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20일 TV의 톱뉴스로 경원하 박사 망명설이 보도되었다.
그후 며칠간 경원하 박사가 뉴스의 중심에 서있었다.
얼마후 그의 망명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그가 북한의 핵개발을 이끌었다는 보도는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우리 淸州 慶氏는 작년 통계로 전국에 12500명 정도로 그 수가 적어 전화 등으로 성명을 말할 때 정씨로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다시 慶氏라고 정정해서 답해야 할 정도로 희성에 속한다.
또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慶氏를 처음 만났다는 사람도 적지 않게 만나 보았다.
2003년은 慶氏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는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
慶元河 박사의 망명설과 2003년 2월 - 2004년 8월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박용우가 경대승 장군역으로 주연을 한 것이다.
大자 升자 할아버지는 고려사의 인물열전에 무신정권의 정중부 등은 역신으로 올랐지만 할아버지만은 역신에 오르지 않았고 청렴함이 칭송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자 백성들이 슬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인시대라는 드라마는 경원하 박사와 함께 淸州 慶氏를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필자가 경원하 박사에 대하여 소개하려 하는 것은 경원하 박사를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경원하 박사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다.
어느 기관에서 발간한 신문인지 모르지만 4절지 크기 정도의 어린이 신문이 학교로 배달되어 왔는 데 경원하 박사가 쓴 기사가 있었다.
필자가 60년 가까이 지난 일을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慶氏가 드물었는 데 그가 같은 성씨였기 때문이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경원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춘천 중앙시장에 경중봉씨라고 필자에게 증조부 항열이 되는 분이 사셨는 데 춘천에서 가장 어른이셨다.
이 댁에 세배를 갔었는 데 서면에 사는 집안 어른들이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왔다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춘천 종중의 어른들이 춘천농대(경원하 박사는 춘천농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에 찾아가서 경원하 박사에게 족보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주경씨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계대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마 평양쪽에서 벼슬을 살았거나 다른 이유로 그곳에 거주하던 분이 현지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는 데 그분이 이주나 사망 등으로 족보를 알려 주지 못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하는 말씀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강원대에 입학하여(1969년) 일반수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했는 데 저자들 중 한명이 경원하 박사였다.
그래서 필자는 경원하 박사가 수학교수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필자가 강원대에 입학했을 때 경원하 박사는 브라질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강원대에 재직하지 않았다.
교직에 들어가서 교사생활을 하였는 데 '80년대 중반 어느날엔가 갑자기 경원하 박사 생각이 났다.
경원하 박사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선배에게 경원하 박사에 대해 물었더니
그 선배는 주위를 살펴보고 작은 목소리로 경원하 박사가 북한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데 어디 가서 경원하 박사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경원하 박사가 북한으로 갔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
'90년대 초에 북한의 유럽 유학생들이 망명하는 사건들이 있었는 데 폴란드에서 유학하던 유학생이 망명한 사건이 있었다.
필자와 중학교 동기인 강원도민일보에 재직하는 친구가 나보고 경원하 박사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름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북한에서 망명한 유학생이 춘천에 왔을 때 만나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 데 춘천농대에서 재직하였던 경원하 박사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경원하 박사는 유학중 망명한 공대생이 이름과 출신지를 알 정도로 북에서 유명한 학자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촌형님께 경원하 박사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월간 조선에 경원하 박사에 대해 보도된 기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읽어 보니 경원하 박사가 북한에서 핵개발의 주역이었다는 기사였다.
경원하 박사에 대한 경력이 대략적으로 구성이 되었다.
1928년 생으로 북한에서 김일성대를 다녔고, 1.4후퇴때 월남하였고, 춘천농대에서 강의를 하였고, 브라질로 이민을 갔었고, 북한으로 가서 핵개발의 주역으로 거론될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것을.
형님께서는 경원하 박사가 본적을 춘천 효자동 우리집이 있던 번지로 정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50년대 후반까지 춘천에서 사셨던 큰아버지나 형님이 경원하 박사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는 데 어떻게 해서 경원하 박사가 우리집의 번지에 주소를 정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후 경원하 박사의 제자가 되는 선배들에게 경원하 박사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선배들이 공통적인 대답은 경원하 박사가 천재였다는 것이다.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는 데 양자역학 등의 이론에 대해서도 해박하였다고 하였다.
2003년 4월 경원하 박사의 망명설이 TV뉴스에 첫 기사로 보도가 되었다.
아마 청주경씨의 인물이 뉴스의 첫 기사로 보도가 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관심을 가지고 뉴스와 언론 보도 기사를 시청하고 읽어 보았다.
강원일보에서 경원하 박사의 춘천 생활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
경원하 박사와 평양고보의 선후배 관계인 성수여상 교장을 역임한 박인순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박교장은 경원하 박사와 동향이고 선후배 관계여서 절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함께 찍은 사진도 공개했다.
