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80년대 말인가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방에 사는 동포들(고려인)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다 보니 이주 2, 3세대는 우리말을 잊어버리고 현지에 동화되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도 김치와 국수 등 우리 음식을 좋와하는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첫돌을 맞이하는 아기들의 돌잔치에서 하는 돌잡이라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 말을 거의 못하는 2.3세대도 돌잡이를 하는 데 아기가 책이나 연필을 잡으면 좋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북한에 대해 소개하는 '남북의 창'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북한의 어느 가정의 설풍습이 방영되었는 데 어린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우리가 절을 하는 것과는 달리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데 "5점 만점의 최우등생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세배를 하는 것이었다.
또 방학을 맞아 집에 온 학생에게 부모가 성적이 나쁘다고 꾸짖는 장면이 나왔다.
아무리 공부를 가지고 닥달을 하는 우리나라도 설날 "올백(모두 100점)을 맞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 데,
공부를 잘하는 것이 우리나라만큼 성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닌데 공부를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와 북한, 해외동포 모두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하는 것이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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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함께 입시경쟁이 치열하다.
'60년대만 하여도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했다.
명문중학교를 몇명이냐 합격시키느냐를 가지고 초등학교 교사의 자질을 판단했다.
'60년대 중반 당시 강원도의 명문인 춘천중과 춘천여중에 시내보다 더 많은 학생을 합격시킨 시골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과열 입시경쟁이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을 저해하자 1968년부터 중학교 평준화가 연차적으로 시행되었다.
중학교가 무시험이 되어 초등학교 학생들의 입시 부담은 해소되었지만 경쟁은 고등학교 입시로 옮겨졌다.
명문고를 진학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고, 과외가 성행하였다.
1974년부터 고등학교 평준화가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다음해에는 광역시 단위로 '79-'80년에는 도청소재지까지 시행되었다.
중고교의 평준화로 입시경쟁이 완화되어 초, 중학교에서는 학습부담이 경감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74년 교사로 임용되고 보니 이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가를 실감하였다.
고등학교는 물론 대입이 있어 입시준비에 전력을 기우렸지만 중학교도 학력제고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몰아붙였다.
중학교에서는 학력고사(시기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라는 것을 보았다.
도내 또는 시군내 중학교들이 같은 문제지를 가지고 시험을 치러 평균을 내어 학교간 비교를 하는 것이었다.
1년에 두번 정도 도단위 학력고사를 보았고 시군에서 주최하는 학력고사도 몇번 있었다.
학력고사 일자와 진도가 공시되면 학교는 그때부터 비상이 걸린다.
빨리 진도를 확보하고 문제풀이 수업을 하게 된다.
여러 유형의 문제들을 많이 풀어보게 하는 것이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수업을 하기 전에 진단평가, 수업을 한 후 형성평가라는 것을 하여 학생들의 문제풀이 능력을 테스트한다.
성적이 기대에 미달되는 학생에 대한 강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성적이 기준치에 미달되는 학생들에게 물리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종아리를 맞거나 벌숙제를 하는 등의 제재가 가해졌다.
아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학력고사 준비는 하나의 광풍(狂風)이었다.
아침 자율학습부터 시작해서 매시간 문제풀이와 매타작(아이들의 표현)이었다.
아침 8시부터 자율학습을 시작으로 저녁 늦게까지(겨울에는 17시, 여름에는 18시까지, 학교에 따라서는 야간까지)
하루 종일 교실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학생들도 고생이지만 교사들의 고충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육과정보다도 더 편성된 시수의 수업을 해야 했고,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지도까지 해야 했으니......
학력고사를 보면 즉시 채점을 해서 당일로 과목별 학급별 학년별 성적이 나온다.
연구과에서 집계한 성적은 통계를 내어 교감과 교장에게 보고된다.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교사들의 표정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기대 이상의 성적이 나온 경우는 안도한 모습이 성적이 기대에 못미친 경우는 근심스로운 표정이 나타났다.
다음날 교감선생님은 이웃학교에 전화를 해서 성적 결과를 알아본다.
교감의 책상에는 학교별, 학년별, 과목별 평균을 기입할 수 있는 표가 있어 전화로 주고받은 성적을 기입한다.
이것을 본 교사들은 희비가 엇갈렸다.
연구과에서는 성적 통계를 교육청으로 보고하고, 시군교육청에서는 학교별, 학년별 교과의 평균 성적 통계를 내려 보낸다.
