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록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및 원균 장군 휘하에서 전승을 이끌다 전사한 충신이며 시호는 ‘충장공’이다.
1555년에 태어난 한백록은 26세 때인 1580년에 알성무과에 급제하여 진잠현감이라는 관직에 임명됨으로써 고향을 떠나
관리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11년만인 1591년에는 종4품 승진과 함께 지세포(현 거제도)로 옮겨 만호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왜구의 출몰이 잦던 경상우수영에서 수군의 무기와 병력을 통솔하는 업무였다.
한백록이 지세포 만호로 부임한 지 1년만인 1592년에 왜가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함으로써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한백록이 속한 경상우수영의 수장은 원균 장군이었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하는 신세가 되어 전라좌수영을 맡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순신은 본진을 지켜야한다는 명분으로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부하들의 설득에 의해 결국 병력을 이끌고 전선으로 나서게 된다.
마침내 전라-경상 연합군은 옥포에서 왜군과 회심의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한백록 장군은 선봉대에 참여하여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승리라는 엄청난 전과를 만들게 된다.
이어 적진포, 합포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질풍노도와도 같던 왜군의 기세가 꺾이고, 전쟁의 향방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전공을 세운 한백록은 부산첨사라는 새 벼슬로 승진하여 임진왜란 초전에 무너진 경상도 병력을 재건하다가, 전쟁이 다시 치열해지면서 남해군 미조항에서 벌어진 왜와의 해전에 나서게 된다.
이 전투에서 한백록장군은 적의 유탄을 맞고 순절하게 되는데, 적의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선조실록은 전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 그의 시신은 가복으로서 그를 수행하던 노비 득충이 수습하여 한백록의 고향인 춘천 서면으로 운구해와 금산리에 있는 현재의 묘에 매장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을 떠난 지 12년 만에 되돌아온 공의 몸은 비록 시신이었지만 구국의 영웅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한백록 장군은 선조 28년(1605년)에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인조 6년(1628년)에는 가선대부병조참판으로 증직이 이루어졌으며,
영조대인 1751년에는 정려가 결정되었고, 순조11년 1811년에는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백록 장군의 묘는 춘천시 서면 금산리 관음동에 있으며 이로부터 1.5km 떨어진 방동리 당산입구에 정려각과 사당이 있다.
묘와 정려각을 합친 묘역이 지난 2000년도에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됐다. 장
군의 묘 바로 앞에는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운구해온 노비 득충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주인의 묘 앞에 노비의 묘를 만들어 주는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인데, 충신 한백록과 충노 득충의 묘가 나란히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충(忠)의 성지라 불릴 만하다
출처 : 노정서 기자 "임진왜란의 영웅 한백록 장군 재조명 되나?“ Break News 강원.
http://www.2018breaknews.com/sub_read.html?uid=16919§ion=sc137§ion2=춘천
2012. 11. 19.
내륙지방인 춘천에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용맹을 떨친 무신이 배출되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이번 답사를 통해 한백록 장군의 공로를 알게 되었으며 그의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을 깨닫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공신 한백록 장군 묘역 안내문
한백록 장군 묘 앞에서
한백록 장군 묘 원경
한백록 장군 묘 앞에서 춘천지역 학우들과 함께
위의 자료는 방송대학교 일본학과 2014학년도 전근대 한일관계사의 과제물 중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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