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종교개혁 현장 순례(2) - 브리스톨, 요한웨슬리의 사역지

 

위키백과에서는 브리스톨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브리스틀(Bristol)은 영국 잉글랜드 서부의 에이번 강에 딸린 항구 도시이다. 하구에서 13의 지점에 있으며 철도도 모여 있어서 교통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 County)에 부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도심인구는 2009년 기준, 433,100명이고, 주변도시인구를 포함하면 1,006,600명이 거주한다. 이는 잉글랜드 지역에서 여섯번째로 큰 규모이고 영국 전체에서는 8번째 규모로 영국 남서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다. 남서부에서 문화, 고용과 교육의 중심지로 도시의 번영은 초기부터 바다와 연관이 깊었다. 무역항인 브리스틀항은 후에 서쪽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브리스틀 도심에 위치했었다.

지금은 미디어, 전자, 항공우주산업이 주요산업으로 도심에 있던 나루터는 문화유산의 중심으로 재개발되었다.“

 

또한 18세기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회심한 후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를 작사한 John Newton이 활동했던 항구가 바로 Bristol이다. 바로 이곳 브리스톨 핸엄마운트(Hanham Mount)는 조지 휫필드에 의해 옥외설교가 시작되었고 그들이 외칠 때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회심을 경험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웨슬리만큼 큰 평가를 받지 못했고 웨슬리처럼 한 교단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근대 부흥 운동의 길을 열어주었다

John Wesley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George Whitefield는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했던 대설교가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만난 웨슬리 형제와 함께 Bristol 지역의 복음사역에 힘썼다.

  

 

브리스톨의 위치

 

 

핸엄마운트 마을

 

 

요한웨슬리의 동역자 

 

George Whitefield

 

 

핸엄 마운트 안내판

  

 

 

요한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다"

 

 

핸엄 마운트에서

 

요한웨슬리(1703-1791)는 영국 링커셔주 에프워스에서 성공회 사제인 새뮤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사이에서 19남매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1720년 옥스포드 대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1725년 성공회 부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728년 사제로 서품받았다. 옥스퍼드에서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와 함께 신성클럽(Holy club)을 결성하여 성서를 읽고 기도와 금식에 힘쓰며 사회적 약자들을 방문하고 돕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735년 미국 조지아로 가던 중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모라비아 교도들의 확신에 참 신앙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결정적 회심을 한 것도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케이트 거리에서 있었던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임에서였다.

 

평생 지구의 열바퀴를 도는 거리 40km를 순회전도하고 4만번의 설교를 했던 요한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신학적 측면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교적 완전함'과 '온전한 성화'를 강조하면서 교리적 정통주의를 떠나 삶의 도덕적 질로 강조점을 옮겼다. 예정론과 관련해서도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반대한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를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여성들을 감리교 운동에 끌어들여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지위를 확립시켰다. 특별히 감리교는 미국에서 서부개척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다.(장신대 박경수 교수의 교회사 클래스에서 인용)

 

웨슬리가 속했던 영국국교(성공회) 내에서도 교구에 얽매이지 않고 설교를 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일은 성공회 사제 James Harvey에 의해 반대에 직면 하기도 했는데 이어 웨슬리는 1739년에 발행한 웨슬리저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사람들은 내게 다른 사람의 교구에서 전도하지 말라고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것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보기에 나는 지금 내 교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함니까?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어디에 속해있든 나는 내 판단으로 만나고 옳은 길을 결정합니다. 나는 구원의 기쁜 소식으 듣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해야하는 빚을 지고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게서 나를 부르신 나의 사역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심을 확신합니다"라고 말함으로 감리교의 세계교구 개념이 시작되었다. 그후 영국국교인 성공회와는 웨슬리가 죽은 후 4년만에 완전한 국교와의 단절을 하고 감리교 역사의 발단이되었다.

 

당시 이곳 브리스톨지역은 노예들의 무역지역이었고 노예들의 수송과 관리감독이 이루어지던 곳인데 웨슬리목사의 노예제도 반대에 대한 숨결이 아직도 남아있는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그토록 커다란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졌는지 그 영광이 다시 한번 한국에도 불타 오르길 기도한다.(양지꽃님의 아름다운 세상 블로그에서 인용)

http://blog.daum.net/seoulpr7555/672

 

찰스웨슬리

형인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다. 새뮤얼 웨슬리와 수재나 웨슬리의 막내 아들이자, 살아 남은 형제들 가운데 셋째인 웨슬리는 1716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했고, 1726년에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을 영시로 번역했다. 1728~29년에 걸친 겨울에 그는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다른 2명의 학부생과 함께 '신성 클럽'을 구성했다. 1735년 그는 조지아로 선교하러 가는 형 존 웨슬리를 돕기 위해 성직 임명을 받았다. 형보다 극단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경향이 심했던 찰스 웨슬리는 신앙적인 절망과 신체적인 탈진으로 불과 몇 달을 못 넘기고 영국으로 귀향했다.

 

형인 존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라비아교도들의 도움으로 영적인 평안을 발견했다. 성신강림대축일이었던 1738521일에 그는 자신이 '하느님과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감리교 신조를 매우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설교자가 되었고 복음의 내용을 찬송가로 옮겼는데, 이것은 복음전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브리테니커 인용)

 

요한웨슬리는 이곳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옥스포드 동문인 휘틀리와의 인연으로 브리스톨에 왔다.

노방전도가 금해지던 시절 웨슬리와 휘틀리는 당당히 사역하였다. 야외전도활동을 하며 성경연구를 할 장소가 필요하여 채플을 시작하였다. 요한웨슬리는 치료의 은사가 있었다. 야초를 이용하여 치유사역도 하였다고 한다.

 

 

 

요한웨슬리의 채플

 

 

강대상 - 예배 중 종종 방해자들이 난입하여 회중석과 격리시키는 구조가 되었다고 한다.

 

 

요한웨슬리가 섰던 강대상 위에서 기도하는 손학균 목사님

 

 

 

요한웨슬레가 타고 다니며 전도활동을 했던 말 에쿠스의 동상 앞에서

 

 

 

웨슬리 채플 앞에서 순례단에 참석한 교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