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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지, 역사 유적지 탐방

일제의 역사 왜곡 현장 우두산 솟을뫼

일제의 역사 왜곡의 현장 - 춘천 우두산(牛頭山) 솟을뫼 

 

일제가 자신들의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곳 우두산에 가면 묘처럼 생긴 볼록하게 솟아낸 지형이 있다.

이것을 솟을뫼라고도 하는 데 일제가 자신들의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제는 자신들의 신화와 관련성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는 데 이는 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위한 억지이론인 同根同祖論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관련 자료들이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1938년 제 3차 조선교육령을 선포하고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고 강제로 일어를 常用하도록 하였다.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도록 하였다.

修身시간에는 춘천시 우두산의 솟을뫼가 “소시모리”라고 하여 일본신화에 나오는 스나노 오노미꼬도(素戔鳴尊)가 왔었다는 성지라고 하며 한국인은 그 후예라는 同根同祖論을 강조하였다.“

<출처 : 춘천역사문화 연구회 카페(http://cafe.daum.net/history.cc/jU35/275)에서>

 

“『일본서기』의 신대기 상편에 의하면 일본을 개국한 것은 아마데라스오호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みかみ, 天照大神)이었다.

이 여신의 남동생인 스사노오노미고도(すさのをのみこと, 素戔鳴尊)가 한향(韓鄕)에서 살던 곳이 소시머리(소머리 , 牛頭里)이었다고 한다.

일본 학자들은 이 소시머리(曾尸茂梨. ソウシモリ)를 한국말(語)의 소머리, 즉 우두리(牛頭里)로 생각하고 명치시대 이래 한국 전역에서 우두리를 찾는 노력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한 일본학자들은 명치시대에 이미 강원도 춘천에 있는 우두산을 주목하였다.

『조선지명 고(考)』를 쓴 아유가이(鮎貝房之進)씨에 의하면 명치시대에는 曾尸茂梨, ゾウシモリ)로 생각하였다.

<출처 : 카페 백제(http://blog.daum.net/juruseong/2) >

 

일본 최고 神官의 한국 유적 답사기 - 마유미 쓰네타다 일본 야사카 신사 궁사

 

“日 건국신, 백제·신라에서 건너온 흔적 확인”

“여기서 신라국 소시모리라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총독부는 강원도 춘천을 스사노오노미코토의 강림지(降臨地)인 소시모리로 정하고, 그곳에 신사를 세우려 했으나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실현하지 못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춘천이 소시모리이자, ‘기원신(祇園神)’인 ‘우두천왕(牛頭天王)’의 연고지라는 학설이 대세를 이룬다. 또 ‘소도(蘇塗)’는 솟대라는 기둥을 세워 제사를 지낸 터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소’는 고대 한국어의 ‘소우(牛)자’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필자는(마유미 쓰네타다) 2004년 강원도 춘천을 찾았다.

이 지역은 6~7세기경 고구려 땅이었다가 신라의 영토로 복속됐다.

춘천에는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부르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산꼭대기가 자그마한 만두를 올려놓은 듯한 분구형인데,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산(牛頭山)’ 또는 ‘우수산(牛首山)’으로 불린다고 한다.

한국 학자로부터 이 산에 얽힌 전설 하나를 전해 들었다. 목동이 소를 산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풀을 먹였는데, 그 소가 갑자기 분구를 짓밟아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틀 뒤 다시 분구가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솟을뫼(뫼가 다시 솟아났다)’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소시모리’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http://blog.naver.com/sudony/100022007893

 

일본에서 건국신화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춘천 우두산 솟을뫼 모습

 

 

솟을뫼 앞에서 필자

 

 

솟을뫼의 원경

 

 

춘천지역 일본학과 학우들과 함께(2014)

 

 

<위의 답사 보고서는 2014년2학기 일본학과 전근대 한일 관계사 리포트로 제출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