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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아찔한 학교 안전사고(1)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물론 예전에 안전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소 교내 시설물 관리나, 학생들의 생활지도, 교외 활동 등에 있어서 안전에 대한 점검과 교육을 실시하여 왔고 강조하여 왔다.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학교장 책임이기 때문에 어떤 교장은 교외활동을 억제하고 통제하기까지 한다.

 

과거 학교 건물이 낡고 관리가 잘 안되던 시절에는 시설물로 인한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필자가 교사로 재직하던 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사고를 재구성하여 본다.

이것이 단순한 회상에 그치지 않고 이 글을 읽은 후배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1. 학교 시설관리 소홀로 인한 사고

 필자가 첫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학교는 중학교 건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고등학교 건물은 개교시 지은 건물로 20년 정도된 건물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건물이 부실공사로 지어진 것이어서 시설에 문제가 많았다.

유리창을 밖으로 내밀어 여닫을 수 있는 구조였는 데 창틀이 부실이어서 부주의하면 밖으로 떨어지기 쉬웠다.

한번은 학생이 밑으로 지나가는 데 창틀이 떨어졌다.

다행히 학생의 몸이 창틀 사이로 빠져나가 큰 사고는 면했다. 만약 창틀 모서리가 머리에 부딛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사고였다.

 

전기 누전은 화재 등 여러가지 사고의 원인이 된다.

같은 건물에서 일어난 일이다.

비가 오는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형에게 우산을 전하려고 중학교에 왔다.

그 어린이는 난간대를 잡고 계단을 올라오는 데 난간대에 누전된 전기가 흘러 감전이 되었다

그 아이는 울고 있고, 마침 지나가던 다른 학생이 어린이를 난간대에서 떼어내어 무사했다. 생각만해도 아찔한 사고였다.

 

운동장에 세워놓은 시설물도 때로는 흉기가 된다.

내가 담임한 녀석 중에 현근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내성적이고 애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학기초였다. 아마 3월말이나 4월초쯤으로 기억된다.

현근이 녀석이 운동장에 가서 놀다가 종소리가 들리자 급히 교실로 뛰어왔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토사가 휘날렸다.

흙바람이 불어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는 데 녀석은 급하게 교실을 향해 뛰어 오다가 핸드볼 골대 모서를 들이받았다.

핸드볼 골대는 철제였는 데 모서리의 마감작업을 잘하지 않아 날이 서있었다.

녀석은 모서리에 부딛치며 이마가 찢어졌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내가 담임인지라 현근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승용차를 가진 선생님이 없고, 119를 부르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녀석을 리야카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급히 이마의 상처를 소독하고 여러바늘을 꿰맸다. 열상을 입은 상처를 바늘로 꿰매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마취도 안한 상태에서 상처를 꿰매니 녀석은 굉장히 아팠을 것이다.

 

초여름이었다.

학교 창고에 사용하지 않는 입간판을 떼어다 보관하고 있었다.

학교 시설을 안내하는 입간판이었는 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입간판은 벽에 기대어 놓았는 데 입간판의 돌출부에서 도약을 하면 대들보를 잡을 수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 애들은 창고에 가서 걸쳐져 있는 입간판의 돌출부에 서서 타잔의 흉내를 내며 뛰어 올라 창고의 대들보를 잡은 놀이를 했다. 돈만이 녀석도 다른 아이들처럼 창고에서 타잔 흉내를 내며 놀았다.

그런데 돈만이가 타잔의 흉내를 내며 뛰어 올라 대들보를 잡으려다가 놓쳤다.

착지를 할 때 균형을 잡아야 하는 데 대들보를 잡는 것을 놓치며 미처 균형을 잡아 착지를 하거나 손으로 땅을 짚을 준비를 해야 하는 데 순간적인 일이라 그대로 땅에 닿으며 손으로 땅을 짚었지만 충격으로 팔꿈치의 뼈가 어긋나며 위골이 되고 말았다.

같이 놀던 녀석들의 신고를 받고 달려가 보니 위골된 모습이 역력하였고 녀석은 고통을 참느라 얼굴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담임은 아니었지만 생활지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라 리야카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동네 병원에서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춘천으로 가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초임교사 두달치에 가까운 치료비가 나왔다.

생활이 어려운 돈만이의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서 치료비 선처를 호소했다.

