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승지, 역사 유적지 탐방

무령왕릉을 다녀 와서

1. 답사 동기

 

우리 세대의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부부는 여행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못하고 젊은 시절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2박 3일의 짧은 신혼여행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 부부는 1993년 1월 초 모처럼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사학과를 가는 것이 고교 시절의 꿈이었을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에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할 때까지 가졌던 몇번의 만남도 국립박물관, 국전관람, 경복궁, 비원, 창덕궁 등 문화재가 있는 곳에서 가졌던지라 결혼을 하고 20년이 가깝도록 여행을 위한 여행을 거의 못했는 데 모처럼 가는 우리 부부의 여행 계획은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던 부여와 공주 등 백제 문화권으로 정하였다.

일정은 신혼여행의 첫날을 보냈던 온양에서 일박하고 장항선을 타고 군산을 경유하여 아내의 고향인 전주에서 하루를 묵고, 부여와 공주를 경유하여 여동생이 사는 대전에 들렸다가 다음 날 춘천으로 오는 3박 4일로 정하였다.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여행을 위한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고 중학교 시절에도 가정 형편으로 수학여행을 따라가지 못하였던지라 마음이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처럼 마음이 무척 설레었다.

 

2. 부여와 공주의 유적지 및 박물관 답사

 

1993년 1월 20일 춘천을 떠나 17년만에 신혼여행때 첫날을 보냈던 온양에서 일박을 하였다.

다음 날 장항선을 타고 군산을 경유하여 아내의 고향인 전주에서 일박을 하고 부여로 향하였다.

부여 국립 박물관에를 들렸다.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인지라 박물관에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전시된 유물은 너무 빈약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너무 철저하게 파괴를 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여는 금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있는 지역으로 강을 통한 물자의 수송이 유리하였고 강과 주변을 둘러싼 산은 천연의 요새가 되어 방어하기가 유리하였고 또,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호남평야의 곡창지대는 나라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물산을 공급할 수 있을만큼 풍부한 곳이라 백제의 수도로는 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화암을 가보았다. 굉장히 높은 절벽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생각보다 낮은 강가에 있는 절벽이었고 고란사도 교과서에서 상상하였던 것보다는 작은 규모의 절이었다.

이곳에서 삼천 궁녀가 투신을 하였다고 하니(그 숫자는 물론 과장된 것이지만) 비장한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망하게 되고 적에게 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백제의 여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하여졌다.

백제의 흔적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성왕때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130여년간 수도였었는 데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은 너무 빈약하였고, 남아있는 유적도 경주에 비하면 그 규모가 너무 초라하였다.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에 자리를 잡아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찬란한 문화가 꽃피웠고,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일본에게 선진 문물을 전하여 줄 정도로 융성하였던 백제가 흔적조차 거의 남지 않고 철저히 파괴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

 

부여를 떠나 공주로 향하였다.

공주 박물관을 관람하였는 데 무령왕릉 출토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무령왕릉 출토 유물이 없었다면 공주박물관은 아주 초라한 지역 박물관이었을 것이다. 공주 역시 문주왕때 천도하여 와서 성왕때 천도할 때까지 60여년간 백제의 수도였는 데 박물관의 유물도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제외하고는 빈약하였고, 유적 역시 경주와 비교할 때 초라하였는 데 이는 도읍기간이 짧았던 것도 원인이 되지만 나라가 망한 후 철저한 파괴때문으로 생각된다.

공산성이나 송산리 고분군은 그나마 공주 백제 시대를 말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3. 무령왕릉 답사

 

가.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과 구조

아내와 나는 유명한 무령왕릉을 가보기로 하였다.

1971년 발굴되어 당시 신문에 대서 특필이 되었던 무령왕릉, 발견되는 대부분의 무덤들이 도굴된 것이지만 도굴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령왕릉은 빈약한 백제의 문화재를 보완하여 주어 백제 문화연구에 한 획을 긋게한 획기적인 유적인 것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고분을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아내와 나는 무령왕릉으로 향하였다. 무령왕의 원래 릉은 보존을 위하여 폐쇄하고 모형릉을 관람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갔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출입구가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처럼의 기회인데 모형릉이 아닌 진짜 陵을 관람하자고 아내를 데리고 무령왕릉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陵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학자들로 보이는 정장을 한 사람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설명을 하던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고 잠시 멈칫하였으나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10년전의 일이라 기억이 안나는 부분이 많지만 발굴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 중 한 고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고분이 도굴이 되지 않은 처녀분이라는 것이 유력하여지자 학계의 관심은 커졌고 즉시 발굴 조사단이 구성되어 발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 소식을 들은 신문, 방송 기자들이 몰려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 왔는 데 기자들은 빨리 발굴하라고 독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발굴에 대한 원칙도 지키지 않는 졸속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황급히 무덤을 뚫고 무덤 내부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바깥의 공기가 갑자기 무덤 내부로 유입되어 유물의 손상이 컸다고 하였다. 현장에 대한 충분한 사전 조사와 연구, 발굴 계획이 없이 행하여진 졸속한 발굴은 이로 인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비판을 듣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우리 부부는 21년전에 직접 왕릉을 발굴한 고고학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고학자는 이어서 무령왕릉의 특징에 대하여 설명을 계속하였다.

