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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학교를 떠난 학생들

학년을 올라가려면 출석일수와 교과성적이 일정 수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초중학교가 의무교육이고,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지금 교과성적이 나빠서 학년을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른바 유급(낙제)이라는 규정은 거의 사문화(死文化)가 된지가 오래다.

그러나 출석규정은 다르다.

학생들이 한 학년을 이수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출석일수는 전체 수업일수의 2/3다.

1년에 210일을 출석해야 한다면 최소한 140일 이상을 출석해야 학년을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가출이나 학교 부적응 등으로 장기간 무단결석을 하는 경우 출석일수의 2/3를 채우지 못해 유급이 되게 된다.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필자의 세대와 교사 초임시절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컸고, 학습 부적응은 다음이었다.

필자가 모교인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동기생들이 동창회를 조직하자고 했다.

같이 입학을 하였으나 자퇴나 전학 등으로 졸업을 하지 못한 친구들도 포함을 시키자고 했다.

졸업생이야 앨범을 보면 명단이 곧 작성이 되지만 중도 전학이나 자퇴는 제적된 학적부를 찾아보아야 한다.

학교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제적대장을 찾아서 보았다.

먼지를 털어내고 오랜 세월에 색이 바랜 학적부와 제적되게 된 사유를 적은 문서를 읽어 보았다.

120명이 같이 입학했는 데 90명 정도가 졸업을 하였다.

전입을 온 경우가 10명 정도가 되고, 전학을 간 숫자도 비슷했다.

30명 정도가 중도에 학교를 떠났다.

사유는 교납금 미납이었다.

당시는 월납금이라고 해서 다달이 교납금을 냈는 데 몇달 이상이 밀리게 되면 제적이 되었다.

모두 아픈 사연이 있었을 것이고 학교를 떠나 자립하기까지 엄청 고생을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졸업대장과 제적대장에서 인적사항을 파악한 후 경찰청에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 동기들의 명단을 보냈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담당자가 전산망을 통해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약 70% 정도의 명단을 확보해서 연락을 하고 첫번째 동기 모임을 가졌더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졸업후 30년만에 처음 만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반에서 1등을 하던 친구였는 데 2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30년만에 만나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누가 조금만 도움을 주어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면 다른 형태의 삶을 살 수 있었을 터인데....

재능이 있었던 친구였는 데 안타까왔다.

'60년대에 중도에 학교를 떠나는 사유가 경제적인 원인이었다면 필자가 교사로 근무하던 '7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적인 이유는 감소하고 부적응의 비중이 증가하게 되었다.

물론 자퇴하는 비율도 일정수준까지는 감소하였다.

 

'70년대 -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제적인 사유로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골에서는 그 비율이 높았다.

초임시절 필자가 담임을 했던 학생들 중에 교납금을 못내서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부친이 같이 와서 자퇴원을 내고 부자가 함께 학교를 나가는 축처진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학교생활 부적응(학교를 다니기 싫다고...)으로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첫번째 담임을 맡았을 때다.

D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4km 정도 떨어진 D의 집을 방문했다.

동생들이 5-6명이나 되는 가난한 가정이었다.

부모님은 학교를 보낼 의사가 있었지만 당사자가 학교에 다니기 싫다고 했다.

설득을 하러 7번이나 집을 찾아갔지만 끝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붙잡지 못했다.

학교를 중퇴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해 SNS를 통해 당시 제자와 연락이 닿았고 D와도 연락이 되었다.

D는 수원에서 순대국밥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 몫을 감당하며 산다는 소식을 접하니 기뻤다.

두번째 담임을 맡았던 K가 있었다. 학교에 결석을 하였다. 집에 가서 설득을 하여 데리고 왔다.

사유를 들어 보니 자전거가 낡아서 창피해서 못다니겠다고 했다. 집에 이야기해서 새 자전거를 사주게 하였다.

다음에는 가방이 낡아서, 또 무엇이 어때서 이렇게 핑계를 대다가 나중에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지나서 다시 모교에서 근무할 때 학생들을 인솔하여 학생야영장에 수련활동을 하러 갔다.

야영장을 관리하는 직원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K와 사는 지역이 같았다.

물어보니 삼촌이라고 했다.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산다고 했다.

 

Y는 첫번째 담임을 한 학생이었는 데 어머니와 형의 교육열이 강했고 당사자도 성적이 우수했다.