성적이 뒤처지는 학교는 비상이 걸린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성적이 나쁜 교과의 담당교사는 교감선생님이나 교장선생님에게 질책을 받거나 아니면 평가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도나 시군 교육청 장학사들은 학교장에게 성적을 올리라고 독려를 하였다.
학교별 성적을 비교하여 이것으로 학교장을 평가하니 교장선생님들의 고충도 컸을 것이다.
결국 교사들을 독려하게 되고, 교사는 학생들을 들볶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전설이 된 이0호 장학사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검정고시를 통해서 여러 과목의 자격을 획득하신 분이다.
책을 많이 읽었고, 책을 저술하기까지 한 박학다식한 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중고교 교사를 했는 데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스파르타식으로 엄격한 지도를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그 선생님의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분이 장학사가 되어 학력 향상의 전도사 노릇을 했다.
도에서 각 학교의 성적을 통계내어 이를 가지고 일선 시군 교육청이나 학교를 방문하여 성적 향상을 독려했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이 장학사님이 불시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고3 교실에 들어가서 학습방법을 침을 튀겨 가며 열심히 설명하였다.
다음날 장학지도를 하고 강평을 한 후 교사들과 회식을 하는 자리였다.
그분은 자신의 교육관을 이야기했다. 많은 독서와 연구에 바탕한 것이라 막힘이 없이 거의 한시간을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분이 열정이 넘치는 나머지 말을 가리지 않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필자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공개석상에서 성적이 낮은 교사를 질타했다고 한다. 질책을 받고 눈물을 흘린 교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83년 정선군내 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농어촌과 탄광촌 학교라 성적이 저조했다.
강원도의 학력 저조 학교에 관내 학교 절반 이상이 포함되었고 이는 강원도 전체 학력 저조학교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이장학사가 교육청에 교감들을 소집해서 회의를 주관했다고 한다.
공식 회의가 끝나고 성적이 저조한 학교 교감들만 따로 불러서 얼마나 호되게 나무랐는지 불려 들어갔던 교감들은 주눅이 들어서 나왔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감선생님이 교육청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셔서 주임교사들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였다.
필자의 중3때 담임선생님이 당시 사북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하셨는 데 설때 선생님께 세배를 가자 "이 장학사가 그런식으로 하면 안되는 데...."라고 하셨다. 사북중학교는 학력 저조학교에 해당이 되지 않아 선생님은 불려 들어가지 않으셨지만 밖에서 그런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다.
이 장학사님은 그후 교육감이 바뀌고 교장으로 승진을 하였는 데 얼마나 잘하는지를 보겠다고 벼른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주 지역 여건이 나쁜 학교에 부임을 하였는 데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근무를 하다가 퇴임을 하였다고 한다.
이분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일화가 지금도 강원도 교육계에 전설로 내려오지만 교사시절 수업에 대한 열정
전문성 제고를 위한 노력, 엄청난 독서와 박식함, 학력향상에 대한 열정(비록 시행이나 표현 방법에 문제가 있었지만)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 편법의 사례도 나타났다. 드물지만 성적을 조작하는 경우도 있었고(필자가 근무한 학교에서는 없었음),
시험지가 잘 보이지 않는 경우 학급을 순회하면서 문제를 읽어 주면서 슬쩍 힌트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학교간 교사를 교환하여 감독을 하거나
표집이라고 해서 교육청 장학사나 직원이 나와서 한 학급을 선정하여 직접 감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의 경우도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똑같은 방법으로 같은 열의를 가지고 수업을 했는 데도 어떤 때에는 지역내에서 상위권의 성적이, 어떤 때는 바닥권의 성적이 나왔다.
좋은 성적이 나왔다고 칭찬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성적이 나쁘다고 심한 질책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과학과목을 원리와 개념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친 것보다는 문제풀이를 잘하도록 지도한 것이다.
나 역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였을 뿐 더 나은 교육을 위해서 이를 거스릴 용기와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위에서 말한 점수 경쟁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암기와 문제풀이 위주로 배웠고 그렇게 수업을 해왔기 때문에 학생이 주도하여 참여하는 수업을 시행하지 못했다.
물론, 실험을 많이 한다거나 시청각 자료, ICT 자료들을 활용한다거나 하는 등의 수업을 시도하였지만 교사 중심의 수업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교사 중심의 수업은 단시간내에 학습목표에 도달하거나 성적을 올리는 데는 좋은 방법이지만 학생들을 피동적으로 만들어 스스로의 문제해결능력을 신장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요즈음 페이스북을 하면서 후배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는 흥미있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교사 중심의 수업을 탈피하지 못한 것이 교직을 떠난 이후에도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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