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까치 글방)"이라는 책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김호동교수가 저술한 책이다. 저자는 주로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있으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유목사회의 구조, 이슬람 1400년" 등의 저서를 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인하대학교에서 연수를 받던 때이던 2003년 여름 인하대학교 구내서점에서였다. 김양선목사님이 불국사에서 돌십자가와 마리아상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고 사진을 본 적이 있었으며, 우리나라 교회사를 저술한 분들은 경교(네스트리우스파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 가능성을 언급한 일이 있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는 서방교회인 로마카톨릭을 개혁하여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방교회 관점에서 교회사를 배웠으며, 다른 한 줄기였던 네스트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쫒겨나서 동방으로 가서 중국까지 전파되었다는 정도의 피상적인 지식밖에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호동교수의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라는 책은 기독교의 또 다른 한 갈래인 네스트리우스파가 어떻게 이단으로 몰렸으며, 동방을 향해 나갔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과 중국에까지 전파되었고, 어떤 고난과 박해 속에서 소멸되어 갔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몽골 초원에서 십자가의 깃발이 휘날렸고, 초기 元제국의 황실 여인들 중 네스트리우스파 신자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징키스칸의 막내 며느리인 베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그의 아들인 몽케와 쿠빌라이는 몽골의 황제가 되었으며 셋째 아들 홀라구 역시 후일 일칸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홀라구가 바그다드를 침략하였을 때 교회당에 피신한 기독교 신자들은 안전할 수 있었는 데, 이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도 있지만 그의 아내인 도쿠즈 카툰이 기독교를 믿던 케리이트족 출신으로 독실한 신자였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몽골제국에는 또한 고위직으로 진출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
경교의 유래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끝나고 신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네 차례의 공의회가 열리며(325년 니케아, 381년 콘스탄티노플, 431년 에페소스, 451년 칼게톤) 맹렬한 신학적 논쟁이 있게 되었다. 이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기독론'은 합의를 도출하여 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파문을 당하여 쫒겨 나게 되었다.
431년 에페소스의 공의회에서 네스트리우스는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433년 정치적 이유로 동로마제국 황제는 파문을 확정지었다. 네스트리우스파 사람들의 "예수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가지 본성과 그것을 나타내는 두가지 인격체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이단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를 비판했던 유티케스가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단성단체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단성을 검증하기 위해 451년 칼게돈에서 4차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이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해서 "서로 상이한 그러나 뒤섞이지 않은 채 통합된 두개의 본성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라고 규정하는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교리가 확정되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뚜렷이 구별하기 힘든 두 주장의 차이가 한 쪽을 이단으로 규정지어 서방기독교에서 축출한다. ------------------------------------------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사건 이후 처음 기독교 신자들은 다수가 유대인이었으나 차츰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 갔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에데사는 2세기경 최대의 기독교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가 끝난 후인 4세기 후반 페르시아계 사산왕조의 왕인 샤르프에 의해 대대적인 박해를 받아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만도 1만 6천명이나 되는 순교자를 내었다. 이후 다시 기독교의 세력이 회복되었으나 446년 야즈게르드 왕 시대에는 15만명이 순교하는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박해를 통해서도 기독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확대되었다. 5세기 후반 동로마제국은 제국내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추방하자 497년 사산왕조 내에 있는 주교들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파라는 독자적인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기독교가 중앙아시아로 전파된 최초의 기록은 196년에 나타나며 5세기말 중앙아시아 지역이 유목민 사회에까지 전파되게 된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전달해 주는 중개자 역할을 하며 포교를 하여 갔다. 타슈겐트 부근에서 6-8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네스토리우스 십자가가 함께 새겨진 화폐가 발견되었는 데 이는 어떤 도시의 군주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7세기 - 8세기 경의 것으로 보이는 시편 1편을 필사한 필사본이 사마르칸느 지역에서 발견되는 등 중앙아시아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교
경교는 마침내 중국의 당나라에까지 전파된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도 배운 '대진경교 유행 중국비'라는 이 비는 명나라 말 중국 서안에서 발견되었는 데 이 비는 네스토리우스교가 처음 전파된 635년부터 비문이 새겨진 781년까지 중국에서 기독교의 전모를 말해주고 있다. 이 비문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데 교리의 내용, 역사적 경과, 비석 건립 연유에 대한 설명이다. 경교 교리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오! 참되고 고요함 속에 항상 계시며, 태초가 있기 전에 시작도 없이 계시는 분, 신령과 공허 속에 오묘히 계시며, 종말이 있은 뒤에도 신비스럽게 존재하시는 분, 신묘한 힘을 발휘하사 창조를 이룩하시고, 지고한 권능으로 뭇 성자를 만드신 분, 그가 바로 우리의 삼위리체 신묘하신 분, 시작이 없으신 참된 주님 알라하(阿羅訶)가 아닌가. 十字를 나누어 사방을 정하시고, 원초의 바람을 고취하여 두 기운을 일으키셨다. 어두운 공허함이 바뀌어 천지가 열리고, 해와 달이 우직여 낮과 밤이 생겼다.
