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그때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80년대 후반 여중에 근무할 때다.

새학년이 되어 2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우리반으로 배정되었다.

담임반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히는 데만도 두달 가까이 소요되었고, 피상적으로나마 학생들의 처한 현실과 가정형편을 파악을 하는 데 거의 한학기가 소요되었다.

특히 3월 한달은 새학기 수업, 담임한 학생들의 파악, 담당 업무의 계획 작성과 업무 처리, 교실과 특별실의 환경구성 등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담임을 맡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부실장으로 뽑힌 지윤(가명)이의 1학년때 담임이 나를 부른다.

지윤이의 가정환경이 어려워 작년에 장학생으로 추천하였는 데 장학금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윤이는 활발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성적도 우수한 학생이었다.

새학년이 되어 지윤이는 부실장과 수학부장을 맡게 되었는 데 100% 학급 구성원들의 추천과 선출에 의한 것이었다.

가정환경 조사표를 보니 아버지는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생활정도는 중이었고, 아버지의 학력은 대졸, 어머니의 학력은 고졸이었다.

아직 학생들의 형편을 파악하지 못한 나는 피상적인 기록만 보고 지윤이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이 이해가 안되었다.

지윤이를 불러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음을 알리고 장학금이 지급되면 수령하라고 했다.

지윤이는 정색을 하고 자신은 빈곤 이유로 장학금을 받을만큼 가정형편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나는 먼저 담임 선생님이 생각이 있어서 너를 추천한 것이니 수령하라고 했지만 지윤이의 수령거부 의사는 확고했다.

교감선생님께 지윤이가 장학금 수령을 거부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교감선생님이 지윤이를 불러다가 장학금을 수령하라고 설득을 했다.

지윤이는 울면서 완강하게 장학금 수령을 거부하였다.

지윤이가 교실로 간 후 교감선생님은 당사자가 수령을 거부하니 장학금을 다른 아이에게 돌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씀을 했다.

거의 두학기분 등록금에 해당하는 장학금은 다른 아이에게 지급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났다.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지윤이의 할머니라고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비 부담이 힘드니 지윤이에게 학비의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이야기를 했다.

장학금 수령거부 파동이 일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 데 할머니는 지윤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지윤이가 장학금 수령을 거부하였고, 이유가 장학금을 받아야 할만큼 가난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해서 장학금이 다른 학생에게 돌아갔다고 말했더니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셨다.

지윤이가 적어낸 가정환경 조사서에 아버지는 대졸학력에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고졸이고 가정의 생활정도는 중이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를 했다.

지윤이의 아버지의 학력은 고졸이고 실직상태며, 어머니는 중졸이며 아버지의 실직으로 생활이 궁핍하다고 했다.

나는 혼선이 생겼다.

할머니와 지윤이의 이야기가 너무 다른 것이었다.

그뒤 두달 정도가 지난 5월초 지윤이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족관계, 경제수준, 부모의 학력과 직업, 종교, 주거지역, 교우관계, 취미, 적성 등은 한 사람의 생활양식을 결정짓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학년초 학급에서는 학생의 가정환경 조사를 하게 된다.

담임을 할 학급이 정해지면 전년도 생활기록부를 넘겨가며 기록된 상황(가정환경, 성적) 등을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학생을 이해하고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학생을 대하게 되는 부작용도 있게 된다.

그러나 생활기록부만으로 학생의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다 상세한 가정환경 조사를 하게 된다.

위의 자료와 담임한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면담을 한 것이 기초 지도자료가 되게 된다.

전년도 학급담임이나 교과담당 교사의 언급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말썽을 일으키거나 수업태도 등이 불량한 녀석들에 대해서는 전년도 담임이나 교과 담당교사에게 학생에 대해 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학생에 대해 듣게 되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에 따라 그 아이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이미지는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말썽을 부리는 녀석에 대해서는 녀석에 대해 겪게 되면서 느끼는 부정적인 경험과 다른 교사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 학생을 문제아로 낙인찍게 된다.


지윤이가 장학금을 거부하고 가정환경에 대해 거짓 기록을 제출한 데 대해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답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 데 대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약점을 보이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

그후 교직경력이 쌓여 가면서 지윤이에 대하여 이해를 하게 되었다.

공부를 잘한다고 인정을 받고 있었고, 특히 수학을 잘해서 수학부장까지 맡았고, 리더쉽이 있어 부실장까지 되었는 데 생활형편이 어려워서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가정환경이 어렵다는 것을 담임에게도 말하기 싫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가 벌린 해프닝정도로 생각하고 별도의 상담이나 지도없이 그냥 지나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학을 갔기 때문에 더 이상 그 학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37년간 교직생활을 마치고 퇴직을 한 후 가끔씩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상급자나 동료 후배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제자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 같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평범한 한명의 교사였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후회와 회한이 많이 남는 시간이었다.

처음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할 때 잘 가르치는 것이 교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호되게 벌하였다.

학급관리도 질서가 있고 사고가 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성적향상과 효율적인 학급관리에 중점을 두었지 아이들 개개인에 대해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시골에서 근무할 때는 담임한 학생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부모님을 만나고 가정환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교과연구에도 나름대로 힘을 기우려 과학작품 출품, 현장연구 논문 제출 등에서 약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국가단위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학생들을 지도하여 전국단위 대회에 입상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교직생활을 했다고 반성한다.

제자들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그들이 처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일들을 간과하고 지나갔다.

물론 개별적으로 지도성과를 이룬 경우도 있었지만 담임을 했던 모든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아쉬움이 크다.

60명이 넘는 학급학생들을 일일이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제자들을 이해한다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교과지도와 효율적인 학급관리라는 현안에 밀려서 본질을 망각한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최근 학생들이 자존심을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지도방법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에는 교납금 고지서를 배부할 때 학비 감면대상 학생들의 고지서 색깔이 달랐었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이 배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비감면, 급식비 보조 등 빈곤학생에 대한 지원이 다른 학생들이 알 수 없게 이루어지고 있다.

가정환경 조사에서도 부모의 직업이나 학력 등을 기재하지 않도록 한다는 보도도 본 적이 있다.

학생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열등감을 유발하게 하는 가정환경 조사는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학생의 환경을 파악하지 못하고 깜깜이 지도를 하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지윤이도 이제 40대 중반이 되어 갈 것이고 어쩌면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30여년전 당시 자존심을 손상하게 하였던 일(뒤집으면 열등감을 갖게 했던)이 없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