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3일
몇 년동안 벼르고 벼르던 셈틀을 사왔다. 찬주에게서 160만원을 주고 샀다.
먼저의 컴퓨터는 ‘94년에 샀는 데 시스템이 불완전하여 오락기 노릇만 하였다.
200만원을 낭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래는 삼성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친구인 형태와 잘 연락이 되지 않아서 미루던 중 찬주에게서 컴퓨터를 사게 되었다. 이 컴퓨터로 아이들이 기능을 익히고 정보화시대에 뒤지지 않는 그런 인물이 되었으면 한다. 162만원을 지불하였다. 찬주가 성실하고 신앙생활도 모범적으로 하는 데 하는 사업이 성공하기를 기도한다. 딸들에게 컴퓨터를 설명하였는 데 너무 모르니 내가 自책責이 된다. 진작에 성능 좋은 컴퓨터로 교체를 하여 주었어야 하는 데
2000년 5월 4일
오늘은 소풍을 가는 날이다. 그보다는 내 생일이기도 하다. 아들 녀석이가 케익을 사왔다. 아침에 예배를 드렸다. 둘째와 막내 딸은 학교에 등교하고 아내와 아들과 나, 이렇게 넷이서 예배를 드렸다. 시편 128편을 읽었다. 일하는 소중함과 가정의 소중함이 기록되었다.
아파트를 짓던 공터를 파서 농사를 짓던 것이 못하게 되었다. 공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내 땅이 없으니 항의 한 번 못하고 결국은 근 한달동안 땅을 판 노력이 虛事가 되고 말았다.
학교 소풍이었다. 중도로 갔는 데 앰프를 옮기느라 힘이 들었다.
교생들이 아이들을 잘 통솔하였다.
앰프를 시설하고 주변에서 얼정거리다가 점심때가 되어 어머니들이 점심을 준비하여 왔다.
자식들을 위해 수고가 많다. 오늘은 내 생일인데 하여튼 생일상을 한 번 잘받았다.
소고기와 밥과 다른 반찬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오석완선생의 인도로 오락을 하고 3시가 되어 배를 근 한시간이나 기다려 타고 학교로 왔는 데 앰프를 옮기느라 힘이 들었다. 내년에는 앰프를 빌렸으면 좋겠다.
집에 돌아오다가 밭을 보니 모두 파헤쳐진 것이 우리가 심었던 모든 것은 다 파묻히고 말았다.
아내가 힘들게 감자를 캐서 임시로 저장하였다고 하는 데 심을 땅도 없고 올해 농사를 짓는 일은 일단은 불가능하다. 아내는 이번 일에서 이단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때 받을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힘쓰고 애썼으나 헛수고를 한 것이 이러리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오후 6시쯤 신권사의 차에 아내와 동승하여 화진포로 출발하였다.
허집사가 시장하다고 해서 저녁을 먹으로 길가의 식당으로 갔는 데 음식이 준비가 되지 않아 간단히 먹고(밥이 준비되지 않아 두 그릇으로 넷이 먹음) 출발하였다.
진부령을 넘어가서 속초와 거진 방향의 갈림길에서 김기기권사를 만나 화진포의 군인 콘도에 도착하였다. 회원들 7명이 담소를 나누다가 피곤하여 더 이상 같이 이야기를 못나누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2000년 5월 5일
아침 6시 10분쯤 일어났다.
손권사가 샤워를 하고 있어 한참 기다렸다가 바닷가로 나갔다. 화진포 바닷가를 거닐다가 한승석권사 부인인 홍권사를 통해 아내를 불러냈다.
바닷가를 거닐다가 김일성별장 쪽으로 갔는 데 파도에 밀려 온 미역을 건져내는 사람들을 보고 아내가 다시마와 미역을 건지기 시작하였다. 말려도 되지 않고 근 한시간동안이나 다시마를 건져 비료푸대로 하나를 채워 콘도로 돌아왔다.
예배를 드리고 9시 20분쯤 콘도를 출발하여 대진으로 갔다. 대진감리교회를 보니 전에 박목사님 생각이 났다. 항구에서 횟집에 자리를 잡고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漁港의 풍경을 구경하러 나왔는 데 이면수를 싸게 파는 것을 보았다.
아내가 놓칠 리가 없다. 한 두름 20마리에 1,000원이나 거져였다.
다른 회원들 아내도 나와서 집집마다 세 두름정도를 샀다. 우리는 여섯두름을 사서 차에다 싣고 횟집에 와보니 우리가 먹을 회는 다시 시켜 먹었다.
숭어가 바다에서 갖잡아 오는 활어가 활기가 있었는 데 양식한 것이 아니라 쫄깃쫄깃한 것이 무척 맛이 좋왔다.
회를 먹고 낙산 비치호텔로 이동하여 해수 사우나를 하였다.
지난 개교기념일 때도 속초에서 해수 사우나를 하였는 데 몸무게가 79kg 가까이 나갔다.
체중감량이 문제다. 사우나를 마치고 4시쯤 낙산에서 출발하여 한계령을 넘어 필례 약수터에 잠깐 들렸다가 내촌면에서 닭도리탕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여기서 각자 헤져서 우리는 신동수권사의 차를 타고 신권사 처남의 집에 생선을 전달하러 들렸으나 출타 중이라 그냥 떠나서 아내가 일하는 검사소에 생선의 일부를 냉동시키고 집에 왔다.
