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진급의 마지노선 출석일수 2/3

예전에는 낙제라는 유급제도가 있었다.

일제때에는 초등학교에도 있었다고 했는 데, 해방후에 초등학교에 낙제가 시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학교 재학시절 선생님들을 공부를 못하면 낙제를 시킨다는 협박(?)을 하시곤 했지만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서

낙제를 당한 경우는 없었다.

고등학교때 1년 선배들 몇명이 유급을 당하여 우리와 같이 공부한 경우는 있었지만 우리 학년에서 낙제를 당한 경우는 없었다.

예비고사가 시행되던 첫해은 1968년 필자의 모교에서는 예비고사 합격률이 전국평균에도 못미쳤다.

강원도에서는 명문이라고 자부하던 학교의 위상이 말이 아니었다.

학교에는 비상이 걸렸다. 1969학년도에 부임을 한 이원복 교장선생님은 1971학년도 2,3학년 진급대상자들 중 성적이 기준에

미달되는 학생들을 대거 유급시켰다.

한 학년 8학급 중 40명 정도씩 유급이 되었다.

유급을 면하기 위해 전학을 간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하니 적어도 한 학급 이상은 유급을 시켰다.

필자의 동기생이 3수를 하여 대입원서를 쓰게 되었는 데 창피하여 가지 못하겠으니 나보고 대신 원서를 써다 달라고 해서

모교를 방문하였었다.

교무실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엄마들이 찾아와서 울면서 담임교사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충격을 받고 음독을 하였느니, 가출을 하였느니 하면서 학년이 올라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의 확고한 의지때문에 모교 역사상 최대인원의 유급은 현실화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효과는 매우 컸다.

예비고사 합격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고, 몇년 후까지 유급을 가지고 겁을 주는 효과가 먹혀들었다.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필자의 모교는 명문대 진학자수가 전국 한자리 순위안에 들어가는 실적을 거두었다.


필자가 교사로 근무할 때 학년말에는 진급사정회를 했다.

제도적으로는 성적이 기준에 미달될 때는 유급대상자로 분류를 했다.

그러나 부모와 본인의 서약을 받고 진급을 시켰기 때문에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유급이 이루어진 예는 없었다.

필자가 근무하는 동안 도내 학교에서 유급이 실시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성적을 기준으로 한 유급은 사문화가 되고 말았다

========================================================================================


한 학년 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이 진급하지 못하는 경우는 출석일수 미달이었다.

교과성적에 의한 유급제도가 거의 사문화된 지금 중고교에서 유급의 유일한 원인이 출석일수 미달이다.

전체 출석일수의 2/3에 미달되면 자동 유급이 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탄광지대인 고한여중에 근무할 때인 1984년의 일이다.

심장질환으로 몸이 약해 결석을 자주하는 S가 있었다.

S의 얼굴은 창백하였고, 학교생활을 힘들어 했다. 그리고 자주 결석을 했다.

학년말에 진급사정회를 할 때였다.

담임이 각 학년별 배정인원과 전출입 인원, 교과성적 특이자(우등상과 성적미달 유급대상자-실질적으로 시행하지 않았음)

개근과 정근 대상자, 출석일수 미달를 보고하였다.

그런데 2학년 어느 반에서 출석일수 2/3미달 학생이 있었다. S였다.

담임들의 발표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이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는 데 출석일수 미달학생에 대해 진급불가를 결정하였다.

담임인 이선생은 선처해달라고 했다. 학생이 심장질환으로 결석이 잦아 출석일수가 며칠 모자랐으나 진급을 시켜달라고

애원했다. 교장선생님은 규정상 불가하다고 하며 결정을 번복할 수가 없다고 했다.

담임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지만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S는 동급생들과 같이 3학년에 올라가지 못했다.

초임인 담임교사가 규정을 잘 숙지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새학년도에는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갔기 때문에 그후 S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몸이 약한 S는 학교를 계속 다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1993년 모교에서 두번째 교직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95년에 입학한 K라는 학생이 있었는 데 5살때 마을에서 또래에게 돌로 머리를 맞아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후유증이 심하였다.

