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정부 수립후 처음으로 국장을 지낸다고 장례기간 내내 온 나라는 애도 분위기였다.
장례가 끝나고 정국은 요동쳤다.
12.12사태가 일어났지만 이것이 초래할 정치적인 파장은 시골에 사는 평범한 교사는 알 수가 없었다.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동생이 있는 교감선생님은 가끔씩 고급 정보를 말했다.
교감선생님은 三金은 차기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했다.
12.12사태로 앞날을 예측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수 국민들은 三金 중 한분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헌문제로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다.
권력 구조가 핵심이었다. 대통령 중심제, 이원집정부제 등 수많은 안들이 나왔다.
국회와 정부가 각각 개헌을 추진한다고 했다.
봄이 되자 서울에서는 학생들 시위가 일어난다고 했다.
지지부진한 개헌작업과 민주화 일정이 지연되는 데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유신통치기간 동안 억눌렸던 주장들이 간헐천의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북에서 광원들이 시위를 일으켰고 학생들의 시위는 격화되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 속이었다.
당시 젊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무언가 불안했다.
5월 18일 비상계엄령이 내려지면서 마침내 최악의 상황이 닥쳐 왔다.
김대중씨가 체포되고 김종필씨 등 공화당의 수뇌부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갔다.
김영삼 총재가 연금되었다고 했다.
신문, 방송 등이 계엄군에게 장악되고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낼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가 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이 며칠이 지나서야 보도되었다.
무질서, 간첩, 독침 등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광주민주화 운동이 진압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기관이 설치되고 전두환장군이 상임위 부위원장이 되었다고 했다.
대통령은 허수아비가 되고 군사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언론이 군사정권에 장악되면서 TBC 방송이 문을 닫고 기독교 방송이 뉴스보도 기능을 상실하고 문을 닫는 신문사들이 있었고
수많은 언론인들이 줄줄이 해직되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갔는 데 그해 여름은 이상했다.
덥지를 않았다.
서늘한 여름이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여름방학을 했다.
8월 초순 학교에 공문이 왔다.
새마을 교육이 있는 데 내가 차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춘천의 공무원 교육원에 가서 5박 6일(월-토) 새마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 교육원에 들어가 보니 강원도 전체에서 300명이 넘는 교사들이 교육을 받으러 와있었다.
모두 교육복을 지급받았다.
누런 색의 새마을 복장과 새마을 모자였다.
1주일간의 집단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구호를 위치고 구보를 하고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시간에는 강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새마을 이론에 대한 강의, 새마을 운동의 수범 사례 등이 VTR이나 슬라이드 등을 통해 교육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새마을 교육이 아니었다.
새마을 교육을 하면서 정치 세뇌 교육이 이루어졌다.
벌써 3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국보위 설치 배경', '김대중 사건의 전말', '광주사태의 진상' 등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육 내용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하하는 내용이었다.
"김대중씨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고 김씨의 첩으로 들어가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낳은 아이가 김대중이라는 것이었다."
김대중의 경력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 데 생각나는 것은 없다.
유신 체제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박대통령이 시해된 후 민주화가 되기를 바랐지만 전두환의 쿠테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데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터라 세뇌교육시간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새마을 교육에서는 성공한 새마을 지도자들의 녹화 강의가 있었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경남 어느 지역의 여성 새마을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분이 상이용사의 재취로 들어가서 술주정뱅이었던 남편을 감화시키고 자신은 불임수술을 하고 전실 자식들을
돌보며 새마을 운동을 하여 마을을 변화시켰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중간 중간 휴식 시간이 있었다.
하루 종일 딱딱한 일정에 따라 진행되는 일과 중에서 그래도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었다.
휴식시간에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정치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에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잡혀갈 것이 분명하니 서로 입조심을 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가서 분임토의를 시작하기 전 시간이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두번째 날이었을 것이다.
어느 선생님이 "강릉상고 김X림 선생님의 EDPS 강의가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인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선생을 소개한 사람이 김선생을 보고 일어나라고 했다. 김선생은 엉거주춤 일어섰다가 그냥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를 아는 다른 교사들이 김선생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을 했다.
김선생은 마지 못해 일어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는 데 EDPS는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음담패설의 약자였다.
김선생의 이야기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얼마나 우스웠든지 모두가 허리를 꺾고 웃었다.
젊은 시절 친구들끼리 모이면 음담패설로 분위기를 돋구곤 했었다.
음담패설은 비판 받을 일도 있지만 경직된 분위기를 완화시켜 주고 긴장을 이완시켜 주는 기능도 있었다.
그뒤 김선생의 EDPS 강의(?)는 저녁 식사후 분임토의가 시작될 때까지 분임원들의 강요에 의해 이어졌다.
저녁 식사후에는 분임토의 시간이었다.
주제를 정해주고 토론을 하여 조별로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분임 토의 주제는 "학교에서 새마을 교실의 활성화"라는 것이었다.
