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앨범은 학창 시절을 증언해주는 타임캡슐이다.
졸업 앨범을 통해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당시의 학교 건물과 시설들, 수업장면과 행사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아주 가끔은 앨범을 펴놓고 수십년 전으로 돌아가 당시의 내 모습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변화된 현실과 비교해 보기도 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졸업 앨범은 당시의 역사를 알려주는 사료(史料)이기도 하다.
필자는 모교의 구십년사 편찬위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앨범을 통해 당시 선배들의 학창생활 모습은 물론 시대상을 알 수 있었다.
수업활동이나 실습 소풍 수학여행 등 학사 활동 중에 찍힌 사진을 통해 당시 학교 교사와 부대 시설, 시가지의 모습이나 명승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청평사 소풍 모습을 통해 한국전쟁때 불탄 청평사의 불타기 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금강산 장안사와 경주 수학여행 사진을 통해 일제 강점기 당시 장안사와 첨성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35년 앨범을 보면 군사훈련을 하는 모습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38년 앨범을 보면 사열을 받는 모습, 시가 행진의 모습, 행군의 모습 등 군사 훈련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며 군국주의가 강화되는 것이 앨범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5.16 군사 정변 후 졸업한 선배들의 앨범을 통해서는 군사정권의 홍보와 반공행사의 모습을
유신시대의 졸업앨범을 보면 열병과 분열 행사를 실시하고 교련 검열과 군부대 체험을 하는 등 강화된 군사교육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한 개인의 성장과정을 알려주고 함께했던 동기들과 선생님들의 모습을 증언해 주고 있다.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그 학교에 재학하였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남북 분단 이후 북한에서 월남한 분들은 다수가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북한에 소재한 학교를 다닌 경우 재학이나 졸업 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이문열의 변경이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옹진중학교라는 학교의 가짜 졸업장을 얻는 과정이 나와있다. 한국 전쟁 전 38도선 이남이었던 옹진중학교의 직인을 가지고 피난온 교감선생이 직인을 이용해서 졸업장 장사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당시시 졸업증명서에 갈음하는 것이 졸업앨범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기록하고 신분을 증명하고 추억의 창고가 되는 졸업앨범이 변화를 강요받고 있다.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개인정보 보호와 AI기술의 발달이다.
그러면서 사회는 점점 익명의 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예전에는 범죄나 풍속관련 범죄관련 뉴스가 아닌 일상적인 보도에서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개된 활동을 하는 인물이 아닌 경우 대부분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전국에 있는 모든 학교가 홈페이지가 있고 학교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필자가 재직하였던 당시(2011년 퇴직)까지만 해도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교사들 실명과 함께 사진과 업무가 공개되었다. 인사 이동을 하면 전임지와 부임지가 함께 공개되었다.
인사이동때 지역 신문을 보면 어느 학교의 누가 어디로 전임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졸업 앨범에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이 학교 교직원들의 사진과 학급별로 졸업생들의 사진과 이름이 나오고 학교생활의 모습이나 행사 등의 사진과 특별활동 모습이 나오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맨 끝에는 주소록이 공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주소록이 사라졌다. 학교 홈페이지에서도 교사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이름도 익명처리가 되었다. 교장과 교감 행정실장의 명단만 공개되고(심지어는 교감도 익명처리 된 학교가 있었음) 보직교사와 담임교사 업무 담당 교사 모두가 ‘김*수’ 등으로 익명 처리가 되어 도대체 누가 몇학년 몇반 담임을 맡았는지, 보직이나 업무를 담당한 교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되었다.
이렇게 공인(公人)인 교사를 익명처리하는 것은 피치 못할 이유가 있다.
교사에게 가해지는 민원이 가장 주된 원인이다. 드물지만 신상이 공개됨으로 원치않는 마케팅 대상이 되거나 범죄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대인 접촉이 많은 교사들이 익명화되어 제한된 공개가 되고 있다. 줄여 말하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 익명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사만 익명화되는 것이 아니다. 학교 학생들도 익명화가 되고 있다. 익명화 과정 속에서도 졸업 앨범은 예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앨범에 얼굴과 이름을 올리는 것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학생들만 아니라 교사들도 얼굴 공개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앨범 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다.
SNS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밖에 개인정보가 금융사기 등 범죄에 악용되기도 하고,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에게는 과거의 언행이나 활동 상황이 자신을 얽매는 족쇄가 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최근 발달한 AI 기술은 대상자의 얼굴 등 일부 신체정보를 이용 이를 악의적으로 변형함으로(딥페이크) 범죄에 활용하거나 인격권을 침해하며 명예를 훼손하는 사례가 늘자 아예 개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마침내 졸업 앨범에 얼굴 공개를 거절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각 학교 동창회 명부에도 본인의 주소나 직장 전화번호 공개를 거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아마 족보에도 상세한 정보 공개를 꺼리는 사례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학교, 직장, 소속 사회 단체, 동호회나 동창회 등 사적 연계 조직 등에 구성원들의 기본 정보 제공과 공개는 기본적이었으나 이제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미 많은 공적 사적 조직과 네트워크에서 익명화는 대세가 되었다.
졸업앨범에서 얼굴이 사라지는 추세는 공개된 사회에서 익명화 사회로 개인이 고립되어 가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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