자주 경기를 하고, 기절을 하는 일도 있었다.

농촌이라 가해자와 한마을에서 살고 있었는 데 어머니는 가해학생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1학년때는 결석이 잦기는 했어도 그런대로 출석일수를 채웠다.

그런데 2학년이 되어서는 증세가 더 심하여졌다.

결석도 잦아지게 되었다. 10년 이상 경력이 있는 주선생은 비공식적으로 K의 상태를 말하며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규정에는 위배되지만 K가 학교에 등교만 하면 조퇴를 하여도 조퇴처리를 하지 않았다.

미리 대비를 한(?) 까닭에 학년을 수료는 할 수 있었다.

1997년에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갔기 때문에 K의 그 후의 소식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 3학년 과정은 이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질병으로 인해 학교를 쉬거나 중단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요즈음은 가출이나 등교거부 등으로 인한 결석이 유급을 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생활고 등으로 인한 결석이 아닌 학교생활 부적응이나 가정불화 등으로 인한 가출이나 학교밖 방황이 원인이다.

모교에서 두번째로 근무하던 '93년에 2학년 담임을 하였다.

당시 20년차 경력 교사였지만 교육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임시절에는 의욕과 열정만 앞설 뿐이었으나  경력이 쌓일수록 더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54명을 담임하게 되었는 데 속을 썩이는 녀석들이 몇명 있었다.

문제는 상담을 하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묻는 말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야기를 해야 생각을 읽을 수가 있는 데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니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욱박지르면(?) 겨우 단답형 대답만 할 뿐이었다.

세 녀석이 한꺼번에 가출을 하였다. 며칠이 지나 어떻게 연락이 되어 아버지들이 서울 양말공장에서 일을 하는 애들을 데리고 왔다.

먼저 입사한 형들이 잘해 주고, 안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고, 돈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공장이 좋다고 했다.

얼마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다시 가출을 했다.

이번에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들이 가서 설득을 했지만 죽어도 학교로 오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물론 출석일수  미달로 진급할 수가 없었고 의무교육 과정도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춘천시 읍면지역에서 근무할 때다.

J는 2년을 학교밖에 있다가 복교를 한 여학생이었다.

J는 상습적인 지각생이었다. 2-3교시가 지나 등교하였는 데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잠을 잤다.

깨우면 잠깐 머리를 들었다가 다시 엎드려 잠이 들었다. 깨워도 소용이 없으나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1학기 중간이 지나며 결석 빈도가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담임이 집으로 데리러 가고 해도 효과가 없었다.

부친을 호출하였으나 80이 가까운 노인으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그저 잘 보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분에게 할 말이 없었다.

2학기 중간부터는 아예 학교에 오지를 않았다. 담임이 한달만 더 나오면 졸업을 한다고 설득을 하였다는 데 J는 끝내 학교에

오지를 않아 동출석일수 2/3 미달로 동급생들과 같이 졸업을 할 수 없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고 고등학교도 모두가 진학을 하게 되었지만 초중고교 과정에서 중도탈락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해마다 5만명 가까운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고, 절반 가까이고 복교를 하지만 이들 중 절반은 또 다시 학교를 떠난다고 한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구성원이 모여 이룬 공동체다.

공동체의 존립 목적이 있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 있지만 이를 힘들어 하는 학생들이 많다.

경제적 원인으로 인한 중도탈락은 많이 줄었다. 그러나 학습욕 상실로 인한 교과 부적응, 일탈행동으로 인한 징계와 이에 대한 반발심리, 교우관계의 갈등 등으로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중도탈락을 하는 학생들이 아직도 많다.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학교밖에서 떠도는 것을 방지할 묘책은 없는 것일까?

필자 역시 그 묘책을 찾지 못하고 교육현장을 떠났다.

내가 담임을 했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한 무력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지난 37년간의 교사생활을 회고하면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이 드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