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편지를 드립니다.
답답할 때에만 편지를 드리네요.
이 나라에서 또 한 명의 국민이 죽었습니다. 다른 수많은 죽음과 다른 죽음입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제 환자가 생각납니다.
평소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내던 관상동맥 협착증이 큰 사고로 인한 심한 출혈로 심근경색이 되었습니다.
사고로 진단이 되었지요.
교통사고로 와서 관상동맥 우회 수술까지 받았고 1년 가까이 치료받다가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
사망 후에 부인이 찾아 와서 보험사와 소송을 한다고 했습니다.
보험사는 관상동맥 질환이 사망에 기여한 것이 아니냐, 즉 사고는 났지만 죽은 것은 지병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모르던 심각한 지병이 있었고 그 때문에 상태가 악화된 것을 의학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관상동맥 질환이 있었지만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현재까지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의학적 소견을 적어 주었습니다.
소송 결과는 모르겠습니다. 의사의 소견이 판결은 아니니까요.
경찰과 정부가 보험회사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외상으로 장기간 치료받다가 다른 병이 생겨서 사망하는 경우 사망 원인의 진단이 모호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호함을 부각시키며 명백한 사실을 논쟁의 대상으로 만드는 전략에 저는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검을 한다면 다치고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고인에게는 뇌출혈 혈종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뇌출혈이 있는 상태에서도 생존했었는데 혈종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뇌출혈 때문에 사망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을 할 것입니다.
또 부검을 하면 노인이니까 다른 질병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르고 있던 암 같은 병이요. 이게 원인이다 내지는 외상때문에만 죽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의료인이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이지만 여론을 호도할 수는 있겠지요.
서울대병원이 외압이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데 저는 정말로 외압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기관에서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은 권력자 보수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건 아니건 자신도 그 그룹의 일원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합니다.
의사의 양심을 말하지만 양심의 문제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의 임원들이 자기도 월급쟁이이면서 오너 마인드를 가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어쨋건 탁월한 전략가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정권과 노동자의 싸움을 경찰과 유족의 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이제는 사망진단서 하나로 유족과 병원의 싸움으로 더 작아지게 만들며 관심 밖으로 빠져 나갈 것입니다.
최종적인 책임은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지게 될 겁니다.
세월호에 가장 먼저 접근한 정장처럼 말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편지를 올립니다.
올해 농사도 마무리 하시겠네요. 올해 아이들을 밭에 내보내지 못 해 아쉽습니다.
그리고 외국 학술지에 제 논문이 하나 더 게재되게 되었습니다. 이름있는 의학잡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급이 인정되는 저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시고 얼른 뵈러 갈께요.
아들 올림
'가족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고/경규혁]닥터카 늘려서 닥터헬기 공백 보완하자 (0) | 2018.09.20 |
---|---|
아들의 어린시절의 일화 (0) | 2018.04.05 |
어머니의 추도식 추도사 (0) | 2015.08.29 |
사진으로 보는 나와 가족 이야기 (0) | 2014.12.30 |
아들의 편지 (0) | 2014.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