왕릉은 벽돌로 쌓아서 만든 고분으로 벽돌의 재질은 1000℃가 넘는 온도에서 구워진 벽돌은 오늘날의 벽돌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하였다. 또, 방의 귀퉁이에 등잔을 켜두었던 곳이 있는 데 등잔 불을 켠 후 무덤을 밀폐시켰기 때문에 등잔 불이 타면서 무덤 속의 산소를 소모하여 무덤 속은 산소가 부족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유물이 오랫동안 양호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설명을 하였다.

 

모조릉이 아닌 진짜 무령왕릉을, 그것도 발굴했던 학자의 직접 설명을 들으며 견학했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기뻤다.

일반 관람자들은 모조된 릉만 볼 수 있었는 데 무령왕릉 속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었다는 것만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전에 전혀 정보를 알지도 못하고 온 우리가 22년전에 발굴을 주도한 당사자에게 직접 현장에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아마 비전문가로 우리 부부와 같은 행운을 경험한 사람도 극히 드물 것이다.

 

다른 자료를 보충하여 무령왕릉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무령왕은 백제 제 25대 왕으로 재위년도는 501년에서 523년 사이였으며 62세로 승하하였다. 무령왕은 일명 사마왕이라고도 하였으며 일본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왕은 동성왕 말년에 일어났던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재확립하는 한편, 고구려의 외침을 막아내고, 신라 및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외교를 강화하는 등 웅진 천도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여 백제가 중흥을 이룰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무령왕릉의 구조는 송산리 6호분과 같이 벽돌로 축조한 터널형 전축분으로 직사각형 현실의 남쪽 가운데에 현실로 들어가는 짧은 연도가 달렸다. 연꽃무늬, 인동무늬, 마름모꼴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를 아름답게 새긴 벽돌을 각기 그 쓰일 위치에 알맞게 갖가지로 만들어 길이모 쌓기와 작은모 쌓기로 반복하면서 쌓은 현실의 벽 5곳에는 등잔을 놓았던 높이 24㎝의 보주형 등감이 있고, 등감 아래에는 창을 배치하였다. 현실의 크기는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가 2.72m, 바닥면에서 터널형을 이룬 천정까지의 높이는 2.93m이다. 발굴 당시 왕과 왕비의 시신을 안치했던 목관이 현실 바닥에 동서로 놓여 있었고, 현실 내부와 연도에서는 금제관식, 팔찌를 비롯한 각종 금은제 장신구와 무기류, 도자기 등 108종 2,906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에 이른다. 능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그 왕비였으며, 축조 연대를 명확히 알려주었던 2장의 석판으로 된 묘지(지석)는 연도 입구 가까이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령왕릉의 부장품은 중국 양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물론, 일본에서 건너 온 것도 있었고 타이제로 추정되는 적색의 유리 구슬도 있는 등 당시로서는 가히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도굴의 위기를 넘긴 무령왕릉

한편으로는, 무령왕릉이 정말로 무덤이 축조된 후 다른 사람이 침범한 일이 없는 처녀분인가에 대하여서는 이론도 있다.

이도학(2000)은 무령왕릉의 유물이 도굴되지는 않았지만, 무덤안의 부장품들이 흩으러진 모습과 목관이 부서져 있고 관목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것, 연도 중앙에 있는 진묘수(鎭墓獸)의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져 있는 점과 합장된 왕비의 어금니가 30대 여인의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무덤 속에 누군가가 침입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원인을 신라의 김헌창의 난때 사망한 김헌창을 암매장하였는 데 그 시신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추정하고 있다.

무령왕의 사후 그의 무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무령왕릉은 그 후에도 또 한번 도굴당할 뻔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공주고보의 교사로 재직하였던 가루베 지온은 전문적으로 백제의 고분을 도굴하던 자였다고 한다. 그는 1933년 송산리 6호분을 도굴하기도 하였는 데 그는 봉분이 남아있는 유구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무령왕릉을 전통적인 四神思想에 입각하여 인위적으로 쌓은 6호분의 주산으로 오판하였기 때문에 도굴의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무령왕릉은 이러한 위기를 거치면서도 도굴되지 않아 오늘날 우리에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찬란한 백제의 문물을 전해주게 된 것이다.

 

4. 백제 문화권 답사에서 느낀 감회

 

부여와 공주를 답사하며 느낀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문화유산이 너무 빈약하다는 아쉬움이었다.

만약 무령왕릉이 발굴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도굴된 채로 발굴되었다면 백제의 문화재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한 채 우리에게 더 큰 아쉬움과 회한만 가져다 주고 있을 것이다.

나라가 멸망한 후 철저한 파괴에 의하여 문화유산이 거의 사라지고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어 많은 부분을 수수께끼 속에 묻어 두었던 백제 문화는 무령왕릉의 발굴로 우리에게 수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백제 문화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였다.

무령왕릉의 발굴 의의로는 백제왕릉으로서는 최초로 주인공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또 많은 유물을 간직한 채 고스란히 발견되어 무령왕릉의 발굴 조사는 백제 문화 연구에 전환점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있다.

이 글을 마치며 나는 지금은 폐쇄되어 들어갈 수도 없는 무령왕릉에 직접 들어가서 발굴자에게 발굴과정 및 陵의 조성과정과 구조에 대하여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기적같은 행운을 지금도 기쁘게 생각한다.

 

1993년 1월에 무령왕릉을 다녀 왔는 데 위의 글은 2004년에 고쳐 쓴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