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보낸 서신 잘 읽었다.
역사는 일직선만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고 물과 같이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는 것 같다.
5.16 쿠테타가 일어날 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
혁명공약 6개 조항을 암기해야 했다.
군정이 실시되었는 데 어렸을 때니까 어떤 의미였는지 잘 몰랐고..
'63년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박정희 장군이 당선되었지.
고등학교에 들어 가던 해에 한일회담이 조인되었는 데, 나는 일본에게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굴욕적으로 체결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선배들이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일으키고 우리들을 몰아붙여서 교실밖으로 나가 교문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선생님들이 도열해서 막아서 다시 교실로 돌아갔고, 강당에 전교생을 모아 교장선생님의 설득성 훈화가 있었고 3일간 휴교를 했지.
당시만 해도 선생님들의 권위가 있어서 누구도 선생님들의 저지선을 뚫고 나갈 생각을 못하고 교실로 돌아갔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을 못할 일이지.
교장선생님은 강당에 우리를 모아놓고 자신도 광주 학생 운동때 참가를 했다고 하면서 데모보다는 공부를 하라고 설득을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정치의식이 생겼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달았지.
국어선생님이 신문 사설을 일고 문단을 나누고, 내용요약을 하고, 전체의 논지를 파악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나는 동아일보 사설을 가지고 공부를 했는 데 이것이 아마 나의 정치의식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67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지.
양구에 사시던 외할머니가 집에를 오셨는 데 춘천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세가 있어서 동원되어 나오셨다가 우리집에 들리셨다고 하셨다.
나는 관권을 이용해서 청중을 동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선거 결과 박대통령은 윤보선 전대통령을 압도적인 차이로 물리치고 재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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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6월엔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였지.
막걸리 통을 쌓아 놓고 입후보자가 유세를 하였다고 흥분한 친구도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기사들이 나왔고.....
부정선거의 결과 공화당은 2/3가 넘는 의석을 석권하였지.
전북과 어디인가는 야당이 한명도 당선되지 못하였지.
강원도에서는 원주 한 곳이 야당인 신민당이 의석을 차지했고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신민당이 도마다 1-2석을 얻는 데 그쳤지. 175석 중 공화당이 130석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기억난다.
선거때 가장 큰 관심사는 김대중씨의 당선 여부였지.
박정희 대통령은 사람보는 눈은 있었던 것 같아.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국무회의까지 개최를 했었다.
개표날 (당시는 TV가 보급되어 있지 않아 라디오로 개표방송을 들었음) 학교에서 공부하던 우리들 몇이 라디오로 개표방송을 들었었다. 김대중씨가 당선된 것을 친구들과 함께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공화당의 국회의원 부정선거('67. 6. 8)에 대해 대학가부터 규탄 시위가 일어났지.
하루는 선배들이 찾아와서 다른 고등학교는 데모를 하는 데 너희는 왜 침묵을 지키느냐고 선동을 하고 갔지.
정의감에 불타던 우리는 한번 밖으로 나가자는 의견이 오갔지.
나는 장난삼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문을 써서 친구에게 보여 주었지.
그 친구는 우리반 애들 앞에서 격문을 읽었고 애들은 나가자고 외치고...
데모를 할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것은 아니고 장난삼아 쓴 글이 선동문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적지않게 겁을 먹었었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몇몇이 데모를 모의하다가 선생님들에게 적발되어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했어.
만약 시위가 일어 났다면 장난삼아 격문을 쓴 나는 주동자가 될 뻔했었지.
대학 시험에서 한번 낙방을 하고 일년을 허송하다가 서울 사립대를 갈 형편은 못되고 서울대는 실력이 모자라고 또 떨어진다는 것이 두렵기도 해서 부득이 지방 국립대로 진학하게 되었어.
‘68년 갑자기 생긴 예비고사를 치르고 거의 경쟁이 없이 ’6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였지.