만물을 빚어 만드신 후 최초의 인간을 세우시고, (그에게) 특별히 선량하고 조화로운 성품을 부여하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 원초의 성품은 겸허하여 오만하지 않았고, 소박한 마음은 본래 욕심을 바라지 않았다. .............................
이에 우리의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밝은 존자(景尊) 메시아(彌施訶)께서 (자기의) 참된 권위를 숨기신 채, 사람과 똑같이 세상에 나오셨다. 천사가 기쁜 소식을 알리고, 동정녀(室女)께서 대진(大秦)에서 성인을 출생하셨다. 밝은 별이 그 상서로움을 고하니 페르시아인들(波斯)이 그 찬란함을 보고 와서 선물을 드렸다. ..............................
교리 부분의 마지막은 예수가 죽은 뒤 그 가르침의 전파와 경교 사제들의 생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경전은 27권이 남았는 데, 커다란 변화(元化)를 설명하여 신령의 빗장을 열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덧없는 가식을 씼어내고 소박 순결하게 했다. 그 표지로 십자를 들어 사방을 두루 비춤으로써 차별없이 모두를 통합했다. 목판을 두드림(擊木)은 자비와 은혜의 소리를 퍼지게 하기 위함이요, 동쪽으로 예배를 드림은 생명과 영광의 길을 모으게 하기 위함이고 .......
진리의 길은 오묘하여 이름하기 어려우나 그 효용은 밝고 빛나니, 억지로 칭하여 경교(景敎)라 하는 것이다.
위에서 경전 27권은 신약성경을 말한다. 경교의 교리의 핵심은 서방의 정통교단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 양성설을 그대로 받아 드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전교활동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핵심적인 관념을 도교나 불교의 용어를 차용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인들의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이점이 있었겠지만 당대에 전래된 기독교를 중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불교나 도교의 아류 정도로 인식하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게 되었고 세속권력에 대한(당나라) 의존은 경교의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
중국에 경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635년이었고 그 해 아라본이 이끄는 사절단이 중국 장안에 도착하여 당나라 황제의 영접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3년 후 조칙이 내려져 포교가 인정되게 된다. 이는 경교의 교리가 천하에 유포되어도 마땅하다는 판단도 있었겠으나 외국의 문물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던 당제국의 정책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경교를 서쪽으로 갔다는 노자의 가르침이 경교가 되어 돌아온 것으로 보는 당나라 황실의 견해도 뒷받침이 되었다(당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도교의 창시자 노자가를 당의 황실로 추앙하고 있었음)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경교도 박해를 받았는 데 698-699년 측전무후때와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인 713년에 박해가 있었다. 그후 현종때 다시 경교가 중흥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유교, 불교, 도교와 습합현상과 당나라 황실과 밀착관계가 경교의 쇠퇴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경교는 중국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는 데 이는 광범위한 민중을 개종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경교는 중국인들의 선교를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중국 토착민들보다는 외지인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 머무르고 말았다.
경교의 경전을 보면 불교와 도교의 용어를 차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예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파란 글씨는 위의 내용에 해당하는 성경구절이다.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보시할 때에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라. 예배를 드릴 때에는 다른 사람이 듣거나 보고 혹은 알지 않도록 하라. 일신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실 때를 기다려 예배를 드리라."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의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도,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 같이 되지말라....." ====================================================
중국 경교의 쇠퇴
당의 무종황제때(845년)에 대대적인 폐불이 단행되어 불교와 경교 등이 큰 탄압을 받았으나 박해는 단기간에 끝났지만 신자나 사제들 중에는 당을 떠나 변경지방으로 이주하여 내몽골이나 서역지방의 경교가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당시 승려의 수로 계산할 때 경교의 신자는 최소한 4만명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불교나 도교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로 대중적 포교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교의 신자는 페르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다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번 위축된 중국의 경교는 다시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는 데 이는 중국을 내왕하는 상인들이 이슬람교도들로 바뀌었음에 기인한다. 즉, 중국내에 경교의 인적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987년 중국의 기독교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이미 중국의 기독교는 거의 소멸되어 있었다.
