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민수 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서 교회사와 민족사에 뚜렷한 획을 하나 그은 분이다. 특별히 농촌선교와 관련해서는 각별한 관심과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배민수 목사의 생애와 농촌사업을 되돌아보면서 지금 이 시대 한국교회와 농촌 선교의 사명을 되새겨 봅시다.
1. 의병장의 아들과 민족 사랑의 원체험
배민수 목사는 1886년 10월 8일 충북 청주 북문로에서 대한제국 청주 진위대 부교 배창근(1867-1909)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배창근은 1907년과 1908년 무렵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가 1908년 여름 일경에 체포되어 청안 감옥에 수감되었고 후에 서대문 교도소로 옮겨간 후 1909년 8월 순사했다. 아버지 배창근이 걸었던 의병활동과 체포 그리고 순국의 길은 어린 배민수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끌려가는 아버지를 따라 울면서 15마일이나 걸어갔던 일,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1주일 동안 감옥에서 지내던 일 등은 어린 배민수의 원체험으로 남아 있었다. 특별히 아버지가 순국하기 전 "네 자신의 건강에 유의하라. 네 어머니를 잘 돌보아 드려라. 네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과 나라를 구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만일 네가 이 의무를 잘 감당한다면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에서 만날 것이다"는 유언을 평생 마음 속에 새겼다. '순국한 의병장의 아들 배민수'라는 자의식은 그의 자랑이었고, 그의 십자가였으며,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삶의 원동력이었다.
아버지 배창근은 배민수에게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는 의병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자 집을 팔고 이웃 김응삼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를 통하여 밀러(F. S. Miller)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배창근의 신앙생활은 길지 않았지만 그를 통하여 아들 배민수는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죽음 후 주위에 있던 여러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배려를 받으면서 자라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민수에게는 민족애와 기독교 신앙이 그의 삶을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2. 국민회 사건과 3·1운동에의 참여
배민수는 신앙 깊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누나 밑에서 자랐다. 그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익혀갔고, 양반과 평민이 부자와 가난한 자가 그리고 배운자와 배우지 못한자가 차별 없이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였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였다. 1912년 초등학교를 마친 배민수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평양에서의 기독교적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장대재교회에 출석하였고, 방학동안에는 선교사 베어드(W. Baird)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 그는 자신 보다 상급반에 속한 노덕순, 김치수, 이보식, 박인관 등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만주에서 지하 독립운동을 하던 김형직을 소개받았다. 1915년 하와이에서 온 장일환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박용만, 노백린 등이 지도하는 대한국민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915년 예전에 사귄 친구들과 함께 숭실학교에서 대한국민회 지부를 조직하여 30여명의 회원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에 관여한 청년들은 일본이 미국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어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때를 대비하여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준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의 첩자에게 조직이 발각되면서 배민수는 1918년 1월 20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형을 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다른 동료들도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형을 받았다. 이 일로 장인환은 고문에 못 이겨 정신 이상 증세를 일으키게 되었고 석방된 지 2달만에 순국하였는데 이 사건이 일제 초의 중요한 민족운동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국민회 사건이다. 배민수가 출옥하기 직전 드렸던 다음과 같은 탄원기도는 시편의 탄식시를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기독교 민족주의자의 신앙과 조국애가 결합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신께옵서 사악한 일본인이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시고 또한 저들이 저의 사랑하는 아버지와 저의 친구 일환이 그리고 수많은 선한 한국인을 죽이도록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사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보고만 계시렵니까? 저들의 포악한 강도 짓을 그대로 두시렵니까? ... 우리에게도 자유와 독립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을 도와주옵소서."