그해 삼선 개헌 이야기가 나오고, 야당인 신민당의 격렬한 반대와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은 국회 별관에서 날치기 통과가 되고 국민투표를 하여 2/3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삼선개헌(대통령이 세 번까지 할 수 있다는)이 통과되었지.
야당에서는 전국적으로 개헌 반대 강연을 다녔는 데 그때 김영삼 의원(후일 대통령)을 처음 보았어.
당시 김영삼 의원은 사십대 초반의 젊은 의원이었고 연설도 잘하고 국회에서 여러번 원내총무(지금의 원내 대표)를 역임하며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었고 김대중 의원과 더불어 대중적 인기가 높았었어.
개헌 찬반 투표 전에 대학을 휴교시켰는 데 휴교 조치가 되고 나서도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를 갔었다.
휴교 다음날의 일이었던 같다. 도서관에 선배들이 찾아와서 삼선개헌 반대 연좌농성을 하니 오라고 했다.
나와 친구 인종이는 학교 방송실로 가서 삼선 개헌 반대 연좌시위에 참석했다.
26명의 적은 인원이 참가했는 데 우리 인원보다 몇배가 되는 형사들과 정보부원들이 학교를 에워싸고 있었어.
부모님들을 동원해서 학생들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우리는 해산하지 않고 구호를 외치며 실내에서 농성을 했었는 데 신망이 높은 교수님과 학장님이 오셔서 우리를 설득했지.
“신문에도 보도되고 의사 표명을 했으니 해산하라고... 대신 신변 안전은 보장하겠다고...”
학장님 일행이 나가자 선배들 사이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 데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었어.
강경파는 끝까지 남아서 농성을 하자는 것이었고, 온건파는 의사 표명이 되었으니 해산하자는 것이었는 데 온건파의 의견이 다수여서 해산을 했었지.
그때 해산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울면서 농성장을 나간 분이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선구자였고 환경운동 연합을 이끌던 최열 선배였어.
그후 교련 반대 데모 등으로 인해 휴교가 반복되고 온전하게 수업을 한 학기가 별로 없었지.
‘71년 5월 개정된 헌법으로 대선이 치르어졌고, 이때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의원이 팽팽한 대결을 해서 95만표 차로 박대통령이 당선되었는 데 사실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야.
군인들의 표가 주가 되는 부재자 투표는 90%가 넘는 여당표가 나왔으니 군인표가 아니면 사실상 박대통령이 패배한 것이지.
이어 치르어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과반수에 약간 못미치는 의석을 얻어 공화당이 국회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가 없게 되었어.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고, 노동쟁의가 빈발하였지.
‘7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대통령을 만나는 등 남북 대화가 진행되며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어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환상에 들뜨기도 했었지.
정부는 노동쟁의나 집회 등을 제한하는 ‘국가보위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등 억압정치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현실을 항의하며 노동법이라도 지키자고 활동하다가 벽에 부딪치자 몸을 불사른 것도 이때였지.
‘72년 4학년 가을의 일이었어.
어느날 중대발표가 있다고 해서 라디오를 들었더니 유신과 비상계엄령 선포였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신적 개혁을 단행한다”는 이른바 시월유신이었지.
일체의 반대 의사 표명이 금지되고 일방적인 유신헌법의 홍보만 이루어졌어.
반상회가 수시로 열리고, 선생님들이 동원되어 가정을 방문하며 홍보를 했지.
신문에는 무슨 사회단체가 그렇게 많은지 온 신문 지면이 지지 성명서로 도배가 되고....
하루는 신문을 읽는 데 “시월 유신 촉진 강원도민 협의회인가의 명의로 성명서가 나왔는 데 부의장이 내가 존경하던 중앙 감리교회 김연호 목사님이었어”
나는 순간 맥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지. 목사님도.....