3학년때는 담임을 하지 않았었는 데 가정에 연이어 불행이 닥쳤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의 형은 동생을 끝까지 가르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나에게 동생을 잘돌보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 그의 형이 실연을 하고 음독 자살을 하였다.

연이어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어느 독지가가 당시 춘천의 명문고로 진학을 하면 3년간 학비를 책임져 주겠다고 했지만 Y는 병든 아버지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인쇄공장의 사장이 그를 채용하여 학업을 마치게 해주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두번째 임지였던 시골의 고등학교에서도 자퇴한 학생들이 있었다.

경제적 이유와 학교 부적응의 사유였다.

J는 학교를 다니기 싫다고 가출하여 서울에 가서 주간지 판매를 하며 자립(?)을 하였다.

한달이 지나 학교에 왔다. 설득을 해도 학교를 떠나겠다고 했다.

학교 부적응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에게는 그를 붙잡지 못한 데 대한 나의 능력부족을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형이 진 빚때문에 온 가족이 야반도주를 하니 자퇴처리를 해달라고 하며 떠난 제자가 있었다.

그를 붙잡을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학교에 다니기 싫다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학교는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공부는 재미없고, 닭장 속에 갇힌 것 같은 학교 생활을 인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983-1984년 탄광지대에서 근무할 때였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면 매번 10명 가까운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교생의 1%정도였다.

담임들이 가정방문을 하여 보면 한 가족 전체가 도주를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탄광지대라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탄광에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업 실패나 부채 등으로 도주하여 탄광지대로 온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채권자가 추적을 하여 이들의 소재지를 찾아내었거나 아니면 탄광지대에서의 생활도 힘들게 되자

가족 전체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전주에선가 판소리를 배운 학생이 전입하여 왔다.

판소리를 아주 잘하였고 장구도 잘쳤다. 고전무용을 가르치던 나선생이 무척 기뻐하였다.

이 학생은 무용시간에 장구를 치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오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났다고 하는 데 행방을 알 수 없어고 학교에는 주인을 잃은 장구만 남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을 오판해서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였다.

시골고등학교에서 공부해서는 서울법대에 진학을 할 수가 없다고 자퇴를 하거나,

프로 권투선수가 되기 위해 서울에 가서 도장에 다녀야 한다고 학교를 떠나는 경우 등이다.

경제적 원인이나 학교생활 부적응 등으로 학교를 떠나는 경우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건강상 문제로 학교를 떠나는 경우다.

 

첫번째 담임을 맡았을 때 우리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던 수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1학년때 수현이 담임을 했었다.

아버지는 연로했고, 어머니가 채소장사를 해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이복형이 있었지만 부사관으로 가정에 힘이 되지 못했다.

수현이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는 데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4개 학급 250명 중 1-2등을 다투었다.

2학년 겨울방학을 끝내고 학교에 출근을 하니 방학 중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치료만 적절하게 받았으면 회복될 수도 있었는 데 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가는 시기를 놓쳐서 15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방학을 하고 근무지인 양구가 아닌 춘천에 와있으며 소식을 몰랐던 것이다.

장사를 지낼 때 2학년때 담임인 이선생이 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개학을 하고 교사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였지만 부모에게 무슨 위로가 되었겠는가?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전교 1-2등을 다투던 우수함과 성실한 생활태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M은 필자가 춘천여중에서 근무할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떴다.

춘천역 부근 빈민가에서 할머니와 같이 어렵게 살았는 데 심성이 곱고 바른 학생이었다.

생후 1개월만에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는 데 M이 세상을 떠나기 몇달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모부가 방에 놓아준 연탄난로에서 연탄가스 누출이 되었는 데 팔순의 할머니는 생존했지만 M은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희귀 질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모두를 안타깝게 한 경우도 있었다.

춘천 외곽지역 농촌학교에서 근무할 때, 마지막 근무지에서 근무할 때 희귀질병으로 어린 나이의 제자가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움을 겪었다.

2000년대가 되어 의학이 발달되었지만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하였다.

 

'8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는 경우는 감소하게 되었다.

기초생활 수급자에 대한 학비 지원제도가 생기게 되고, 1985년 도서 벽지를 시작으로 2002학년도 입학생부터 전면적으로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면 면서부터 경제적 사유로 학교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게 되었다.

학교생활 부적응과 건강문제가 중도 학업포기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가정문제와 학습부적응이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이어지게 되고 탈선과 연결되며 학교를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더러는 문제를 일으켜 훈계를 듣고, 징계를 받게 되며 이것이 누적되며 교사들과 갈등이 심화되게 되고 학교를 떠나게 하는

악순환을 야기시키게 되는 것이다.