에어 로켓 두 세트를 사온 것을 전달할 겸 조카 며느리를 큰댁에서 불러 이면수 20마리와 함께 전달하였다. 아내가 이웃집에 이면수를 돌리고 나니 70마리가 14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 인심을 한 번 잘 썼다. 아내는 남은 가사일을 하고 나는 피곤하여 11시 20분쯤 잠이 들었다.
2000년 5월 6일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서 밭을 돌아 보았다.
廢墟가 된 밭이다. 힘들여 팠던 땅이 모두 뭉개지고 싹이 막 올라 오던 채소와 옥수수가 전부 파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시에서 미리 통보를 하여 주었으면 힘들여 땅을 파고 파종하는 노력의 낭비는 없었을 터인 데 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시민의 편의를 생각하여 주었으면 한다.
아침에 대진에서 사온 이면수와 다시마를 묻힌 것을 맛있게 먹고 출근하였다.
오늘 교생들의 실습이 만료된다. 9일에 있을 청소년 과학경진대회 출전학생 경비를 내가 직접 기안하여 결재를 받아 넘겼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면 서로 미루고 하는 것이 꼴이 보기 싫어 직접하는 것이 편하다.
두 시간 수업을 하였는 데 지시한 민들레를 가지고 온 녀석은 한 녀석도 없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도 준비하는 녀석이 없으니 인터넷과 입으로 수업을 할 수밖에. 수업 방법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흑판과 백묵만의 수업에서 VTR과 CD를 사용하고 인터넷의 활용까지 그러나, 가장 좋은 수업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지는 그런 수업이다.
오후에 교생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귀가하였는 데 둘째 딸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 있어서 낮잠을 좀 자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5월 7일
교회에 갔다. 아들 녀석은 성가대에서 관현악을 하지 않았다. 유감이다.
막내는 늦게 갔고, 예배를 드린 후 교회서 점심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교대에 가서 어린이 주일 행사를 하였다.
air rocket을 만들어 발사를 하는 행사를 하였는 데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 하였다.
밭이 다 파헤쳐져서 속이 상하다.
아들 녀석이가 여자 친구가 주었다는 조그만 꽃 화분을 가지고 왔다.
2000년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이 하루를 보냈다. 불효자식이다.
학교에 등교하여 조회를 하고 주무회의를 하였는 데 무척 길었다.
교장선생님이 혼자서 이야기하시는 시간이 길다.
업무에 열의가 있고 정통하지만 조금 독선적인 데가 있다.
2000년 5월 11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람들이 다시 공터를 파고 무엇인가 심고 있었지만 덧정이 떨어져서 나가지 않았다. 아내는 혼자서 땅을 확보하고 감자, 마늘 등 먼저 경작하던 농작물을 심는 것 같았다.
혼자 일하게 하는 것이 안되었지만 보장도 없는 공터를 파고 싶지 않아 하루 종일 쉬었다.
산나물을 뜯으러 가고 싶었는 데 차가 없으니 가지 못하고. 오후에는 디스켓을 정리하러 학교에 갔으나 옛날 디스켓과 지금의 것이 조건이 맞지 않아 진우네 집에서 정리를 하려 했는 데 100V 전압이라 컴퓨터만 태워 먹고 말았다.
2000년 5월 14일
주일에 교회에 갔었다. 어버이 주일 행사 준비를 하였다. 야외 예배 건으로 회의를 하였다.
화랑대역에서 기차가 서지를 않아 위도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아쉽다.
저녁 예배에 김성호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우리 민족이 세계 선교를 위하여 준비된 민족이라고 하였다.
기후 조건이 어느 기후에도 적응할 수 있고, 피부색깔이 어느 곳에서도 배척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민족이라는 말을 하였다.
유우식장로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야가 기독교 국가라고 하였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이미 확립되어 있어서 선교가 쉬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신학교가 난립하여 많은 교역자가 배출되고 있지만 홍정길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세계 선교와 북한 선교를 위한 인적자원의 확보라는 내용의 설교였다. 김연호목사님이 생각났다.
훌륭한 목사님이었는 데 아들이 그 뒤를 이어 목회를 하니 목사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 해외선교를 하는 것은 김목사님이 C,C,C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 5월 15일
제 19회 스승의 날이다. 간단한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오전에 귀가 하였다.
담임들은 꽃바구니 속에 파묻혔다. 송동은이가 편지를 보냈다. 영균이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착한 학생이다.
강원대 의대에서 학부모회가 있어서 갔다. 최상업교수가 회장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후임 회장이 마땅치 않아 간선제로 선출하기로 하고 현황설명을 들었다. 아들 녀석의 동기들은 벌써 의사고시와 전문의 수련 병원을 염려하는 데 군대를 갔다 왔지만 이제 1학년이니 아득한 생각이 든다.
과정을 주어진 기한에 이수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저녁에는 선친의 30주기 추도식이었다.
두 남동생들이 왔고 형님 내외분과 조카 며느리와 둘째가 왔다.
추도식이 끝나고 식사를 마치자 동생들은 각자의 집으로 가고 형님 댁의 식구들도 모두 귀가하였다.
의식 문제로 인한 갈등은 이제 아무러 가는 것 같다.
선친께서 별세하신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을 생각하니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의 희생 위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
나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셨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하셨던 희생과 헌신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2000년 5월 17일
오늘이 양력으로 내 생일이다. 50년간 살아온 것이다. 반세기의 삶. 그냥 나이만 먹은 것 같다. 저녁에 교회에 갔더니 이종헌권사가 기차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다. 위도로 가는 계획을 보류하고 화랑대로 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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