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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을 찾습니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된후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말이 유행되었다.

공부를 하는 것이 가난을 벗어나는 길이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는 방법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근대화 초기부터 모든 국민이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소수의 깨인 생각을 가진 분들만이 배우는 것이 신분상승의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근대화 초기 선각자들은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쳐서 무지함에서 깨우치고 앎을 통해서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1890년대부터 1900년도 초기에 전국적으로 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져서 교육이 활성화되었지만

일제는 조선 백성이 깨우치는 것이 식민통치에 저해가 됨을 인식하고 철저한 우민화 정책을 썼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실권을 장악한 후 일제는 사립학교의 설립에 대한 법을 고쳐 설립조건을 까다롭게 하였다.

이로 인해 재정이 열악한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민초들의 교육열에 찬물을 끼어얹었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각급학교의 수업연한을 단축하고, 학교 설립을 억제하였다.

심지어는 초등학교까지 입학시험을 보아 선발함으로 교육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3.1운동후 일제는 억압적인 무단통치의 한계를 하였다.

초중등학교의 수업연한을 연장하고 학교를 신설하였다.

각도에 공립 인문계 고등학교(당시는 고등보통학교라고 지칭)를 설립하였는 데 도청소재지 이름을 딴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이 시기에 개교하였다.

고등교육기관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는 등 민중들의 교육열망을 일부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입학정원이 극히 적었다.

적은 선발인원에도 일본인 학생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경성제대는 초기 200명의 입학정원 중 조선인 학생은 1/3 내외였다고 함)

조선 백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해방이 되며 억눌렸던 교육열이 활화산처럼 분출하였다.

교육을 통한 빈곤탈피와 신분상승이 목적이었다.

유교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고시합격이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과 같게 인식이 되었다.

교육을 받는 것만이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인식한 것이다.

해방후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 되었고, 해방후 혼란기와 6.25전란을 겪으면서도 학교의 신설과 학급증설은 계속되었다.

해방후 10년이 못되어 수십개의 대학이 개교하였다.

군단위마다 적어도 1개 이상씩의 고교가 설립되는 등 괄목할만한 교육의 양적확대가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며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우렸다.

남녀차별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당시에는 초등교육를 마친 딸들이 공장에 취업을 하여 밑의 남동생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부모의 헌신과 자신의 교육기회를 희생한 누나와 형의 뒷받침으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여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

 

이 시기가 '50-'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초중반에 중등교육을 받은 필자의 세대에는 가난한 집안 학생들 중에도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 상당히 많았다.

소득에 따른 학력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던 시절이다.

필자의 동기생들을 보면 입지전적인 친구들이 꽤많았다.

물론 고등학교 진학율이 30-40%밖에 안되던 시대에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정의 지원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적이 좋은 친구들도 많았다.

친한 친구인 박명각군은 어려운 가정형편이지만 서울대 사대 물리교육과에 진학하였다.

4년간 한과목을 제외한 전과목을 A학점을 취득함으로 한동안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누나의 도움을 받아 약대에 진학한 친구도 있고, 시골출신으로 사관학교에 들어간 친구도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친구들이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대학에 입학하여 힘들게 학업을 마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여 신분 상승의 사다리에 올랐다.

 

필자가 처음 교직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농촌에서는 가난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4개 학급이 있었는 데 한 학급만을 제외한 3개 학급의 Top들이 가난한 집 학생들이었다.

필자가 첫담임을 하였을 때 1등을 한 학생은 어머니가 채소행상을 했고, 다른 반 학생은 아주 산골에 사는 가난한 농가의 자식이었고

다른 한명은 홀어머니가 빗자루를 매어다 팔아 공부를 시켰다. 한 학생만이 집이 넉넉하였다.

'75년에 전교 1등(250명에서)을 한 학생은 집이 어려워서 선생님들의 춘천의 명문고 입학권유를 뿌리치고 전액 국비인 금오공고로 진학했다.