1993년 모교에 다시 부임하여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결손가정으로 편부슬하에서학교에 다니는 세명이 있었는 데 이들의 학교생활 태도는 좋지 않았다.

잦은 결석에 낮은 학업성취도는 이들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이들과 상담도 하고 관심을 갖기도 하고 설득도 하였지만 태도의 변화는 없었다.

2학기때는 가출까지 하였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을 아버지들이 가서 데리고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셋이서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불렀으나 도망을 갔다.

그뒤 그들은 집에서 가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담임으로써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필자의 초임시절에는 주로 경제적인 궁핍이 애들이 방황하는 이유였다면 '90년대부터는 가정불화나 이혼 등이

학교생활 부적응의 큰 원인으로 대두되었다.

가정해체에서 오는 문제와 학습의욕 상실, 교우관계의 갈등 등이 애들을 학교밖으로 몰아내는 원인으로 대두되었다.

어느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부모의 이혼으로 의부와 살게 된 아이가 가정내 갈등으로 친부와 친모 사이를 오가며 '

姓이 친부와 의부의 성을 따라 최에서 김으로, 다시 김에서 최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도 친모가 있는 곳과 친부가 있는 곳을 오갔다.

그런 그가 학교생활에 의욕을 가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되면서 징계에 의한 퇴교는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춣석일수가 모자라게 되면 취학유예를 시키고, 동기들이 졸업을 하면 중퇴자가 되게 되었다.

교납금 미납으로 인한 제적도 없으니 경제적 문제가 학업중단의 사유가 될 수없게 되었다.

그래도 중도탈락자는 해마다 일정비율이 발생하였다.

2000년대 초 춘천시 읍면지역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J는 2년간 취학유예를 하였다가 복학을 하여 동기들 보다 두살이나 위인 여학생이었다.

2-3교시가 되어서야 학교에 등교하였다. 상습적인 지각이다. 학교에 와서도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잤다.

때로는 담임이 잠을 깨우러 갔지만 매일같이 깨워서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같이 생활하는 언니가 있었지만 언니도 그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학교로 불렀다. 그런데 80이 다된 노인이 그의 아버지였다.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인 아버지는 재혼을 하여

환갑 나이에 딸을 낳았고 당시 어머니는 환갑이 다되었었다.

노인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 잘 보아주십시오"라는 말만 반복을 할 뿐이었다.

눈물만 흘리고 계시는 80이 되어 가는 노인에게 드릴 말씀이 없었다

배웅을 하러 따라 가보니 오빠라는 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닌가?

노인을 들여보내고 들어오지 않는 오빠라는 자가 원망스러웠다.

H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시내 학교에 다니다가 가출을 하여 티켓 다방에서 일을 하다가 천사같은 여자경찰관을 만나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대로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았으나 급우들에게 군림을 하고, 반강제적으로 급우의 핸드폰의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등의 일탈행동을 하였다.

데리고 있는 경찰관의 눈물의 호소와 피해금액 변제로 선처를 받았으나 거듭 비슷한 문제를 일으켜

지역 신문에 보도가 되어 문제가 커지게 되고 학부모들의 항의로 대안학교로 전학을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여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CH는 시내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권고전학을 온 학생이었다.

아무리 문제가 있는 학생이라도 의무교육이라 관내에 거주하면 거부할 수가 없었다.

CH는 관내의 초등학교 6학년때 시내로 위장전입을 하여 시내중학교에 배정되었으나 말썽을 일으켜 2학년 초에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오자마자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가출이 반복되었다. 예전같으면 제적감이었으나 의무교육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가 학교에 데리고 올 때마다 담임이 상담을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가출을 하여 며칠 결석을 하였는 데 모친이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왔다.

학생부에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는 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해서 다녀오라고 했더니 오지를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왜 화장실을 혼자 보냈느냐고 원망을 하였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학교를 나간 그는 학교에 오지를 않았다.

시내의 아파트로 입주를 하게 되어 시내학교로 전학을 보냈으나 그는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이들을 도울 수 없는 교사로서 무력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래도 이들이 훗날 생업에 종사하며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마음 속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풀리는 느낌이다.

아마 녀석들도 자식들은 자기처럼 속을 썩이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하기를 바랄 것이다.

학교를 떠난 녀석들이 한때의 방황을 끝내고 힘든 세상이지만 잘 적응하여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