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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교육 역사 지리 시사)

'70-'80년대의 반공 안보교육

북한의 핵실험과 이은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 정세는 다시 냉전체제로 회귀하고 있다.

정부는 개성공단의 인력을 철수시킴으로 개성공단의 가동을 전면 중단시켰고 북한은 공단 폐쇄로 응답하였다.

정부에서는 개성공단의 북측 근로자들에게 지급된 노임이 노동당으로 흘러들어가 핵과 미사일 개발에 씌여졌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개성공단 폐쇄가 불가피하다고 홍보를 하고 있다.

이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나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 합작사업으로 인건비를 지급하거나 금강산이나 개성관광 등에 대금을 지급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북한에 자금이나 물자를 지원하는 것은 군비증강을 돕는 이적행위로 간주되게 되었다.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과거와 같이 일체의 인적 물적 교류가 중단된 현실로 회귀하는 것을 보며 남북간에 긴장국면이 유지되었던 '70-'80년대의 반공교육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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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과 이로 인한 대립과 갈등은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더욱 깊어지고 심화되게 되었다.

이질적인 체제를 가진 북한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국가 안보를 공고히 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국가 시책에서 가장 우선되는 과제였음으로 반공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었다.

고에서 반공교육은 주로 도덕교과와 국어, 국사, 사회 등 관련 교과에서 교육과정에 반영되어 실시되어 왔다.

고등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립되어 있어 교련 교육과 각종 행사를 통해 국가 안보에 대한 참여의식을 심화시키고자 하였다.

625 기념일 등에는 625를 상기하는 행군, 웅변대회, 글짓기, 포스터 전시회 등을 통해 반공의식을 고취하고 내면화시키는 데 힘썼다.

행사때마다 외치던 우리의 맹세는 국가안보 및 반공과 관련된 당시 국가시책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419혁명으로 교육에도 변화가 일어나며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교련교육도 폐지되었지만 교과 교육을 통한 반공교육은 계속되었다.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부는 혁명공약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때 반공은 국시로 정해졌으며 학교 교육에서도 반공교육이 강화되었다.

각급학교 학생들은 혁명공약을 암기해야 했고, 행사때마다 혁명공약이 낭독되었다.

1963년 민정이양이 이루어진 후에는 주로 교과교육과 행사 계기교육을 통해 반공교육이 실시되었다. 1968학년도 본교 장학목표의 구현계획을 보면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방안으로 반공도덕 교육의 강화가 설정되어 있어 있는 바 반공교육은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121사태는 반공교육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전기를 만들었다. 향토예비군이 편성되었고 교련교육이 다시 부활되었다.

19686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다. 국민교육 헌장에서는 반공 민주정신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을 강조하였다.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구현은 교육정책의 기저가 되었다. 1968년부터 1972년 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민교육 헌장 정신의 구현을 기저로 도덕 등 관련 교과 교육과 시사교육, 교련교육 및 관련 행사와 625 행사 등을 통하여 반공의식을 함양시키고 내면화시키고자 하였다.


1972년에 박정희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월유신을 단행하여 영구집권이 가능한 정치체제를 출범시켰다.

정부에서는 유신정권의 정당성을 공고화하기 위하여 국적있는 교육과 유신과업 수행 교육을 강조하였다.

국가 안보교육의 한 축으로 반공교육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반공교육은 도덕 등 관련교과만이 아닌 전교과를 통한 반공교육의 실시가 강조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재창단되었다.

학교 교육계획서에서 장학방침의 구현 계획을 보면 애국심 함양을 실천 목표로, 반공 애국심의 고취를 구현방안으로 정하고 구현내용으로 국어, 국사, 국민윤리, 교련, 국토지리 교과를 통한 국가관 확립과 정치경제 교과를 통한 한국적 민주주의 우월성 강조 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철저한 교련교육과 교련조회의 실시, 교련교육 행사, 군부대 1일 입영, 행군 및 구보, 전교생 태권도 교육실시와 등산 훈련, 공기총 실탄 사격 등을 통한 전력증강 교육을 시행하였다.

반공강연회, 글짓기, 웅변대회, 참전용사 초청강연회, 반공작품 전시회, 간첩신고 요령 교육, 불온문서 습득시 신고 지도 등을 통하여 반공 애국심 고취를 구현하고자 했다.


1979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서거와 1980년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하였지만 반공교육의 근간은 큰 변화가 없었다.

1983년도의 시정목표를 보면 안보역량의 강화가 제시되어 있으며 문교지표로 국민정신교육의 강화가 제시되고 있다.

구현방안으로 반공안보교육의 철저가 제시되었다.

실천방안으로 국가, 국기,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교육, 국기 강하식 이행, 시사 게시교육, 1일 반공학교 위탁교육, 6.25 상기 행사,

내한(耐寒)훈련 행군, 반공웅변대회, 반공표어, 포스터, 글짓기 전시회, 반공안보 강연회, 이승복 얼 선양 글짓기 대회 등이 실천방안으로 나타나 있다.

5공 초기에는 학교와 학급에 정화위원회가 구성되어 웅변 및 글짓기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1986년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 추진으로 수공의 위협이 홍보되면서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경각심 고취가 강조되었으며 이를 규탄하기 위한 궐기대회 실시와 성금 모금 등으로 각종 반공 행사가 실시되었다.

1987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이루어지고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 직선제에 의한 정권이 출범하여 민주화가 되면서 분단이후 계속 강조되던 갈등과 대립 구도의 반공교육은 통일안보 교육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한국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경험한 정전 체제하의 분단국가에서 국가안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장 중요한 국가현안이다.

애국심과 안보의식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시키는 것은 학교교육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반공교육은 민족공영보다는 대립과 갈등구조를 심화시켰고, 학생들을 획일화된 가치관으로 교육하여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시민의 교육에 한계를 드러내었으며, 국가안보를 빙자한 정권안보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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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3년 모 고등학교의 교육계획서


   교육계획서를 보면 유신교육과 반공교육의 강화와 교련 및 군사훈련 계획이 제시되어 있다.








2. 교련 교육 및 안보 관련 행사 사진들

 

 '70년대와 '80년대에는 안보교육을 강조하며 교련교육을 실시하였고 각종 안보관련 행사를 실시하였는 데 6.25 상기 행사와 학교별로 교련 검열, 지역 고교 연합 교련 경연대회, 행군, 군부대 일일입영, 사격훈련 등이 실시되었다.

아래는 1974년에 실시된 교련교육 및 안보관련 행사 사진이다.



안보관련 행사


총검술 훈련


군부대 입영 사격훈련


화생방 훈련


6.25 행사(열병과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