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장사꾼들이 오게 된다.
이는 東西古今을 통한 공통적인 현상이다.
학교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당연히 장사를 하는 분들이 방문하게 된다.
학교의 구성원들이 교사와 학생이니 방문하는 상인들은 당연히 학생이나 교사를 고객으로 삼게 된다.
지금은 학교 지킴이 등이 있어 방문객들을 통제하기 때문에 학교를 출입하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필자가 퇴직하기 전인 2010년 무렵까지만 해도 학교는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할 때 택하는 것은 행상(行商)이었다.
고정점포를 차릴 필요가 없으니 점포를 차리는 데 필요한 자본의 투입이 생략되어 팔 물건만 구입하면 되니
적은 자본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이런 행상이 많았다.
옷감, 약, 낫 등 농기구, 옹기그릇, 떡, 생선 등을 팔러 다니는 행상들이 각 가정이나 마을을 방문하였다.
학교에도 교문에 가까운 등하교 길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꾼들이 물건을 파는 경우가 있었다.
때로는 교실까지 방문하여 물건을 파는 경우가 있었다.
상인들이 교실에 들어오는 경우 교사나 직원이 단속을 하였으나 교문밖에서 물건을 파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묵인하였다.
필자가 중3때 교실을 돌면서 양구 은하사진관의 사진 할인권을 판매한 남자가 있었다.
유창한 언변으로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사진할인권을 팔았다.
그러나 이 할인권을 가지고 사진관에 사진을 촬영하러 간 학생들은 할인권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사진할인권 사기를 쳤기 때문이다.
필자의 선친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셨는 데 가끔 학교를 방문한 상인에게서 물건을 구입하여 오시는 경우가
있었다. 학교 교무실에도 상인들이 방문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교사로 재직하는 기간에도 학생과 교사를 고객으로 하는 상인들이 방문은 계속되었다.
주로 교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진열해 놓고 팔았지만 교실까지 들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교직원 조회시간이나 휴식 시간 등 교사가 교실을 비우는 시간대를 이용했는 데 교사나 직원의 눈에 띄면
대부분 스스로가 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목격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묻지만 대부분 단순한 물품 판매행위였기 때문에
상인이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다.
교사를 상대로 하는 상인들은 당연히 교무실을 방문하였다.
가장 빈번한 방문을 하는 분들은 서점 종사자들이었다.
학기초가 되면 각 교과의 참고서를 들고 교무실을 찾아왔다.
보충수업에서는 특정 참고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참고서의 문제를 편집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복사기가 나오기 전에는 문제를 일일이 베껴 쓸 수밖에 없었지만 복사기가 나온 후에는 참고서를 복사 편집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서점의 경우 오랜기간 동안 지역에 터를 잡고 영업을 해왔기 때문에 교사들과 친분도 생기게 되고 이러한 친분관계는
교재선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교무실에는 수시로 많은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교무실에 출입하는 상인들이 많게 되니 한때 교무실 입구에 "잡상인 출입금지"라는 문구(文句)를 부착하기도 했다.
한번은 서점 사장이 학교를 방문했다.
친분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교감선생님이 사장을 보고 문구를 가르치자 서점 사장은
"저는 잡상인이 아닙디다"라고 재치있게 답변하여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화장품이나 주방용품 등을 파는 상인들은 주로 여교사들을 상대로 판매활동을 하였다.
티셔츠 등 의류 판매상, 인삼을 파는 상인, 영양제와 기능성 식품 등을 파는 상인, 월부책을 파는 상인,
'90년대 후반으로 CD나 음반, 비디오 테잎 등을 파는 상인 등 다양한 종류의 물품을 파는 상인들이 교무실을 방문하였다.
커다른 여행용 트렁크를 가지고 물건을 팔러 오는 상인은 인기가 있었다.
주로 수입용품을 팔았는 데, 트렁크를 열면 백화점을 하나 차릴만큼(?)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나왔다.
