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하루의 삶의 기록들

2000. 5. 25 - 28(제자의 목사 안수식, 교육평가원 출장)

2000년 5월 25일(목요일)

아침 열시에 소년체전 참가 선수들의 발대식이 있었다.

강원주선생과 함께 긴장하고 방송실 앞에 붙어 있었다.

교육감과 도지사, 도의회 의장 등 강원도의 거물급들이 모두 모였다. 방송은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발대식이 끝나고 순복음 제일교회에서 있는 안수식에 갔다.

여자 한분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분이 안수를 받았다.

현동헌선생님을 만나 축하의 인사를 하고 안수자 명단을 보니 엄준용이가 있었다.

나는 그의 형과 혼동하고 나이를 따져 보았으나 형은 아닌 것 같았다.

同名異人이 아닌가 하였는 데 안수자 열에 앉은 엄준용이가 인사를 하였다.

안수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예배와 설교가 있었다.

속초에서 시무하는 지방회장은 능력있는 주의 종이 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수위원들이 안수를 거행하였다.

권면의 시간에 어느 목사님은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을 하였다.

목사 까운을 입혀주는 의식이 있었고 안수식이 끝났다.

 

엄준용 목사에게 축하의 말을 하자 그는 콩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코 끝이 찡해오는 감격을 느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엄준용이가 안수를 받는 줄 모르고 왔었다.

우연히 20년전 제자의 목사 안수식을 축하하게 된 것이다.

엄준용이가 감신대를 나와서 순복음교단에서 안수를 받으리라는 것은 생각을 못하였다.

안수 후 곧 필립핀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선교사로 현재 사역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선교의 열매가 있기를 기도한다.

때로는 교직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보람이 교사로써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준용이가 훌륭한 목사가 되기를 기도한다. 정말 감격스러운 하루였다.

 

 

2000년 5월 26일 금요일

양구의 김종찬선생과 통화를 하였다.

안수식에 왔었으나 수업이 있어서 양구에 들어갔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은 소년체전 관계로 출장을 가셨다. 업무에 치밀하고 밀어붙이고 혼자서 말을 독점하는 스타일이지만 합리적이고 추진력이 강하고 다그치는만큼 밀어주는 유능한 경영자의 모습이다.

교무부장에게 결재를 맡고 서울로 출장을 가기로 하였다.

수업 시간에 암석과 광물은 구분하는 수행평가 시험을 보았다.

생각보다 성취율이 낮았다.

 

2000년 5월 27일

평가원으로 출장을 갔다. 새벽 6시 25분차로 출발하였다.

올라가는 길에 양구에서 다락방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던 전영*목사를 만났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체험만이 교회의 부흥의 비결이고 전도만이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은 전도 이외의 다른 데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학원 복음화에는 변화된 교사들의 힘이 최고라고 하였다.

내가 복음화를 위해 거의 한 일이 없는 데 대하여 반성을 하였다.

 

평가원에 도착하니 9시 15분이었다. 현황설명을 들은 후 협의회에 들어갔다.

2차 수정지시를 내린 것만 검토하고 다시 일부 내용에 대한 수정보완 권고를 하였다.

2월 24일에 교과서 검정위원으로 충주에 가서 3월 4일까지 11일간을 심의에 참가하였고

다시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세 번째 참석이다.

 

24종의 출원 도서 중 7종이 일차로 적격본이 되었다.

개별로 평가하여 이것을 위원회에서 심의하여 선정한만큼 절차상에는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검정기간이 너무 촉박하였고 나의 역량부족으로 충분한 검정을 하지 못한 것은 自激之心을 가지나,

국가적인 차원의 일에 참가하였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특히 박승재교수님의 업무 능력에 대하여 깊은 존경을 보낸다.

부드러움과 유머감각, 합리성, 그리고, 철저한 업무 추진능력과 사람들이 따르도록 하는 리더쉽은 본받을만한 점이다.

권*순교수, 윤선*선생, 강호*교수, 이병*선생, 성*모교수, 박찬*선생 등 유능한 교수들과 교사들을 만나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적격본에 대한 도장을 찍고 귀가하였다.

제 7차교육과정의 과학교과서는 내가 심의 위원이었고 내 도장이 찍힘으로 전국의 학생들에게 교재가 되게 된 것이다.

고생을 한만큼 자부심도 크다. 버스에서 내내 잠을 자며 왔다.

 

 

2000년 5월 28일

아침 9시 10분에 교회를 출발하여 어린이 89명과 교사 20명 그리고, 김세훈 부목사님과 학부모 네분이 함께 열차로 화랑대로 향하였다.

화랑대역에서 하차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후 기념관과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기념관에는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의 생활모습, 그리고 시대별 사관학교의 변천사를 볼 수 있었다.

기념탑의 동판에 졸업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김승육의 이름도 있었다.

28기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동기인 친구 정효*의 이름이 없어서 유감이었다.

졸업을 하였다면 최소한 연대장까지는 역임을 하였을 터인 데.

 

박물관에는 고대서부터 현대까지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무기는 점점 정교해지고 살상력은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관생도들의 절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여자 생도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이제는 남녀가 하는 일에 구분이 없어지고 경쟁하는 사회가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원대 의대 학부모회에서 여자 교수들이 많아진 것을 보고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돌아 오는 기차간에서도 내내 잠을 자면서 왔다. 집에서 쉬고 있는 데 송인원이가 전화를 하여 밖에 나가 샘밭 면허시험장 부근의 송어회집에서 박영휘장로님 내외와 송인원이 내외와 저녁을 먹었다.

송어회를 배를 채웠다. 교회에 오니 늦었다. 예배 후 부목사님 주최로 월례회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