그런데 며칠후 목사님의 조카인 성주형(월남 참전 용사고 복학생으로 우리보다 몇 살이 많았음. 현재 목사로 목회)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어.
성주 형은 나를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좌우를 둘러 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성명서에 김목사님 이름이 나오게 된 사유를 말하여 주었어.
목사님과 의논도 없이 이름을 사칭하여 성명서에 올린 것이라고.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자신은 성명서에 서명을 한 적이 없다고 광고를 했고....
정보부원들이 신발을 신은 채 목사님 방에까지 난입하여어 와서 목사님 서재와 장롱까지 뒤지고 갔다고....
이런 과정을 거쳐 유신헌법은 92% 이상의 투표와 92% 이상의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통과가 되었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체육과를 다니다가 군에 입대한 친구(현재 목사)가 유신헌법 찬반 투표때 반대란에 표기하여 투표했다가 감시하던 중대장이 이를 보고 권총을 뽑아들고 “누구를 죽이려 하느냐”고 말하며 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갈겼다고 한다.
유신 헌법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어(2500명 정도) 소위 대의원이라는 자들이 대통령을 뽑는 데 찬반 토론없이 교황식으로 선출한다는 것이지.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지만 중임 제한이 없어서 종신집권이 가능하고,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형식적인 승인만 받으면 되는 데 개인별 찬반은 없고, 전체 인원에 대한 찬반만 묻게 되어 있었지.
노동쟁의나 집회 시위 등이 금지되고 이를 위반하면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어.
삼권분립은 무력화되고 제왕적인 대통령제가 되었지.
유신 7년 동안(‘72년 - ’79년. ‘’78년에 유신헌법으로 박대통령 중임) 긴급조치가 1호부터 9호까지 발령되며 유신반대를 하는 인사나 학생들의 대대적인 구금이 이루어졌어.
내 친구도 서울의대에 다녔었는 데 긴급조치로 구속되어 7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었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병원 실습을 가서 친구들끼리 토론을 한 것에서 문제가 발단되었다고 하는 데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논의만 한 것에도 중형을 선고한 것이지.
장준하씨의 의문사 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때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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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말기에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심해지고 있었지.
집에 다니러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데모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주위를 둘러 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 크리스천 신문에는 목사들이나 신학생들이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간단하게 나와 교회를 중심으로 유신반대 투쟁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어.
내가 나가던 교회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가끔씩 유신반대 투쟁을 하다가 구속된 분들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분들이 쓴 옥중 편지를 읽어 주기도 했는 데 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했지.
노동운동이 무력화된 당시 조건에서 가토릭 노동청년회와 도시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대변할 수 있는 단체였어.
都産(도시산업 선교회 약자)이 들어가면 도산(倒産)한다면서 학교에 홍보책자도 오고, 교장선생님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와서 전달연수를 하기도 했지.
박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할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언필칭 자유니 민주니 하는 인사들은...“ 운운하면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인사들을 좌경용공분자라고 했지.
수많은 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박근혜 후보가 서로 다른 판결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역사적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가 표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마지못해 사과한 인혁당 사건은 이때 공안정국에서 발생한 사건이지.
‘79년 동원 예비군 훈련을 갔었는 데 식당에 TV를 틀어 놓았는 데 부산과 마산에서 불량배들이 시위를 해서 경찰이 이를 진압하였다는 것과 지역에 계엄령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왔어. 당시 유신 반대 시위에 대한 소식은 전혀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는 데 이례적으로 데모와 지역 계엄령 선포에 대한 나왔지.
이 사건이 바로 부마사태였어.
이는 공화당이 유신체제의 철폐를 주장하던 야당당수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는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이지.
부마사태를 계기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점점 심해졌고, 마침내 공화당도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 데 이때 발생한 사건이 박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된 10.26 사건이지.
박대통령이 시해됨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어.
박근혜는 1975년 8월 15일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8.15 경축 기념식장에서 재일동포인 문세광에 의해 암살되자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대행하게 되지.
