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그을린 살갗이여
내움에 흘린 눈물이여
꺼져가는 불꽃과 같이 사라져 가는 나의 꿈이여
타고 남은 재처럼 흩어지는 소녀때 희망이여
불빛이 마지막 멈추는 두벽 사이에 너와 마주 앉아
성냥개피를 쪼개며 그려보던 상념이
거대한 현실의 괴물이 되어 내앞에 다가선다.
기울어진 흙벽의 공간 속에서
막내가 잠들 때 먹다 남긴 우유를 빨며
지방분 빠진 윤기없는 살갗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밑을 향하고 천정을 향하고 엄마를 향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잠자는 아이들의 숨결을
희고 검은 희미한 TV 화면에 연주되는
드볼작 「신세계」음악 소리와 함께
내 마음 속에 희망의 교향악이로다.
1983. 1. 12. 23시에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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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은 아내와 내가 결혼한지 7년이 되는 때다.
일곱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들과 다섯 살난 딸과, 나이로는 두 살이 되었지만 아직 돌을 두달 남긴 둘째 딸 이렇게 세 아이가 있을 때다.
방학을 맞이하여 춘천 집에 와 있을 때다.
당시 춘천 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흙벽은 기우러지고 군데군데 벽은 흙이 떨어져 나가 외를 엮은 것이 드러나 있고. 비오는 날에는 지붕에서 샌 물이 천정을 적셔 물방울이 떨어지고, 때로는 천정에서 쥐들이 운동회를 하곤 했다.
방학때 집에 오면 아내는 매일같이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부뚜막에 연기가 나와 부엌은 곰굴이 되곤했다.
아마 아내는 아궁이에서 타들어가 재가 되는 땔나무를 보며, 아궁이에서 역류해 나오는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재처럼 사그라진 소녀시절의 꿈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내와 친했던 혜영씨와 다방에 앉아서 성냥개비를 쪼개며 상념에 잠겼던 것을 회상한다.
불을 때고 벽이 기우러진 방안에 들어와 잠든 아이가 먹다 남긴 우유를 먹으며 각각 다른 방향으로 누어 잠자는 아이들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
방에 들어와 틀어놓은 TV에서는 드볼작 교향악 ‘신세계’가 연주되고 있다.
아내는 이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희망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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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내가 출타한 동안 아내가 집안을 정리하다가 책갈피 속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잊혀졌던 글을 찾아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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