면도기 등 위생용품을 비롯하여, 의약품, 기능성 식품, 영양제, 공구(工具) 등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필자도 이분들에게 물건을 산 경우도 있었지만 아내에게 몇번 칭찬을(?) 들은 후에는 학교에 오는 상인들에게서
물건을 사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주로 눈요기를 하거나 물건이 거래되는 것을 구경만 하였다.
사람들이 만남을 거듭하게 되면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교사들과 상인들의 경우도 자주 얼굴을 대하다 보면 친분관계가 생기게 된다.
학교 교직원들을 고객으로 하는 전문적인 상인들은 여러 학교를 방문하며 판매활동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분들은 어느 학교에 누가 근무를 하는지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이번 인사이동에서는 어느 선생님이 어느 학교로 옮겼고, 누가 퇴직을 했고, 누가 건강이 안좋고
어느 선생님의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등의 소식을 이분들을 통해서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겨도 또 이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수십년간의 만남의 관계가 이어지게 된다.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분들도 있게 된다.
사실 학교를 방문하는 상인들에게 필자는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분만에게서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물건을 구입하였다.
까닭은 그분의 딱한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트렁크에 물건을 가지고 와서 파는 분이었다.
이분은 사범학교를 나와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고 한다.
춘천에서 근무를 했는 데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가 미군 트럭에 받혀서 개울바닥에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사경을 헤메다가 다행히 생명은 보존하게 되었지만 교사로 계속 근무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교직원 상대 행상이었다고 한다.
초등에 계시는 사촌형님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형님의 몇년 후배라고 하셨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분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만나면 꼭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고, 동료 교사들에게도 그분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20년이 넘도록 1년에 한두번 물건을 팔러 올 때면 만날 수 있었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분은 60이 넘어서도 학교를 방문하였는 데 전보다 건강이 나빠졌다고 하며 자신을 아는 선후배와 동기들이
대부분 퇴직을 하여 매출도 전과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필자가 퇴직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장사를 그만두지 않았나 추정한다.
기억에 남는 또 한분은 인삼을 팔러 다니는 분이었다.
충남 금산이 생활근거지인 분이었는 데 인삼을 팔러 다녔다.
학교만 방문한 것은 아니고 일반 가정을 방문하면서도 인삼을 팔았다.
학교를 방문하는 상인들에게서 거의 물건을 구입하지 않는지라 인삼상인에게서 인삼을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20년을 넘게 만났지만 물건을 구입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2011년 퇴직을 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화천의 어느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학교에서 인삼을 파는 분을 만났다.
20년이 넘도록 한번도 물건을 팔아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인삼을 사겠다고 하였더니 집으로 인삼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였다.
토요일 오후 집으로 인삼을 가지고 왔다.
점심 식사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중국집에서 점심을 대접하였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분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는 데 며느리는 어린 손자를 맡기고 재혼을 했다고 한다.
손자를 양육하기 위해 인삼행상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동안 손자는 장성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였다고 했다.
그분이 짊어지고 다니던 인삼 보따리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내가 물건을 팔아준 것에 대하여 반복하여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학교를 방문하여 물건을 파는 상인들도 저마다의 생활이 있고 사연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몇분이 있다.
한분은 퇴직하기 몇년전부터 만난 분이었는 데 한번도 물건을 팔아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병에 걸린 아들을 부양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한분은 다른 인삼장사였는 데 이분도 20년이 넘도록 만났지만 한번도 물건을 구입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집으로 인삼을 팔러 왔기에 집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한 적은 있었지만 인삼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는 아들이 경찰관으로 임용되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다른 분에게 들었는 데 인삼장사를 하여 돈을 벌었다고 한다.
금산에도 집이 있고, 대전 시내에도 집을 마련했다고 하였다.
인삼행상을 하며 자식교육도 잘 시키고, 재산도 형성을 하였으니 이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학교를 방문하여 물건을 파는 상인분들도 가정에서는 한 남편이나 아내이고, 자식들의 부모일 것이다.
힘들게 돈을 벌어다가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생활인이다.
필자도 빠듯하게 생활을 하다 보니 이분들에게 인색하였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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