경원하 박사는 평양고를 졸업하고 김일성대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여러 기사들을 종합하여 보면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무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월남을 했다고
하는 기사가 있고, 가정교사로 가르치던 제자와의 사랑때문에 제자의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는 기사가 있다.
월남하여 해병대에 입대하였고 1956년 전역후 춘천농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다가 1961년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1965년 브라질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그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사마다 차이가 있는 데 브라질에서 유학을 하다가 미국의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서
핵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캐나다 로 가서 맥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대략적인 줄거리다.
경박사가 핵을 연구했다는 데 대해서는 異論이 있다.
그가 맥길대학교에서 연구한 것이 기폭장치에 관한 것이고 미국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서 근무했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경박사가 맥길대에서 폭발에 대한 이론을 공부했고, 북한에 가서 핵폭탄의 제조에 관여했다면
기폭장치를 제작하는 데 관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경원하 박사가 북한에서 핵개발을 주도하였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있다.
핵개발을 주도했다는 설에는 월간 조선외에 외국에서 보도된 기사도 있다고 한다.
미국의 국방잡지 'Defense &Foreign Affairs Strategic Policy' 1994년 7월호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소개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경원하 교수는 영변의 가스냉각식 30~50메가와트 원자로 및 이를 플루토늄 추출용 시설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 가운데 하나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나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던 윤여길 박사는 경박사가 플루토늄 추출 시설을 만드는 데 관계한 것이
아니고 핵폭탄 기폭장치 개발의 핵심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설을 종합하면 경박사는 북한에 가서 핵개발에 주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아마 기폭장치를 만드는 데
관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경원하 박사는 왜 북한으로 갔을까?
자료들에 의하면 경원하 박사의 고향이 북한이고 학회에 참여하러 유럽에 갔다가 어머니를 만나러 평양을
다녀왔는 데 이 사실이 알려져서 캐나다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졸업 후 일반 직장에 다녔다는 설과
맥길대에서 교수로 일했다는 설이 있음. 평양을 다녀 온 후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고 취업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함)
경박사가 캐나다로 오는 데 도움을 주었고 가토릭 영세를 주었던 고종옥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고신부
도 곤경에 처하게 되어 부득이 가족을 데리고 유럽을 통하여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이때가 1974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70년대 - '80년대에는 북한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교민사회에서 매장이 되던 때였고,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고 이들의 방해로 취업이 되지 않으니 북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1.4후퇴때 남하했고, 해병대에 입대해서 5년간 장교로 근무했던 것을 볼 때 그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몇년전 필자의 고교와 대학 같은 과의 선배가 되는 이병훈 박사가(캐나다 맥길대 교수) 서울대에 교환교수로 강의를 하러 귀국하였다가 科의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이교수에게 경원하 박사에 대해 물었다.
이교수는 경원하 박사를 알고 있었고 전화통화를 한 적은 있었지만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이교수의 이야기도 경원하 박사가 북한에 동조하는 인물을 아니었고 북으로 간 것은 막다른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몇년전 필자의 대학시절 은사이신 한대성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경원하 박사의 이야기가 나왔다.
한교수님이 '60년대 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야 하는 데 경원하 박사가 교수 TO에 있어서 임용이 어려워 경원하 박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고 한다. 그후 경원하 박사가 사표를 제출해 수리가 되고 전임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2003년 경원하 박사의 망명설은 사실이 아닌 오보로 일어난 해프닝으로 끝났다.
필자는 같은 종친이라 경박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가능한 자료를 조사하여 보았다.
그리고 우리 문중에 경원하 박사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졸고를 작성하였다.
선배들의 증언과 경박사의 행적을 조사하여 보면 그가 천재과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의 천재과학자다.
노벨상을 수상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20대에 연구를 수행할 과제를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업적을 쌓고
노벨상 수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경박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연구를 할 시기에 6.25 한국전쟁을 만나 고향을 떠나게 되고 군에 입대해서
과학자의 황금기인 20대 중반기를 허송하게 된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한창 연구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아무런 실험시설도 없는 시골 단과대학에서 근무하며 연구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가 유학을 떠난 것은 30대 후반으로 캐나다에서 공부한 것은 이미 40세를 넘은 시기였다.
이미 과학자로서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20-30대의 황금기를 허송한 것이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라 북한에 가서 핵개발의 한 분야를 주도하는 인물로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잠재된 역량을
충분히 키우지는 못했다고 생각된다.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가 없고,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경원하 박사가 좋은 시대적 환경에서 공부하였다면 큰 과학적 업적을 쌓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재 과학자 경원하 박사에 대하여 종친의 한 사람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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