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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중국쪽 두만강 가에서

아래의 글은 2006년 8월 1일부터 6일까지 강원도 지역 중고교 학생부장 중국연수때 기행문 중에서 발체한 8월 3일 두만강 가에서의 소회를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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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중학교를 견학하고 두만강으로 향하였다.

갈 수 없는 땅, 북한 땅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북녘 산하는 어떤 모습일까? 두만강으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더는 북한의 실상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그녀의 외가가 북한이고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북한 땅에를 많이 가보았고, 최근에도 북한을 자주 다녀온다고 하였다.

해방후 초창기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오갔다고 하는 데 ‘60년대에 중소분쟁이 있으면서 교류가 거의 중단되었다고 한다.

’70년대부터 다시 교류가 활성화되어 연변에서 북한으로는 의류 등이 수출되었고, 북에서는 명태 등 수산물이 중국쪽으로 반출되었는 데 연변 동포들이 북한을 오가면서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북에서는 연변으로 자유롭게 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장사가 잘 되지 않았고 왕래가 뜸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과의 왕래가 빈번하여졌는 데 1994년 북한에서 아사자가 발생하였다는 동포 신문의 보도가 있자 조선족 동포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무한정 도움을 줄 수 없어 동포들도 지쳐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재봉틀, TV 등과 의류 등을 북한 가족에게 보내어 도움을 주고자하는 데 북한 세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뇌물을 쓴다고 한다.

경비병에게 뇌물을 바치면 두만강을 불법 도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16시 30분경에 두만강가에 도달하였다. 이곳부터는 두만강을 끼고 달리는 도로여서 차창 오른편으로 북녘 산하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두만강이 보이는 곳의 오른편에 중국쪽에 있는 펄프공장의 큰 굴뚝이 보였다. 두만강은 오염이 되어 있었다. 북한의 무산철광에서 나오는 폐수와 중국의 펄프공장에서 나오는 폐수가 경쟁적으로 섞여서 두만강을 오염시키며 흐르고 있다고 한다. 두만강 푸른물이라는 말은 노래 가사에나 나오는 옛날의 이야기라고 한다.

 

 

 차창을 통해 바라본 두만강 모습

 

차창을 통해 본 두만강 건너편 북한 마을, 산이 헐벗어 있다.

 

 

차창을 통해 본 두만강 건너 북한땅, 산이 헐벗었고 산사태가 난 곳도 있다. 산비탈 경사면까지 개간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차창 오른 편으로 펼쳐지는 북한쪽의 풍경은 산에 큰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두만강의 중국쪽은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는 데, 북한 쪽은 가파를 산지였다. 산밑으로 펼쳐진 좁은 땅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옥수수 밭과 논이 있고, 철도가 깔려져 있었다.

건너편 북한 쪽에 기차가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역구내여서 徐行을 하는 줄 알았는 데 원래 기차가 천천히 움직인다고 하였다. 가이더는 북한 쪽 기차는 유리를 모두 떼어가서 유리가 없어 비닐이나 나무 판자로 차창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여행을 하려면 여행 허가를 받아야 기차의 탑승이 가능하다고 한다. 여행증이 없이 기차를 탔다가 적발되면 노인도 멱살을 잡혀 끌려 간다고 한다.

기차가 서행을 하니 몰래 타고 내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차창 가까이 보이는 두만강은 한눈에도 오염된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우기라 흙탕물은 이해가 가지만 거품이 떠 있는 것은 오염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두만강은 민족의 애환을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 강을 넘어 조선말 굶주린 동포들이 월경(越境)을 하여 경작을 하였고, 이주를 시작하였다.

또, 일제의 강압으로 고향에서 살 수 없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강을 건넜을 것이다.

강을 건너며 고국땅을 돌아보는 동포들의 회한은 어떠 하였을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는 이용악, 한설야, 강경애, 박경리, 안수길 등의 문학 작품에서 그 시대 간도 동포들의 아픈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민족의 비극을 두만강은 알고 있을까?

 

마침내 버스는 16시 50분에 도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북한 남양시와 마주하는 국경도시로 북한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나는 이 다리를 건너 남양으로 달려 가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 땅인데도 갈 수 없는 피안 저편의 나라였다.

지나가는 길 옆에 중국군 부대 막사가 있었는 데 연립주택형의 좋은 시설이었다.

마침내 두만강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공원이었는 데 시민들이 나와서 두만강을 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단한 어린이들의 놀이 시설도 있었다.

 

두만강에서 뗏목 타기, 뒷편이 필자  

 

우리 돈으로 5000원을 내고 뗏목을 탔다. 4명을 태울 수 있었는 데 사공은 조선족 동포였다.

뗏목은 북한땅 모래사장에서 5m쯤 떨어진 곳까지 가까이 갔다. 물가에 자라는 부들의 이삭, 버드나무, 미루나무, 조약돌 하나까지 셀 수 있는 거리였다.

60세 가량으로 얼굴에는 고생을 한 자취가 역력하였다. 이분은 아버지가 경북 영덕 사람으로 철도원으로 일하다가 도문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평생의 소원이 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것이었는 데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뱃사공의 굵은 주름살과 거친 손에서도 민족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뗏목 위에서 나는 感傷에 젖었다. 급히 편지봉투지를 꺼내어 두만강 저쪽의 북녘땅을 바라보며 떠오른 생각을 아래와 같이 즉흥적으로 써나갔다.

 

두만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북한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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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이 흐르는 왼쪽과 오른쪽의 세계는 왜 이렇게 다를까?

왼쪽 중국 땅에는 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있고, 세끼 밥을 먹고 살고 있다는 데

강건너 북한 땅에는 산에 큰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다.

산기슭, 굴러 내릴 정도로 가파른 곳도 밭이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사태가 나서 산은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산꼭대기에서 한참은 내려와 있는 다락밭은 누가 어떻게 가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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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시 건너편은 북녘땅 남양시다.

뗏목을 타고 강을 오르내린다.

두만강은 우리나라와 중국을 가르며 흐르고 있다.

원래는 우리나라 사이를 흐르던 강인데 왜놈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북녘땅 가까이 뗏목이 다가간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 쉬고 몸을 날려 넓이뛰기를 하면

건너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곳.

엎어지면 코닿을 땅.

조약돌을 한개, 두개, 세 개....

풀을 한포기 두포기, 세포기

셀 수도 있는 데

그곳은 발을 디딜 수 없는 땅

 

꿈 속에서도 그리던 땅이었지만

손으로 흙을 움켜 쥐고 뺨에 비비고 싶지만

땅위에 엎드려 입맞춤을 하고 싶지만

손을 내밀어 짚을 수도 없는 땅

 

내 동포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 땅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훗날

통일이 되면

저 앞에 보이는 땅위에

코를 박고 흙냄새를 물씬 맡으리라.

맨발로

발이 시큰거리도록

흙을 밟아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