, 심방카드, 윌리암 월버포스에게 편지를 썼던 펜 등 많은 개인 비품들이 보존되어 있다.

 

 

웨슬리 하우스

 

 

 

웨슬리의 기도실(인용자료)

 

웨슬리 박물관

웨슬리 박물관은 1984년에 개관되었고 존 웨슬리부터 현재 까지의 감리교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존 웨슬리가 사용했던 강대상과 수집한 도자기와 그림들,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그림과 마지막 임종 순간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웨슬리 박물관

 

 

 

웨슬리 박물관 2

 

 

웨슬리의 무덤

존 웨슬리는 179121일 미국 감리교도들에게 최후의 편지를 보냈고, 222일 최후의 설교와 편지를 썼으며, 224일 윌버포스에게 노예해방을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쓴 후, 32일 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39일 런던의 시티 로드의 웨슬리 채플 뒷뜰에 묻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일세(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고 두 번이나 확신 있게 말하면서 운명했다고 한다.

89(878개월)를 장수하였고, 키는 160cm, 몸무게 55kg였으며, 50년 이상 마상 전도를 하였으며, 40만 킬로미터 이상을 전도하였고, 42천여 회 설교를 하였고, 2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요한웨슬리의 묘

 

 

요한웨슬리의 묘비

 

 

요한웨슬리의 회심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 죤 웨슬리의 일기 -  

 

 

 

요한웨슬리의 회심 기념비

 

 

요한웨슬리가 회심한 올더스게이트 거리(다른 자료에서 인용)

 

이상으로 런던의 명소와 요한웨슬리의 생애와 관련된 현장을 돌아보았다. 시간의 제약으로 대부분 겉모습만 둘러본 아쉬움이 있었다.그러나 역사적인 현장을 방문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런던박물관 간판

 

 

어두움이 깔린 거리의 모습

 

 

 

호텔 앞에서 태극기를 두른 버스를 보았다. 먼 이국에서 태극기와 한글을 보니 반가왔다.

 

김한규 목사의 가족과 만남

김한규 목사님은 필자가 출석하고 있는 석사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했던 분이다.

군목에서 전역한 직후 본교회에서 시무하다가 다른 교회로 전임하였다.

그후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 데 옛 교우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2-3시간 거리를 운전하여 호텔을 방문하였다.

20분도 못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몇년만에 즐거운 해후를 할 수 있었다.

人生四喜(인생의 네가지 기쁨)라는 시가 있다. 약간 내용이 다른 경우도 있고, 지은이가 다르게 나오기도 하지만 대략 아래의 내용이다.

 

七年大旱逢甘雨(칠년대한봉감우) 칠년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났을 때.

千里他鄕逢古人(천리타향봉고인) 천리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났을 때.

無月洞房華燭夜(무월동방화촉야) 달도 없는 어두운 신혼방(洞房)에 촛불을 밝혔을 때.

少年登科揭名時(소년등과게명시) 소년시절 과거 급제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을 때.

 

김한규 목사님 가족과의 만남은 "千里他鄕逢古人(천리타향봉고인) 천리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났을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한규 목사님 가족들과 교우들의 반가운 만남.

우측에서 첫번째가 필자, 두번째가 담임 목사인 손학균 목사님, 세번째가 김목사님, 좌측에서 세번째가 사모님,

두 어린이가 김목사님의 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