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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장, 시평, 논문

호칭의 인플레이션


흔히 물가가 오르는 것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인플레이션(inflation)의 사전적 의미는 부풀리기, 팽창 이다.

물가에만 인플레이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호칭에도 인플레이션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대상이라도 격이 높은 말로 불러주면 듣는 쪽에서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말이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높임말을 호칭으로 쓰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일상생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원래 스승의 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사모님은 존칭은 제한적으로 사용된 존경의 의미를 함축한 단어였다.

이것이 군 간부나 상위 직급자 부인의 호칭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기혼 여성들을 호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기혼 여성고객들을 지칭하는 말로, 심지어는 발음을 이상하게 해서 제비족들이 쓰는 호칭으로까지 확산되며

원래 말뜻이 지닌 존경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생각해 보자.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큰 기업의 경영자를 사장이라고 했다.

사장은 적어도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영웅시대라는 드라마를 보면 '70년대까지만 해도 삼성의 이병철회장, 현대의 정주영회장 등을 사장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사장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 지금은 사장이 자영업자들의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그러나 영세 소규모 자영업자들도 사장님 소리를 듣게 되었다.

회사형태의 규모를 갖춘 기업의 경영자들은 사장 대신 대표나  회장 등의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사(理事)라는 호칭도 원래는 규모가 큰 기업의 임원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동창회 등의 조직에서 일정금액 이상을

납부하는 납부자들을 이사라고 부르고 있다.


孃은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 이나 이름 쓰여, 여자 친근하게 또는 대접하여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미혼 여성에 대한 존칭의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각 직장에서 보조업무를 수행하는 나이어린 미혼여성들을 부를 때 김양, 이양 등으로 부르며 '양'이라는 호칭은

불리우는 당사자들이 싫어하는 호칭이 되었고, 미스(miss)라는 외래어를 앞에 붙이 미스 리 등으로 불리우다가 미스도

페미니즘 시각에서 볼 때 차별적 호칭이라고 해서 여성들을 호칭할 때 미즈(Ms,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의 이름이나 성 앞에 붙여 부르는 경칭) 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기사(技士)라는 호칭은 기술자들에게 쓰는 존칭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법적으로 기사는 전문대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자격시험에 합격을 할 때 취득하는 자격이다.

예전에는 운전 종사자를 운전수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이 운전기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운전직에 대한 기술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일을 하는 기능직들을 전에는 고용원이라고 호칭했다.

'70년대말부터 학교에서 교육업무를 돕는 기능직들을 기사라고 지칭하기 시작해서 일반화되었다.

지금은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하는 분들을 기사라고 부르고 있다.

택배기사 등이 그 예다.


대학에 관련되는 명칭을 고찰하여 보자.

필자가 대학에 진학하던 '60년대 말에는 대학교와 단과대학 초급대학(2년제) 각종학교에 대한 명칭이 구분되어 있었다.

4년제 대학으로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 몇개의 단과대학을 거느리는 경우 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규모가 작은 대학은 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고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서울대, 고려대, 경북대 등 규모가 큰 대학의 경우만 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학의 장들도 종합대에는 총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단과대는 학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국립대의 경우 총장과 학장의 직급이 엄연히 달랐다. 총장은 장관급이지만 학장은 차관급이었다.

2년제 초급대학이 전문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런데 전문대학이라는 호칭이 4년제 대학과 차별된다고 느껴서인지 전문대학은 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4년제는 대학 규모에 관계없이 대학교가 되었고 기관의 장도 총장이 되었다.

2년제는 대학으로 4년제는 대학교로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다가 전문대학도 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기관의 장도 총장으로 호칭이 승격되었다.

10여년 전의 일이다. 전문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고교 동기가 총장으로 취임한다고 했다.

언제 그 학교가 4년제가 되었는가 했더니 전문대학도 대학교로, 학장이 총장으로 호칭이 바뀐 것이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도 규모에 따라 명칭이 다르던 것이 이제는 모두 같은 명칭으로 불러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스승이나 존경하는 어른에게 사용하던 호칭이었다.

일본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지금도 상당한 존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조금 나이가 들은 성년들 모두에게 사용하는 호칭이 되었다.

심지어는 피의자를 지칭할 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인권의식의 신장이나 상대를 대우하는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락(低落, 물가나 등급, 가치 따위가 낮게 떨어짐)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대학교 교수들을 지칭할 때는 특별히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본인들은 교수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교수들끼리도 상대방을 언급할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제자들이 대학교 은사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교수들 중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가치가 떨어지니 그보다는 높은 교수님이라고 불리우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의사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일반 개업의들에게는 원장님이라는 호칭을, 대학병원 의사들에게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일반화된 것 같다.

여러 명의 의사가 공동으로 병의원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관리비용도 줄이고 각자 특화된 전문분야를 진료하는 경우 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한 간판 밑에서 일을 하면 원장은 한명이어야 하는 데 모두가 원장이다.

이 역시 호칭의 인플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존칭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다.

간호부가 간호원으로, 간호사로 호칭이 변화되다가 요즈음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많이 쓰고 있다.

직업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함일 것이다.

연예인들이 원로 연예인들을 호칭할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것 역시 연예인들이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지는 것과 궤(軌)같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공무원의 직급에도 인플레이션 현상은 비껴가지 않았다.

공무원들에게는 9급부터 1급까지 직급이 있고 직급에 해당하는 호칭이 있다.

따라서 직급에 따라 담당하는 직책이 다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작은 규모의 군수는 5급인 사무관이 맡고 있었다.

행정규모가 확대되는 데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 있겠지만 직책에 따른 직급도 높은 직급으로 올라갔다.

지금 사무관은 군청의 과장이나 면장 등의 직책을 수행하는 직급이 되었다.

사무관보다 한 직급 높은 서기관은 시청의 국장급을 직책을  맡고 있다.


경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경사가 면단위의 지서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찰관이 낮은 직급에 몰려있어 최하위 직급인 순경으로 퇴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찰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상위 직급인 경장까지, 경사까지, 경위까지 순차적으로 자동승진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파출소장도 이에 따라 경사가 맡던 것이 경위를 거쳐 지금은 대부분 경감이 맡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원래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어휘인데 호칭에 적용하여 보았다.

필자의 작은할아버지(1914년생)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1930년대 말 경춘선 건설공사때 강촌지역 터널공사장에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두달간 일을 해서 번 60원으로 송아지 한마리를 춘천에서 사서 홍천 북방까지 끌고 가셨다고 한다.

지금 송아지 가격이 300만원대(암수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남)라고 한다면 80년간 송아지값이 몇배가

올랐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100:1과 10:1의 화폐개혁이 있었으니 화폐개혁이 없었다면 지금 송아지의 가격은 30억원일 것이다.

80년 동안 5천만배나 가격이 오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돈의 가치가 5천만분의 1로 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보다 높은 가치를 원하기 때문에 물가에서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호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언어의 인플레이션 그 끝은 어디일까?

예우를 받는 존칭이 일반화되어 그 가치가 저락되면 새로운 호칭이 생기게 된다.

기업의 경우 사장님 대신에 회장님이나 대표님을 쓰는 것이 그런 예의 하나이다.

또한 존칭이 다른 직역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간호사나 연예인에게로 확대된 것이 그 예가 된다.

언어는 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니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호칭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고, 같은 호칭이라도

그 의미와 존경의 정도도 변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