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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이야기

아들을 외지로 떠나 보내면서

이제 몇 시간후면 집안에 하나뿐인 아들녀석을 취업 관계로 외지로 떠나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 군에 입대하였던 26개월을 제외하고 28년간을 한 집안에서 생활을 하였는 데 이제 부모를 떠나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취업이 힘든 시대에 2월 21일에 졸업을 하고 23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 자식이 우리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준데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크지만 제대로 뒷받침을 해주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 역시 크다.

1977년 4월 아들이 귀한 우리 집안에 태어나서 할머니와 삼촌과 고모들과 주위 친척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횡성 갑천에서 근무할 때였던 5년간이 아들녀석에게는 두살에서 일곱살이 될 때인데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성장하였다.

우리가 세들어 살던 안집의 착한 삼남매는 아들 녀석의 누나와 형이 되어 한번도 귀챦다고 찡그리지 않고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며 친동생처럼 돌보고 같이 놀아주었다.
동화를 좋와하던 아들 녀석은 내 무릎에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듣기를 좋와하였는 데 내가 퇴근하여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책을 꺼내어 와서 이야기를 하여 달라고 졸랐다.
녀석의 유년기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뛰놀며 동화 속에서 꿈을 찾으며 정말 어린이 답게 보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름답던 시골을 떠나 정선 고한이라는 탄광지대에 가서 먹빛으로 흐르는 개울을 보고 개울의 물빛을 어떤 색깔로 칠을 할까 고민하기도 하였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춘천으로 전학을 왔고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못하여 애를 먹기도 하였고, 엉뚱한 질문을 많이 하여 선생님 속을 썩이기도 하였다.
생일을 음력으로 신고하여 학교를 1년 일찍 보냈던 아비의 무모함 때문에(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행동을 하였다) 체구가 작아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더니 도장에 나가 태권도를 배워 검은 띠를 따 놀림을 면하기도 하였다.
감투를 쓰기를 좋와해서 학년초마다 반장 선거, 회장 선거 등에 출마하여 당선보다 낙선을 더많이 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사춘기때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속을 썩이기도 하였고,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하는 생활 태도 때문에 혼을 나기도 하였고, 3학년때는 성적이 끝모르게 추락하여 속을 썩이기도 하였는 데, 결국 내가 마음을 비우고 원하는대로 하라고 하였을 때 다시 정상을 되찾았던 것은  최대의 고비였다.

고등학교때는 관악부에 가입하여 친척들과 친구들이 관악부 활동을 하지 말라고 만류를 하라고 하였으나 나는 아들 녀석을 믿고 활동을 보장하여 주었다. 이것이 고교 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었고 군에 갔을 때 군악대에서 근무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초등학교때 미술학원에 몇달 다닌 것과 태권도 도장에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중학교때까지 과외나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2년간 수학교육과를 다니던 내 제자에게 친구들 몇녀석과 수학과외를 받게 하였으니 사교육을 전혀 외면하지는 못하였다.

고3때 자율학습 문제로 교회 출석때문에 고심을 하였다.

학교 자율학습에 참여를 하면 교회를 출석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근 10년 후배인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여 자율학습 출석에 대한 양해를 구하였다.

담임은 대학 진학에 지장이 있으니 1년간 학교 출석을 우선하여 달라고 하였다.

나는 대학에 못보내도 좋으니 교회 출석을 빠지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결국 9시 예배를 참석하게 하고 10시 30분까지 학교에 출석하게 하기로 합의를 하고 예배에 계속 참석할 수 있었다.

공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방대학이지만 의예과에 입학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다.
그러나, 대학 입학후에는 주일 예배에 겨우 참석할 뿐 교회 봉사를 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본과 1학년을 마치고  우리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휴학계를 내고 해병대입대를 한다고 하였을 때는 할 말을 잃기도 하였다.
신병훈련소 수료식을 할 때 만난 아들녀석은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친구 동생녀석과 같이 입대하였는 데 두 녀석은 우리가 준비하여 간 음식을 끝도 한도 없이 먹어댔다.
희망하는대로 군악대에 배속되었는 데 人福이 있어 군악대장의 보살핌을 받았고, 중학교 선배가 군악대 부사관으로 있어 군생활을 잘마칠 수 있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여 4년간 학교에를 잘다녔다.
4학년 1학기까지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의 용돈을 벌어 썼으니 우리는 큰 경제적 부담이 없이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해병대 출신답게 여름방학때면 고무 보트를 타고 한강을 내려가기도 하고, 학교 행사때는 해병대 복장을 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작년 여름방학때는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강화도에 양양까지 열흘이 넘도록 걸어 국토 횡단을 하기도 하였다.

어제 학교에 입학한지 9년만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오늘 집을 떠나 인천 길병원에서 인턴으로 새로운 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강요는 할 수 없지만 처음 의예과에 진학할 때의 다짐처럼 앞으로 해외에 나가 의료 선교활동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가 기대하였던 이상으로 잘 자라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된 자식이대견하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된 것이 한편으로 서운하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의 삶을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그의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고 더 크게 들어 쓰시리라 믿는다.

2004.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