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입는 것과 먹는 것 자는 곳<의식주(衣食住)>이다.
필자는 이 세가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먹는 것(食)이라고 생각한다.
열대 지방에는 옷을 입지 않고 나체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다.
선사시대에는 동굴을 주거지로 삼거나 엉성하게 꾸민 이동식 움막이나 움집같은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1993년에 입적하신 성철스님은 소식을 하셨다.
성철스님의 제자가 성철스님이 드시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공개되어 시청한 적이 있다.
유치원 어린이가 먹을 정도의 적은 양 밥과 배춧국 솔잎 썬 것 조금, 잣 몇알이 한끼 식사의 전부였다.
끼니에 따라 식단의 변경이 있었을 수 있지만 소식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소식을 한다고 할지라도 살아가는 한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7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하였다.
흉년으로 곡식 생산이 준다거나 외국의 원조가 원활하지 못하여 식량가격이 폭등하는 경우 굶주리거나 제대로 먹지 못하는 국민들이 생겨났다.
춘궁기(春窮期)니 보릿고개니 절량농가(絶糧農家-식량이 떨어진 농가)니 하는 말이 유행하였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60년대 초 우리 집에도 양식이 부족하여 조반석죽(朝飯夕粥-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으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는 보리밥을 먹고 점심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으나 아마 어머니는 점심을 거르셨던 것 같다.
저녁은 수제비 국이나 칼국수 아욱죽 등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끼니를 거르지 않았던 우리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이웃에는 제대로 먹지를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뜬, 지금 생각하면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에서는 식량증산을 독려하고 양곡의 소비절약을 강조하였다.
도시락 검사를 시행하여 잡곡밥을 먹도록 강요하였다.
혼분식을 하라는 캠페인이 행해졌고, 식당에는 無米日이라는 날이 있어 이 날은 잡곡밥이나 분식만을 팔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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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1956년이다.
휴전이 되어 한국전쟁이 끝난지 채 3년이 안되는 때였다.
그래도 학교 건물이 세워져서 바람과 비를 가릴 수 있는 교실에서 공부했으니 노천에서 공부한 선배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우유가루(탈지분유)를 나누어 주었다.
이 분유는 노란 빛을 띄는 고운 가루였다.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는 분유를 물에 개어 밥솥에 쪄 주셨다.
갖 쪄낸 우유 반데기는 약간 단맛이 나며 맛이 좋왔다.
그러나 식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우유가루를 배급한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찐 우유덩어리를 갉아 먹었다.
가끔씩 선생님이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는 적이 있었다.
이날은 분유를 더운 물에 탄 우유를 배식하였다.
아마 상부에서는 우유를 끓여 주라고 지시를 했으나 시설이 열악하고 연료확보가 어려운 학교에서는 편법으로 분유를
나누어주고 점검을 나오는 날에만 끓인 물에 분유를 탄 우유를 배식한 것 같다.
이것이 한국 전쟁후 최초로 시행된 학교급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60년대 초에는 옥수수 가루 죽을 배식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동들에게 배식을 한 것은 아니고 극빈층의 아이들에게만 옥수수 가루 죽을 배식하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축구부 아이들에게 연습 중간에 옥수수 죽을 주었다.
죽을 먹는 축구부 애들의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옥수수 죽을 주다가 옥수수 빵을(나중에는 밀가루 빵을) 저소득 층 아동들에게 공급을 했다.
그러다가 1977년 서울에서 1명이 사망하고 8000여명의 학생이 중독되는 식중독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학교 급식이 거의 중단되었다.
1981년 학교 급식법이 제정되어 일부에서 시행되었지만 '90년대까지 학교급식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이는 식중독 사고로 인해 급식이 중단된 것이 학교급식을 늦추는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무위키 한국 급식 : https://namu.wiki/w/%ED%95%9C%EA%B5%AD%20%EA%B8%89%EC%8B%9D)
'90년대 말부터 학교급식이 전면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초등학교에서 실시되었고 중고교로 확대되었다.
학교에 급식시설을 갖추고 영양사와 조리원을 고용하여 직접 급식을 제공하는 직영과 외부 업체에 위탁하여 급식을 하는
위탁급식이 있었다.
2000년대 초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많은 학교에서는 위탁급식을 실시하였다.
급식 업체에서 급식을 준비하여 시설을 갖춘 차량으로 학교에까지 운반하여 배식을 하였다.
필자가 두번째로 춘천중학교에 재직하던 1999년 위탁급식이 시작되었다.
1999년은 필자가 마지막 담임을 하던 해이기도 했다.
어린시절 먹는 문제로 고통을 겪었기에 담임반 학생들에게 식사지도를 강화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급식 방법은 위탁급식 업체에서 급식을 실은 차량이 오면 배식원(한 학급에 한명씩 배정, 주로 가정주부들이 담당)이
밥과 국 반찬을 식판과 같이 운반용 수레(카트)에 싣고 복도로 와서 대기하였다.
4교시 수업이 끝난 아이들은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식사를 하고 식후에 식기를 반납하는 방법이었다.
필자가 강조한 것은 절대로 음식을 남겨 버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밥과 국과 반찬을 자기가 먹을만킄 덜어다가 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먹을만큼만 음식을 덜어가고 모자라면 더 가져다가 먹을 수가 있지만 너무 많이 퍼가서 남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가 정한 방침이었다.
단 급식원이 직접 배식하는 경우에 남는 것은 버릴 수가 있다는 규정을 정하고 실시하였다.
음식을 남겨서 버리는 녀석들은 벌로 청소를 시켰다.
배식을 시작할 때부터 식사를 마칠 때까지 교실에 입회하여 있었다.
잔반통에 남은 찌꺼기를 버리는 것을 지켜 보고 규칙을 어기는 녀석들을 지적하였다.
중2 반항기라 지적을 당한 녀석들이 반발을 하기도 했다.
어떤 분은 억지로 먹게 하다가 탈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염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먹는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경험이 있는 필자는 먹는 것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기에 우리반 아이들에게는 먹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원칙을 정하고 일관성이 있게 꾸준히 지도를 하니 아이들도 불필요하게 음식을 많이 덜어가서 남겨 버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생선뼈 등 먹을 수 없는 부분만 잔반통에 버려졌을 뿐 밥이 버려지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음식을 남기는 것에 대해 별다른 지도가 없는 다른 반과 비교하여 보면 우리반에서 버려지는 잔반의 양은 확실하게 적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대부분의 학교에서 시설을 갖추고 영양사와 조리원을 채용하여 직영을 하게 되었다.
식당이 있어 학생들은 식당에 와서 순서대로 배식을 받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량사정이 좋와지며 끼니를 거르는 절대빈곤층이 획기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학교 급식의 질을 가지고 불평을 하는 경우가 나타나게 되었다.
일부 학부모들이 급식의 질을 따지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식단을 공개하고 학부모를 참관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급식을 투명하게 운영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렵다.
아이들은 입에 맞지 않는 반찬이 나오면 잘 먹지를 않고 남기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어떤 녀석들은 학교 급식을 먹지 않고 컵라면이나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영양을 고르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식단만을 꾸밀 수는 없는 일이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먹을 것만 있으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먹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일부 유치원의 부실한 급식이 문제가 되고 있다. 비양심적인 원장들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질이 낮은 식재료나 보존 기간이 지난 식재료를 쓰고, 양을 줄여 급식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의식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다. 이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절대 빈곤의 시대는 벗어났다. 학교에서는 성장기의 아동들과 청소년들에게 균형잡힌 영양을 공급하여 잘 자라도록 하는 것은 개개인은 물론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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