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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의 삶의 기록들

내가 치른 1969학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필자가 대학에 진학하던 1969학년도에는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필자는 1967학년도 졸업생이라 졸업 당해년도에 진학했으면 예비고사를 치를 필요가 없었으나

대입에 실패를 하여 재수를 했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치러야 했다.

필자의 고교 재학시절에는 국가고사가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입을 위한 별도의 예비시험이나 자격시험은 없었고 진학하려는 대학에 응시하면 되었다.

모집시기가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있었고 대부분의 국립대학은 前期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시험과목도 각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지정하여 학교마다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상위권 대학의 경우 자연계는 국어 영어 수학(2)과 과학과에서 한 과목을, 인문계는국어 영어 수학(1)과 사회과에서 한 과목을 선택하여 네 과목을 응시해야 했다.

서울대는 국어 영어와 자연계는 수학(2) 인문계는 수학(1)을 공통적으로 부과하였고 인문계 자연계 공히 과학과 사회과에서 1과목을 선택하도록 하여 5과목을 응시하도록 했다.

공대는 물리와 화학을 모두 응시해야 하기 때문에 6과목이 부과되었다.

과학과와 사회과의 모든 과목을 응시하지 않고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은 학생들의 시험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과목 제도는 입시에 해당되는 과목만 공부하고 다른 과목은 등한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필자의 경우도 국영수와 선택과목만 응시하면 되었기 때문에 사회과에서 국사를, 과학과에서 화학을 선택하였고 그외의 과목은 등한히 하였다.

1967년 고3때 대학입학고사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여 부득이 재수의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경제사정 때문에 서울에 가서 학원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하여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하기로 했다.

처음 한두달은 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공부를 하였으나 봄이 되면서 마음이 해이해지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부에 등한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어 선들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정신이 퍼뜩들었으나 이미 여름이라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난 후였다.

10월 중순쯤으로 기억되는 데 초등생이던 조카가 예비고사를 보아야 대학을 간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반신반의 (半信半疑)하였다.

일정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대학입시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하였다.

또 2학기도 한참 지난 10월에 갑자기 예비고사 시행을 발표한다는 것이 모순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을 통하고 신문을 구해 보고나서야 예비고사가 시행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과목을 모두 응시해야 하고, 과학과 사회의 경우 선택이 없이

모든 과목을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실업과목(농업 상업 공업 등) 중에도 한과목을 선택해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사회와 과학과에서 선택과목만 공부하고 다른 과목은 등한시했던 재수생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3  교실에는 비상이 걸렸고 밤늦게 보충수업이 실시되었다.

재수생인 필자의 경우 그동안 공부하지 않았던 선택과목을 두달 정도의 기간동안에 혼자서 벼락치기 공부를 해야 했다.

발빠르게 출판사에서 예비고사 예상문제집을 내놓아 이것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12월 16일에 고사가 시행되었고 121월 31일에 발표가 되었다.

모두 같은 조건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실업과목이나 선택을 하지 않았던 과목의 시험을 못쳤지만 다행히 예비고사에 합격을 하여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예비고사 실행계획을 알고나서부터 응시하고 발표가 될 때까지 필자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예비고사의 실행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기의 기록 중 예비고사 관련 내용만 발췌하였음.

 

1968년 10월 21일

돈을 찾으러 농협에 규철이와(조카) 같이 갔었다.

조카가 국가고시를 본다고 한다.

 

1968년 10월 24일

예비고사 준비 만전을 기해야 하겠다.

 

1968년 10월 31일

전반적인 학습상황을 점검하였다.

 

1968년 11월 16일

도서관에 가서 예비고사 관련 자료를 읽음

 

1968년 11월 25일

예비고사 원서 접수

 

1968년 12월 3일

예비고사 접수증을 교부받음.

 

1968년 12월 8일

 예비고사가 며칠 남지 않았다.

 

1968년 12월 12일

영어공부가 재미난다. 무엇이든지 하면된다.

예비고사가 7일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정리를 하겠다.

 

1968년 12월 13일

도서관에 갔다. 상업과 생물을 공부. 내일은 주민등록증 사진을 찾으러 가겠다.