실크로드와 경교
중국의 경교는 거의 소멸되었지만 내몽골의 상황은 달랐다. 이곳에서는 경교가 명맥을 보존하고 있었고 많은 개종자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중앙아시아와 접촉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이슬람 세력보다 앞서서 오아시스 주민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이는 실크로드를 무대로 활약했던 국제상인인 소그드인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에도 꾸준히 내륙 교역로를 통해서 중앙아시아와 북중국을 오갔으며 도처에 상업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들 상인들 중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이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현지주민과 긴밀하게 접촉하며 선교흘 하였던 것이다. 10세기 후반 이래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부지역에서 경교가 활기를 띈 것은 중국에서 집단으로 탈출한 경교도들의 활동에 힘입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그드 상인들의 발길은 실크로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으로도 진출하여 교역을 하며 이들을 개종시켜 몽골제국이 출현하기 전에 네스토리우스교는 이미 초원 여러 곳에 견고한 발판을 만들었고 유목민들의 수령의 결정에 따라 집단적인 개종을 한 집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케레이트나 나이만, 웅구트와 같은 유목집단들이 대거 기독교를 받아 들이 게 되었고 초원위에 십자가가 서게 되었다. 13세기 초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 초원에 살던 많은 유목민들 사이에 네스트리우스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두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황후들과 황족들 사이에서도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이 많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종교정책은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어느 특정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를 지원하였다. 흥미있는 것은 몽골의 황제가 기도교, 이슬람, 불교, 도교 등의 성직자를 불러서 토론을 시킨 일들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1260년 元의 쿠빌라이가 티페트 출신의 불승 파스파를 국사로 임명하고 불교에 편향됨으로써 몽골의 종교는 라마교화되게 된다. 몽골제국의 기독교도들의 신앙도 십자가가 하나의 주술 도구화되고 성경구절이 주문화되게 되는 등 변질된 사례도 많이 보고되고 있다.
몽골제국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었고 이들 중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대도시에도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건립되게 되었다. 마르코플로의 동방견문록에 언급된 것을 보더라도 중앙아시아에서 천산남로를 거쳐 중국 북부로 들어 오는 실크로드 교역로에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이 있었으며 이들 기독교의 거점은 웅그트족이 거주하는 몽골 지역을 거쳐 중국 본토로 이어진다. 네스트토리우스파 교도들은 만주지방까지 진출하였다.
만주지방의 기독교도는 12세기초 요와 금의 교체기에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28년 만주 안산의 한 고분에서 11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십자가들이 여러개 발견되어 기독교도들이 이곳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한반도에도 네스토리우스교의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네스토리우스교 신자가 몽골의 고려지배시 고려에 와서 머문 기록도 있다. -----------------------------------------------------------------------
꺼져 가는 불꽃
칸국의 보호를 받던 시절에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번영하였으나 이슬람을 믿는 칸들의 탄압을 받게 되고 무슬림들의 박해로 대학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14세기말 티무르에 의한 서아시아 침공과 무차별적인 주민학살은 네스토리우스 교단에 치명타를 가하였다.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몰락은 서아시아에서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도 퇴조하고 있었다.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은 중국문화에 동화되어 종교적 활력을 잃어 갔다. 또한 14세기에 유행한 페스트는 중앙아시아에 산재해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공동체에도 치명타를 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티무르의 등장과 정복전은 오아시스 교역로를 통한 교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네스토리우스교단의 신자들의 존립을 어렵게 하였고, 이슬람교도의 탄압 역시 네스토리우스파의 몰락을 가져 오게 하였다. 중국의 경우 원을 이어 明의 건국으로 중국에서의 터전도 사라졌다.
14세기 중반과 후반에 걸쳐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지배층의 냉담, 무슬림들의 박해, 흑사병의 창궐, 끊이지 않는 전쟁, 교역의 중단 등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넘는 수난으로 1천년간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활동했던 경교는 사라져 갔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하여 포교활동을 하던 마테리오리치는 중국내의 기독교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가 호남성 개봉부 등에 십자가를 숭배하고, 식사시 성호를 긋는 등 기독교적인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으나 만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몽골의 경우 元이 명에게 망한 후 분열된 몽골족을 15세기 후반 다얀칸이 통합하였는 데 그의 부인이 기독교도였다. 그러나, 1578년 알탄칸이 티베트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몽골인들에게 개종을 강권하면서 기독교는 소멸되어 갔다.
십자군 전쟁시 그렇게 열망하였던 사제왕 요한은 동방의 기독교왕국의 왕이었는 데 그는 서구인들의 희망대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스트리우스파 교도였던 몽골 부족의 수장이 와전되어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낳게 된 것이다. ====================================================
산만하게 책의 내용을 소개하였다. 내용이 방대하여 제대로 소개하기가 어렵지만 우리가 믿는 서방기독교인 카톨릭에서 유래된 개신교회 이외에도 이단으로 파문되었던 네스토리우스파 교단(경교)가 있었고 이들 역시 수많은 박해를 거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국과 몽골에까지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어쩌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에 전도를 하기 위해 토착종교의 용어와 개념을 차용하였고, 그 문화에 동화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한계도 보았다. 또한 정치권과 지나친 밀착은 보호하였던 정치세력이 사라질 때 종교도 같이 쇠퇴하는 운명을 맞게 된 것도 알 수 있었다. 외부와 교류가 있을 때 경교는 유지되고 발전되었지만 외부와 교류가 중단될 때 쇠퇴하고 만 것도 알 수 있었다. 무슬림의 박해와 전염병, 교역로의 쇠퇴 등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사라지게 된 원인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는 미국에 소수가 있고, 이란에 소수가 남아 있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류 기독교회에서는 벗어난 소수파가 되고 말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선교의 방법이 어떤 것이 최선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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