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교든지 종말에 관한 신앙이 있다. 불교도 미륵불의 강림을 고대한다. 난세에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도 종말 신앙이 있다. 종말 신앙은 신도들에게 강한 결집력과 열정을 가져 오게 한다.
기독교에는 밀레니엄 시대마다 종말론 신앙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장 강한 종말신앙을 가졌던 때는 초대교회였을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주님이 곧 재림하시리라 믿었었다. 그래서, 그 어려운 핍박을 견디고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오시리라고 믿던 주님은 재림하지 않으시고 교회가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으며 형식화된 제도권 교회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기원 1000년이 될 때 강한 종말론적 신앙이 나타났다고 한다.
서기 2000년인 밀레니움을 앞두고도 종말론적인 신앙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하였는지 모른다.
교회에는 세대주의적인 성경 해석이 있어 왔다. (이 용어의 사용이 정확한지 필자도 잘 모른다. 잘못된 것에 대한 지적을 바란다) 하나님의 창조가 6일이고 7일째 안식을 취하셨는 데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성경 구절을 원용하여 6000년의 시대가 가면 지금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주님이 재림하신 새로운 세계가 오리라는 신앙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무슨무슨 예언까지 그 방증자료로 이용하였다. 증산도와 탄허스님의 예언도 남사고의 예언도 이를 거들었다.
필자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던 '70년대 초에는 서기 2000년이 오기 전에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리라는 신앙을 가진 분들이 교회에 많았다. 여호와 증인에서는 '74-'75년경 종말을 강하게 암시하기도 하였다.
다니엘서와 에스겔서 계시록 등의 구절이 인용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하여 종말이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유황불이 핵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면서 이 주장은 수그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666이 컴퓨터라는 설과 함께 바코드가 화두로 대두되었다. 이마에 인을 맞는 것이 생체 표시를 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 EU(유럽연합)가 설립되고 세계정부가 실현되는 것이 종말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EU의 대통령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1992년 다미선교회 등의 휴거설은 이런 배경 속에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되어 갈 수 있었다. 교회의 목사들과 중진급 신도들 중에도 이 주장에 경도되었던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미선교회, 다베라 선교회 등에서는 비디오 테잎과 녹음 테잎 등을 각 교회로 배송하기도 하였고 길거리 등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기도 하며 열심히 휴거를 알렸다. 성경구절들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인용되었음은 물론이고 하방익군은 게시를 직접 받고 있다고 집회를 다니며 주장하기도 하였다.
1992년 10월 28일의 휴거는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한국교회에 끼친 파장은 엄청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인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성을 상실한 광신적 집단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때부터 교회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곧 도래한 PC 통신시대와 인터넷 시대의 반기독교 운동(안티기독교 운동)의 토양은 이때 준비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2000년을 지나면서 세대주의적인 종말론과 핵전에 대한 불심판 설은 수그러졌다. 또한 유럽연합(EU)이 결성되며 유로화라는 단일화폐까지 사용하게 되면서 EU가 적그리스도 정부라는 식의 종말론도 힘을 잃어 버렸다.
그러면서 컴퓨터의 보급과 정보화 시대의 전개, 게놈프로젝트를 통한 인간의 염색체 지도의 작성(염기서열의 해독)으로 인한 새로운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이 설정되면서 종말론도 새로운 외피를 입게 된다.
바코드에 의한 인식과 유전자가 종말론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였다. 유전자가 종말론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이곳 숭사리를 통하여 처음 접하게 되었다. 국제정세의 변화와 과학기술의 변화와 발달에 따라 종말론은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
그런데 종말론을 주요 교리로 하는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가 잘못 살핀 것이나 누락된 것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른 지적과 보충을 바랍니다.
(1) 성경구절의 인용(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성경구절을 끌어다가 견강부회시킴) (2) 노스트라다무스 류나 정감록, 격암유록 등의 기독교 밖의 예언서나 비기(秘記)도 필요시 인용 (3)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새로운 과학적 사실의 발견이나 기술의 전개를 종말의 징조로 견강부회 (4) 비밀스러운 게시를 자신들만이 풀어내었고, 자신들만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함으로 자신들의 집 단에 들어 오지 않으면 환난을 당하거나 구원을 받지 못함. (5)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며 자신들의 집단에 소속되어 준비를 해야만 구 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함. (6) 특별 게시와 성경의 해석 등을 통해 그 날과 때를 자신들만이 알고 있으며 준비하지 않는 자는 구] 원을 받지 못한다고 함. (7) 예언이 빗나가면 다른 방법으로 둘러대고 또다시 시한을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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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날짜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주님이 오시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준비하지 못한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이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깨어서 준비를 해야만, 재림하시는 주님을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깨어 준비하는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젊은 시절 계시록을 읽으며 그곳에 나오는 환난과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지금은 비록 서로 뜻이 어긋나는 점이 있어 전에 다니던 교회를 떠났지만 그 목사님께 은혜를 받은 말이 있다. 20년이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계시록에서 설교를 하며 목사님은 계시록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소식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온갖 환난이 오지만 계시록의 주제는 믿는 성도들의 구원과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이다. 계시록이 희망의 소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새로운 깨달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전에 까지는 두려움의 대상이던 계시록이 새로운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니 두려움에서 희망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종말론에 대한 이런저런 설들이 많다. 내 생각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3, 행 2:21 등>라고 하셨다. 아래의 성경구절은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지 까다롭게 하여 비밀스러운 게시를 아는 사람만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한이 없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종말이 어느날일까? 성경에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
그렇다면 그날과 그때를 알 수 없으니 어느날 재림하실지 모르니 항상 긴장하고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가? 그날과 그때를 준비하는 생활은 확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서, 또는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 사람들이 하였듯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흰옷을 입고 준비하여야 하는가?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 중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눅 17:35]
[눅 17:34]
맷돌질을 하고 있는 것, 자리에 누워 있는 것, 밭에 있는 것은 일상의 삶의 현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도 일상의 삶을 영위하여 가면 되는 것이다. 일터에서, 잠자는 것과 휴식하는 것 등 그대로의 일상을 영위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과 마음이지 어느 날 어느 시에 오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날짜와 시간을 미리 알고 비밀을 풀은 집단에 속하는 것과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코드나, 유전자 지도나, 염색체의 염기 서열의 해독, 유전자 해석 등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개되는 하나의 패러다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이 종말론적인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2007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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