녀석은 외가와 인연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촌수는 멀지만 외가댁 어른이었다.

마침 입원했던 도립병원의 원무과 직원 중 양구 출신이 있어 힘을 써 치료비를 절반 정도 경감을 받았고

학교에서 남은 돈의 절반 정도를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아 보태 주었다.

그후에도 이모님을 뵈러 명절때 양구에 가면 돈만이를 볼 때가 있었다.

화물차 운전을 하며 생활하고 있는 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볼 때마다 타잔 흉내를 내다가 다쳤던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

 

 

어느 여자중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아마 9월쯤의 일로 기억된다.

점심시간에는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 앉아 밥을 먹는 데 한 아이가 친한 친구와 같이 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옮겨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의자 상판이 떨어져서 분리가 되는 것을 몰랐다.

그 학생이 의자를 밀치며 앉으려는 데 상판이 어긋났고 이것을 모르고 앉던 여학생은 의자의 상판을 고정시키던 못에 질(膣)을 찔려 출혈을 하게 되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을 하여 지혈을 시키고 상처를 봉합하는 큰 수술을 해야 했다.

그 여학생의 아버지가 당시 교감선생님의 옛 제자여서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학교에서 시설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일어난 어이없는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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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생들의 활동 중 안전사고

 중학생들은 굉장히 활동적이다. 발달단계로 볼 때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여서 가만이 있지 못하는 시기다.

선생님의 눈길만 미치지 않으면 실내에서도 애들은 뛰어다니기도 하고, 레슬링과 같은 장난을 하기도 하면서 논다.

몸을 부딛히며 놀다보니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게 된다.

초임학교에서의 일이다. 재호라는 녀석은 공부도 잘하지만 굉장히 활동적이고 장난이 심한 녀석이었다.

당시 한 학급에 70명 가까운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어 그야말로 콩나물 교실이었다.

좁은 교실에서 애들은 책상을 건너뛰며 장난을 했다.

재호 역시 책상을 건너뛰며 친구와 장난을 하다가 책상 모퉁이를 헛디디며 공중재비로 나가떨어졌다.

문제는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부딛히며 바닥으로 떨어졌는 데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분수처럼 뻗혔다.

애들이 교무실로 부축을 해서 데리고 오고, 담임 선생님이 급히 지혈을 하며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는 119 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라 10분도 더걸리는 거리를 걷거나 아니면 자전거에 태워서 데리고 갔을 것이다.

재호는 이마를 몇바늘 꿰매야 했고, 시골 병원에서 거칠게 치료를 해서 이마에는 꿰맨 자국이 계급장처럼 선명하게 나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어이가 없는 사고도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었다. 애들은 식사를 끝내고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애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한녀석이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서 교실쪽으로 난 경사로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 속력을 내지 않았고 보통의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90도 방향에서 한 녀석이 앞을 보며 뛰어가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경사로를 따라 자전거로 올라오던 녀석의 자전거와 앞으로 달리던 녀석이 부딛쳤다.

둘다 앞만 보고 갔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리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고 단순히 부딛힌 사고로 넘어졌던 녀석이 일어나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뛰어가던 녀석이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현장에 가보니 다리가 부러졌는지 주저 앉아서 일어나지 못하고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학교에 보고를 하고 학생을 리야카에 싣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의외로 녀석이 많이 다쳤다고 했다. 허벅다리의 뼈가 골절되는 중상이었다고 했다.

춘천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역시 상당한 치료비가 나오는 데 다치게 한 학생이나 닥친 학생 모두의 집이 워낙 어렵다고 했다.

당시에는 학교 안전공제회도 없었고, 의료보험도 없었을 때이니 치료비 부담은 난감한 일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휴직을 하고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그후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한다.

나중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교사를 통해 소식을 들었는 데 치료비의 절반 정도는 학교에서 성금을 모아 보태 주고

절반 정도는 본인이(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담 비율은 알 수 없지만) 부담했는 데 자전거를 탔던 학생은 치료비를 물어주고

경제상황이 어려워 학교를 자퇴했다고 했다.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후에도 소소한 안전 사고들이 있었고 큰 사고도 있었고 아찔한 경우도 있었으나 다행히 크게 다친 경우는 없었고, 내가 직접 행정적 책임을 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 안전사고에 대한 보도를 볼 때마다 예방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