 

'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상황이 변하였다.

'85년 춘천여중에 부임하였을 때의 상황은 달랐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 대부분의 가정환경이 좋왔다.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들의 대부분은 가정환경이 열악했다.

그래도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더러는 있었다.

춘천중학교에서 근무하던 '90년대 초의 상황은 더욱 달랐다.

한번은 어느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장학재단에서 장학생 추천 의뢰가 들어왔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장학재단답게 장학생 지급 액수가 꽤 많았다.

성적이 상위 1%안에 드는 학생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장학생으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

대상학생 네명 중 가장 가난한(?) 학생이 부부교사의 아들이었다.

어쩔수 없이 이 학생을 추천하였다.

아직 사회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독지가나 기관, 장학재단 등에서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지급대상 선정을 요구함으로 학교측에서는

대상학생 선발에 곤란을 겪었다.

이때 장학생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경제적인 도움이 아닌 그 자체가 명예가 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학을 담당하던 정선생이라는 여교사가 있었다.

정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여상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여 수학교사가 되었다.

교사와 공무원으로 재직하는 몇몇 친구들이 친목 모임을 결성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공부했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을 돕자고 뜻을 모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정선생에게 대상학생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요구 조건은 성적이 상위 10% 이내에 드는 학생으로 다른 장학금을 받지 않는 학생이었다.

3학년 담임들이 이런 학생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정선생에게 기준을 낮추어 달라고 당부를 해서 15%선에서 겨우 한 학생을 선정할 수 있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형배는 성적이 상위권 학생인데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겠다고 희망하였다.

담임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하자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을 갈 형편이 못되고 조기취업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업계 고교에 원서를 제출했는 데 이 소식을 들은 형배의 두 형들이 학교를 방문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이 동생을 대학까지 공부를 시킬 것이니 실업계 학교의 지원을 취소해 달라고 했다.

이미 원서가 접수되었고 마감이 되어 취소가 불가능하였다.

단 한가지 방법, 면접에 결시를 하여 불합격이 되면 인문계 고교에 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형배는 결시를 하여 실업계 고교에 불합격을 하고 인문계 고교에 진학을 하였다.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을 했다고 하였다.

 

'93년에 모교였고 첫부임지였던 양구중학교에 다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이미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비록 농촌소재 학교이지만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대부분 가정환경이 좋왔고 부모의 교육열도 강했다.

그후 다시 춘천의 시내 학교에서도 근무하고 시골학교에서도 근무하였지만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찾기는 아주 어려웠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후의 혼란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신분 사회가 해체되고 사회적 변동이 이루어지던 시대가 지나고

안정된 사회가 되었다.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계층 이동이 차차 어려워졌다.

공부를 잘하여 명문학교에 진학하고 이것을 발판으로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전문직으로 진출하여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계층 상승을 하던 사다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정녕 지난 것일까?

이제 사회적 지원망은 단순히 극빈층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여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는 것만의 단계를 넘어야 한다.

가정의 경제력에 좌우되지 않고 재능과 능력이 있는 학생들에게 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복지 사회의 실현 방안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 가능하여질 때 진정한 복지사회가 구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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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記  : 이 글을 쓰고 곰곰이 생각하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중학교 1학년때 우리반에서 1등을 했던 W가 2학년이 되면서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그 친구에 대해 관심이 없이 지나갔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그를 만났다. 왜 학교를 떠났느냐고 하자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관계로 부모가 별거하게 되어 어머니를 따라 산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다닐 수가 없었고, 수없이 학교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마음이 아팠다.

고등학교때 S라는 친구는 전교 1등을 한적도 있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는 데 역시 집안형편 때문에 고3이 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자퇴하였다. 마지막 1년을 버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초등학교때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누님이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아버지께서 거절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공부를 정말 하고 싶었던 많은 분들이 학비 문제만 지원이 되었다면 배움의 꿈을 접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