24세의 나이로 어머니인 육여사가 하던 외국 귀빈을 맞이 하거나 의전 행사를 할 때 박대통령을 수행하며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수행하였지.
또한 청소년의 정신운동의 하나로 새마음 운동이라는 것을 했는 데, 표어는 ‘밝은 마음,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이었던 것 같고 충효를 강조하는 정신운동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충효는 의미는 좋은 것이지만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악용하던 것으로 중국의 절대왕정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나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때 강조되던 덕목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는 것으로 사회 변혁을 막아 통치자들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복선을 깔고 있는 것이지.
체육관에서 치르던 새마음 운동 전진대회는 인근 지역 학생들을 동원하고 기관장들이 몰려드는 등 관권을 동원한 큰 행사였지.
박근혜가 오는 길 연변에는 경찰과 경호인력이 쫙 깔려서 경호를 하고...
박근혜가 움직일 때는 거의 국가원수급의 경호를 받은 것 같다.
이렇게 공주마마로서 절대 권력의 옆에서 권력의 맛을 본 것이 박근혜니 문재인을 경험이 부족하다고 몰아치는 것도 이유는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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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이 시해되고 나서 국민들은 민주화가 되기를 바랐지.
그러나 웬일인지 최규하 대통령의 정부에서는 개헌작업을 미적거리고.....
민주화를 위한 직선제 개헌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진척은 더뎠지.
그러는 동안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이때 민주화의 열망을 깔아뭉개고 등장한 것이 전두환 장군인데 오공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하고 그후의 일은 간단하게 이야기하지.
전두환은 유신헌법을 만들 때와 같은 방법으로 오공화국 헌법을 만들고 체육관에서 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지.
그후 올림픽을 핑계로 사람만 바꾼 정권 연장을 시도하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딛쳐서 6.29선언이 있게 되고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제정하여 현재와 같이 대통령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지.
대통령을 16년만에 우리 손으로 직접 다시 뽑던 날 나는 너무 기뻐서 너의 손을 잡고 투표장에를 갔었다.
다시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지 말자는 의미에서...
어제 선거가 있었고, 어제 자정이 못되어 당선자가 결정되었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이 된 것이지.
5.16과 유신 시대의 암울했던 시절을 기억하거나 배워서 알고 있는 사람들
새누리당의 지금 MB 정권이 과거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번 결과에 상실감이 클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은 유신이나 오공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근혜를 뽑았어도 합법적인 절차와 공정한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선택한 것이다.
과거 체육관에서 뽑았던 유신이나 오공 시절의 엉터리 선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이번 결과가 역사를 퇴행시키는 것으로 보이고, 마음이 아프겠지만 국민들이 선택한 이상 이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또, 국민들이 뽑은 이상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권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임기 중 나라가 발전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에게서 감동을 받은 것은 패배한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승복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협조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문재인 후보도 유신시절 학교에 다녔고, 강제징집되어 특전사에 배치되어 험한 훈련을 받았고, 그후 인권변호사로 활동을 하였는 데 박근혜에 대한 여러 감정이 있었겠지만 정당한 선거였기에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한 것이 아니겠니?
너의 상실감은 이해가 간다.
장로님이라고 기독교계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해서 선출을 했는 데 오히려 누가 되는 통치를 했으니 국민들 모두가 실망이 큰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강압 통치와 전임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아집과 원칙없는 인사 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자.
유신과 오공의 어두운 시대를 살았고, 나중에 쓰겠지만 교육자로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며 깊은 무력감과 좌절감과 양심의 갈등을 느꼈던 나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는 어쨌든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흐르는 물이 굽이굽이 흐르며 방향을 바꾸기도 하지만 결국 바다로 가듯이. 역사는 일정한 방향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2012. 12. 20
위의 글은 대통령 선거 개표가 발표된 후 아들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글로 내가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대해 설명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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