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은 대략 2000명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필자가 37년간 교사생활을 하며 직접 수업을 통해 만난 제자는 대략 1만명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내가 가르친 제자들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처음 모교에 부임하여 담임했던 제자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의 이름은 물론 그가 사는 마을까지거의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 가르친 제자들의 경우 담임을 했던 경우는 대부분 기억하지만 단순히 수업만 담당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기억에서 지워져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몇십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 있다.
아주 공부를 잘했거나 아니면 대단하게 말썽을 부렸거나 특징이 있었던 제자들의 경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오랫만에 만난 제자들의 경우 자신을 기억해 주면 무척 좋와한다.
몇년전 '80년대 초 시골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담임했던 몇몇 제자들과 연락이 된 적이 있다.
한 제자와 통화를 하면서 수학여행을 갈 때 신청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가기를 희망했으나 좌석이 부족하여 데리고 가지 못해
마음이 아팠었다는 이야기를 했는 데 그 제자는 연말이나 스승의 날에는 꼭 전화로 인사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기억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당시에 마음 속 깊이 각인되었던 일이 아니면 대부분 잊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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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밭일을 하러 갔다가 이웃밭에서 일하시는 분과 커피를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나보다 몇살이 위인 분으로 지방 공무원으로 군과 도에서 근무하며 부군수를 역임하고 퇴임한 분이다.
부군수님이 근무한 곳이 필자가 근무했던 양구지역과 도청이었고 필자의 친구들과 함께 근무하였기 때문에 공통된 화제가 많았다.
오늘은 부군수님 사모님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 데 사모님의 친정 마을이 양구였다.
그 마을은 필자가 잘 아는 마을이어서 친구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 녀석이 친정 손주벌이 된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제자에 대해서 물으니 친정 조카벌이라고 한다.
제자의 근황을 물으니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준다.
오랫만에 기억에 남는 제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나서 깊은 회한에 잠겼다.
약 40여년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학생부에서 생활지도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아직 교직 경력이 일천하였지만 근무하는 학교가 모교라 적성에도 맞지 않는 학생부 업무를 맡게 되었다.
크고 작은 말썽을 부리는 녀석들이 있어 이를 예방하고 적발하고 혼내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경험 부족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엄하게 벌을 주는 것만이 사안을 예방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을 때였다.
엄벌 위주의 지도는 부작용을 일으켜 학부모와 충돌하기도 했고, 한꺼번에 8명이 내 핑계를 대고 가출을 하여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애들을 찾아내라고 소동을 벌리기도 하였다.
고교시절 은사님이였던 교감선생님이 철모르는 제자의 시행착오를 뒷처리하시느라 골치가 아프셨으리라 생각된다.
교내에서는 소소한 도난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버스 회수권을 잃어 버렸다거나 소액의 현금, 책이나 학용품을 잃어 버렸다는 신고가 들어 왔으나
필자의 역량으로는 범인을 찾아내 처리할 수 없었다.
학급에서 자체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 데 범인이 색출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현금이나 값나가는 물건을 잘 간수하라고 전달하여 도난을 예방하라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는 농촌지역이라 장거리 통학생들이 많았다.
버스로 통학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
학교에서는 운동장 한 편에 자전거 거치장을 만들어 비가 맞지 않고 자전거를 세워둘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자전거의 헤드라이트나 발전기 등이 도난당한다는 신고가 계속 들어왔다.
학급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니 전적으로 학생부에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수법으로 보아서는 동일범으로 추정되지만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필자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왔다.
"선생님 W가 계속 자전거 부품을 훔치는 데 선생님은 W가 수학을 잘한다고(당시 필자는 수학을 담당하고 있었다) 봐주시는 것입니까?
아마 다른 학생들이 도둑질을 하였다면 벌써 정학을 주거나 퇴학을 주었을 것입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아마 투서를 한 학생은 필자가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 수학을 잘하는 W가 공부를 잘하니 처벌을 하지 않는다고 항의를 한 것 같았다.
그러나 투서 내용만을 가지고 학생을 불러다가 조사를 할 수는 없었다.
좀더 증거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결정적 제보가 들어왔다. 학생부장이 증거를 확보하여 범인(?)을 찾아내었다.
투서에 나온대로 W였다.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W도 범행(?)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통신문을 보내 학부모를 소환하였다.
그런데 W의 아버지가 맞춤법도 틀리는 서툰 글씨로 쓴 편지를 아이의 편으로 보내왔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W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좋은 일도 아닌 데 학교에서 부른다고 해도 가지 못합니다. 정학을 시키든 퇴학을 시키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히려 난감한 쪽은 학생부였다.
학생부장과 교감선생님과 담임교사와 필자가 협의한 결과 교칙에 따라 1주일 정학처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교장선생님의 결재를 받아 W에게 1주일간의 유기정학을 주고 이를 교내 여러곳에 게시하였다(당시에는 처벌을 하면 이를 게시하였음)
이런 조치를 하고 나서 자전거 거치장에서 부품 도난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모할머니의 시가 친척들이 그 마을에 많이 살아서 이모할머니께 W에 대해 여쭈어 보니 그집 사정을 잘 알고 말씀해 주셨다.
W의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군에 갔는 데 근무지에서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다른 여자를 사귀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 데 그 아이가
W라고 했다.
W의 어머니가 양구에 와보니 엄연히 본처가 있어 아이만 두고 떠났고, W는 본처에게 구박을 받으며 컸고 아버지도 그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고 같이 구박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안되어 필자는 근무하던 학교를 옮겼다.
그러나 후일 이모할머니에게서 W가 말썽을 부려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전과까지 기록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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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방산중학교에 근무하던 '90년대 말이었다.
한 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승용차와 접촉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 데 사고에 대해 물으니 승용차 운전자가 W라고 했다.
고향이 양구이고 가족들과 같이 다니러 왔다가 사고를 냈는 데 중장비 운전을 한다고 했다.
W가 어쨌든 직업이 있고 가정을 이루었다는 데 대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 오랫만에 부군수님 사모님을 통해 친정 조카벌이 되는 W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일을 하는 내내 마음 속에 깊은 아쉬움과 회한을 느꼈다.
W는 분명 잠재능력이 있는 학생이었다.
사춘기에 방향을 잘 잡아주었으면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성장이 순조롭지 못했다.
본처인 큰엄마는 구박을 했고, 아버지도 아들을 지지해 주지는 못할 망정 혹덩어리 취급을 했다.
결국 빗나가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고 그의 타고난 능력을 사장되고 말았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여 방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제자들도 있는 데
색출과 징계만이 아닌 처음부터 W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했었다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물론 충분한 변명거리는 있다. 그 사건 이후 얼마 안되어 필자가 그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그러나 누군가가 관심과 따뜻한 배려를 했다면 W는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휘했을 수 있었을 것이고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뒤에도 필자의 미숙지와 무관심으로 또 다른 W가 생기는 것을 예방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격려의 말에 힘입어 진로를 결정했다는 제자도 있지만 필자가 무관심한 사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였고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37년간의 교사생활은
그저 무탈하게 지났을 뿐 훌륭한 교사는 못되었었다는 것을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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