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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교육 역사 지리 시사)

1938년 춘천고보 학생들의 수학여행 모습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인들의 저항의지를 꺾는 것을 중요 정책과제로 실천하였다.

이를 위해 우민화(愚民化)정책을 실시하였다. 백성들이 어리석어야 비판의식이 없이 통치자가 시키는대로 저항하지 않고 굴종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정지작업으로 이미 합병 이전에 통감부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인가제로 하고 시설기준을 엄격하게 함으로 자생적으로 설립된 많은 사립학교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10년대 일제는 3개 면에 1개의 초등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여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도 박탈하였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강압적 통치가 더 이상 통하지 않자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명목으로 형식적인 완화정책을 썼다.

결과 1개면 1개교로 기준을 바꾸어 초등학교의 수와 재학생이 늘어나게 되었고, 1개 도에 한개의 인문계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도록 하여 1924년 춘천고보와 청주고보가 개교되었다.

1935년 발간된 일본인 기자 가와노 반세이의 춘천풍토기에 의하면 당시 춘천고보 학생 1인이 부담하는 月 학비는 16원으로 이중 하숙비가 9원, 수업료가 2원 50전, 수학여행비 적립금이 1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와노 반세이는 매월 학생에게 필요한 학비를 16원으로 계산하고 있고, 임시로 들어가는 학비(도서비, 피복비, 교과서 등)를 연간 38원 50전으로 계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학생 1인당 소요되는 학비가 연간 230원, 월평균 20원으로 당시 화폐가치로 보면 적지않은 학비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필자의 작은할아버지가 경춘선 철도공사를 할 때 강촌 터널공사에서 발파작업을 할 때 생긴 폐석을 터널에서 운반하는 일을 하셨는 데 두달간의 임금으로 60원을 받아 송아지 한마리를 사셨다고 말씀하셨는 데 매월 20원은 당시 노동자 임금과 거의 맞먹는 액수로 극히 일부 가정을 제외하고는 자식을 중등교육을 받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래는 1938년 춘천고보 10회 졸업생들의 수학여행 모습이다.

춘천고등학교 60년사에 의하면 선배들은 경주나 금강산 등 국내 수학여행과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일제 말기 전시에는 일본 수학여행이 중단되었음)

아래는 1938년 졸업생들의 수학여행 사진의 일부다.



수학여행을 출발하기 위해 버스에 승차한 모습. 당시에는 버스가 매우 작았음을 알 수 있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을 후배들이 환송하고 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맨 아래의 두장의 사진은 금강산으로 추정되나 다른 사진들은 장소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