매일매일이 괴로운 생활의 연속이다. 우선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노력, 이것만이 나의 살길이다.

 

1968년 12월 18일

학교에 가서 수험표를 받았다. 내일은 예비고사. 예비고사는 자신이 있다.

그러나 본고사에서 어떤 성적으로 합격하느냐가 문제이다.

1524번이 내 번호다. 잘 기억하겠다. 1524.....

나의 운명은 내일 결정짓는다. 그러나 예비고사는 자신이 있다.

250-300점을(만점은 360점) 따도록 하겠다.

 

1968년 12월 19일

예비고사다. 예상보다 성적이 저조.

낙방은 안되겠지만 목표했던 290점은 못되고 240점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중학교때 친구로 문영, 태연, 광복을 만났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국어 40-45, 영어 25-30, 수학 52-56, 과학 30-35, 실업 35-45, 사회 45-50(각 과목 60점 만점)

수많은 사람들이 응시하고 또 낙방할 것이다.

시험, 정말 지긋지긋하다.

 

1968년 12월 29일

초조하다. 불안하다. 예비고사 발표가. 정말 불안하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춘배네 집에가서 놀았다.

 

1968년 12월 30일

발표가 난다고 하였으나 나지 않았다. 정말 불안하다.

 

1968년 12월 31일

서면(큰댁)에서 건너왔다.

규철이가 재촉을 하여서 빨리 발표장에를 갔으나 명단이 오지 않았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10시에 발표가 났다. 대학교 시험을 볼 자격은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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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필자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합격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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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관련된 자료

 

"1969학년도에는 지난 5년 간 실시되지 않았던 국가고사가 다시 부활되었다.

문교부는 “대학 및 고교의 질을 높이고 일부 학교의 부정입학 풍조를 없애기 위해 현행 대학입시 제도를 대폭 개편, 1969학년도부터 대학입학 예비 국가고사 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경향신문, 1968년 10월 15일자).

 

이에 따라 수험생들은 예비고사에 통과한 후에 대학별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
예비고사 시험과목은 국어, 사회(일반사회, 지리, 역사), 수학1, 과학(물리, 화학, 생물), 영어, 실업·가정(농업, 공업, 수산, 상업, 가정 중 1과목, 다만 가정은 여자에 한함) 등 6개 과목이었고, 모두 객관식으로 출제되었으며 합격자는 대학 정원의 150%를, 1972학년도
에는 180%를 총점 순으로 선발하도록 했다(동아일보, 1971년 7월 20일자). 대학별 시험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치러졌는데, 시험문제는 예비고사가 객관식인 점을 감안하여 주관식 위주로 출제되었다(동아일보, 1971년 9월 23일자).

 

문교부는 이 제도를 ‘대학 정상화’의 실마리로 보았고, 당시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대학생의 자질향상과 사대 운영의 정상화는 물론 대학진학 인구를 사전에 조절함으로써 균형 있는 인력수급을 기할 수 있으며, 사회가 부담하는 필요 없는 교육비를 절약할
수 있다.”며 그 효력을 장담했다(동아일보, 1968년 10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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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신입생 선발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1968년 12월 18일 대학입학예비고사가 치러졌다. 전국 15개 지구 84개 고사장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이날 시험에서는 총 응시자 112,436명 가운데 대학 정원의 150% 가량인 61,215명이 합격했다.

대학 입학 지원자들은 이 시험의 점수를 가지고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에 지원하고, 제2단계로 희망대학에서 본고사를 치른 후 두 시험의 성적을 토대로 선발되었다.

이후 1981년 각 대학별 본고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 제도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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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학입학 예비고사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날 갑자기 발표되고 두달가량의 준비기간밖에 없이 갑작스럽게 치러진 시험이었다. 당황한 것은 수험생의 학부모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같으면 온갖 비판이 쏟아졌겠지만 당시에는 드러난 반발을 하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2월 18일에 치러진 시험에 31에 발표된 것은 전산화가 되지 않은 당시로 볼 때 전 행정력을 동원하여 속도전 방식으로 채점과 집계와 합격자 선정과 발표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채점은 서울교대 학생들이 수작업으로 했고, 성적 집계와 통계 작성은 서울여상 학생들이 주판을 이용해서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