전에 필자가 근무하던 병설 고등학교에서는 여름 방학 중에 주민들을 모아 새마을 교육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 데 학교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새마을 교육의 실천방안에 대한 내용이었다.
군의 내무반처럼 꾸며진 숙소였는 데 20명 정도가 우리 분임이었던 것 같다.
저녁마다 분임토의를 하였고 주제에 맞는 의견이 집약되어 갔다.
분임장과 서기가 선임되었었는 데 분임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서기가 내용을 정리했다.
금요일에 발표를 하는 데 목요일이었다.
최종안이 채택되고 발표자는 가장 젊은 필자의 후배가 맡기로 했다.
ppt가 없던 시절이라 괘도를 만들어 발표를 했는 데 어느새 괘도도 일목요연하게 작성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연수성적은 승진에 반영된다고 했다.
분임별로 등수를 매기고 분임 안에서 역할에 따라 성적이 부여된다고 했다.
당시에는 경력이 일천하였기 때문에 승진에는 관심이 없었는 데 몇몇 선배 교사들은 신경을 썼던 것 같다.
후배인 박선생이 지휘봉을 잡고 괘도를 넘겨 가며 설명을 했다.
그런데 중간에 키가 크고 몸이 뚱뚱한 C중학의 사회 교사인 제선생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발표를 하는 후배에게 그렇게 발표를 하면 안된다고
일갈을 하는 것이었다.
제선생은 경남 출신이었는 데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이희성 장군이 초등학교때 담임을 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도 해방후 대구의 어느 중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했다고 했는 데 아마 이희성장군도 잠시 초등학교 교사를 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제선생은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후배인 박선생의 지휘봉을 빼았아 차트를 넘겨 가며 자신이 발표를 하며 이렇게 발표를 해야 한다고 시범을 보였다. 아마 제선생은 자신이 발표자가 되어 좋은 성적을 받아 승진에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이 발표자로 선정이 되지 않자 발표자가 되기 위해 돌출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자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C고의 역사 선생이 제선생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을 규탄했다. 둘 사이에는 설전이 벌어졌다.
우리 분임에 입회했던 교관(공무원 교육원의 일반 공무원)이 이런 분임토의는 처음 보았다고 얼굴을 붉히면서 크게 화를 내었다.
발표 연습장은 살벌한 분위기가 되었다.
다음날 발표시간이 되었다.
각 분임에서는 분임조에서 토론되어 집약된 새마을 교실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우리 분임 차례가 되었는 데 박선생은 국군의 날 분열에 참가하는 군인들이 걷는 동작으로 걸어나가서 거수경례를 하였는 데 동작이 너무 경직되어 우스운 모습을 하는 바람에 발표장에는 폭소가 터졌다.
나중에 보니 우리 분임의 성적은 맨 꼴찌였다.
토요일에 교육을 마치고 퇴소를 하였다.
며칠 만에 집에 와 당시 8개월된 큰 딸을 안아주려 하자 낯을 가리며 외면을 했다.
며칠 떨어져 지냈다고 아빠 얼굴을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이렇게 새마을 교육과 정치교육이 뒤섞인 이상한 교육은 끝났다.
나는 새마을 운동의 순수성이 이때부터 크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박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주창할 때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조, 근면, 협동이라는 구호 아래 잘살아 보자는 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가 의식개혁이나 마을 환경 정비 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면도 분명히 있는 데 이 운동이 정치에 이용되며 변질되어 五共비리의 하나로 조사를 받게 되고 마침내는 이름만을 남긴채 역사의 場에서 그 효능을 상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후 언론인의 대량 해고, 광주에서의 유혈사태, 삼청 교육 등은 군사정권의 과오와 오점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군사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하고 선동적이라고 몰아냈던 정치인들 대부분이 정치 현장에 복귀하였고 후에 三金 중 두분은 대통령을 지냈고
한 분은 총리를 지내는 등 화려한 부활을 했다.
반대로 부패한 정치인과 언론인을 추방한다고 서슬 퍼렇게 날을 세웠고, 사회를 정화한다고 온 나라를 얼어붙게 했던 전두환 전대통령은 쿠테타와 부패의 혐의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재산을 몰수 당하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1980년 여름은 미국 서북부의 워싱턴주 세인트헬렌스 화산의 폭발로 생긴 미세한 화산먼지가 한반도 상공을 덮어 태양광선을 차단해서 서늘했다. 민주화의 열망을 짓밟은 군사쿠테타의 억압으로 얼어붙은 정국은 그해 여름을 더욱 서늘하게 했다.
필자가 근무하던 곳의 골짜기와 해발 고도가 높은 곳의 논들은 낮은 기온으로 벼가 여물지를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서리를 맞았다.
수확이 전무한 논도 있어 퍼런 벼를 베어다가 소먹이로 주는 농민들도 있었다.
그해 쌀농사는 사상 최대의 흉작을 기록하여 많은 양의 쌀을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다.
1980년 그해 여름은 서늘했다.
미국에서 폭발한 화산의 미세한 화산먼지가 한반도 상공을 덮어 태양빛을 차단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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