배민수는 체포된 지 1년 남짓 지난 1919년 2월 8일 석방되어 어머니와 누나가 있는 성진으로 갔다. 그 곳에서 강학린목사를 알게되는데 그는 그 지역의 신망 받는 지도자였다. 곧 이어 삼일운동이 일어났고 배민수는 김수영, 목정순 등과 함께 강목사를 도와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배민수의 어머니와 누나 역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며칠 후 배민수는 일경에 체포되어 강학린, 서재영 등과 함께 1년 6개월 형을 받게 되었다. 다른 애국지사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지난 번 국민회 사건 때 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낮에는 철길보수작업, 건축일 등 여러 가지 노역에 종사했지만 밤에는 성경 읽기, 독서, 기도, 옥중 전도 등 보람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찬송과 기쁨 속에서 감옥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다른 죄수가 의아해하면서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 나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당하신 예수를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도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일운동으로 인한 옥살이의 경험을 하면서 배민수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 1920년대의 농촌운동
배민수는 출옥 후 복음전도에 몰두하면서 시세를 관망하였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현황을 살피고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 1923년 4개월간 중국을 여행하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 지도자들의 분열적인 모습에 실망하게 되었고, 독립을 위한 장기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숭실전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고 또한 보다 온건하고 장기적인 농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정신적 지도자인 조만식을 만났는데, 그는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투쟁보다는 경제적, 정신적, 문화적 실력양성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배민수는 조만식과 교류하면서 인도의 간디식의 무저항, 불복종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하여 농촌개혁운동을 펴는 것이 민족의 활로를 여는 한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은 한국기독교 농촌운동이 활발하게 모색되던 시절이었다. 신흥우, 홍병선 등이 중심이 되어 YMCA의 농촌운동이 시작되었고, 장로교에서는 정인과의 건의로 농촌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유소기 등이 주축이 된 '기독교농촌연구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농촌개혁을 통한 경제적 회복이 이루어져야만 적당한 때 우리 민족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덴마크와 스웨덴을 농촌운동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그는 또한 빈민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빈민선교 활동은 공산주의의 새로운 도전 속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의 대응이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배민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불균형의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도전에 대해 응답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평양의 빈민지역에 사는 한 소녀를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후에 기생집에 팔려가고 말았다. 그를 찾아 구출하려고 하였지만 그 소녀는 기생집이 주는 화려함과 배부름에 현혹되어 스스로 들어왔다고 말함으로서 배민수의 구조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 민족 하층민이 겪는 빈곤과 무지의 통탄스러운 현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출옥 후부터 1931년 미국유학을 가기 전까지 배민수의 농촌선교활동은 그렇게 뚜렷한 결실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기 농촌문제에 대한 그의 큰 관심과 열정은 미국 유학 후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4. 30년대의 농촌사업
배민수는 배삯 65불을 내고 4등칸에서 지내며 태평양을 건너 맥코믹 신학대에 입학하여 중도적인 노선의 신학훈련을 받았다. 또한 학생 단체 활동을 하면서 인종 및 경제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토론을 자주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본국에서의 농촌운동에 대한 꿈을 키웠으며. 1933년 귀국하면서 본격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는 관제 농촌진흥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미국에는 대공황의 바람이 불면서 미국교회의 지원이 줄어들게 되어 국내 농촌운동이 어려움에 직면하던 때였다. 그러나 배민수는 조만식 등 옛 동료들과 함께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재건하였고, 1933년 9월 장로교 농촌부 초대 총무에 취임하였으며, 1934년에는 장로교 목사로서 장립되었다. 아울러 박학전, 김성원, 정인과, 윤산온(G. S. McCune), 농업경제학자 이훈구 등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당시 총회 농촌부가 배민수의 지도하에 실행한 사업은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는 고등농사학원을 중심으로 농촌지도자 양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모방한 것으로 각 노회에서 추천한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청년들을 농촌사업 지도자로 교육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36년까지 49명의 농촌지도자를 배출하였다. 둘째는 농촌수양회라고 불리우는 농촌순회 지도활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에서 남부지방에 이르기까지 노회와 교회를 거점으로 농사지도, 협동조합지도, 전도활동 등을 하였다. 셋째, 각 교회의 농촌사업이 활성화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즉 교회 내에 농촌부 혹은 농우회를 조직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을 만들며, 교회 공동경작을 장려하여 공동노동과 생산의 훈련을 쌓도록 하는 것이었다.
배민수의 농촌운동은 처음부터 몇 가지의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고 있었다. 우선 만주사변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득세하면서 일제의 정치적 억압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세계공황의 여파로 인해 한국의 농촌운동을 지원하던 미국교회의 재정 지원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는 교회당의 거룩성을 강조한 교회지도자들이 교회에서 세속적인 농사법 교육을 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배민수 개인의 문제도 겹치면서 결국 1937년 총회농촌부가 폐지되었고 그의 농촌사업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5. 농촌운동 실천 이념
배민수와 그의 동료들의 농촌운동 실천의 이념은 '3애(三愛)' 정신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삼애란 하나님 사랑, 농촌(땅) 사랑, 노동 사랑을 말한다. 그의 농촌운동 실천론은 1936년 1월 기독교보에 발표된 "기독교 농촌운동의 지도원리"라는 글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일제하의 자본주의 경제 현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본주의는 이윤의 추구에 눈이 멀어 물욕에 정복당한 방종한 경제체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었고 농민을 포함한 대다수 민중들을 빈곤에 빠뜨렸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 비판의 태도는 당시의 기독교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필요이상의 이윤추구를 억제하고 부의 균등화를 추구하는 상호부조적인 협동생활을 통해 표준적인 물질생활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분배정의는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기독교 정신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즉 100여호의 농촌을 단위로 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각 농가마다 약 5,6천 평의 토지를 자작하고 생산, 소비, 신용, 이용조합등 각종 조합을 조직하여 경제생활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교회와 학교, 이발소 등 편의시설을 갖추게 되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북구라파식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상은 지주제 아래서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던 영세소작농이 어떻게 5,6천 평의 토지를 가진 자작농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했으며, 또한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함께 작용하고 있던 일제치하에서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점진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입장을 취한 기독교인과 당시의 민족운동 세력이 다같이 가졌던 문제였다.
6. 망명과 해방 후의 활동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신사참배였다. 배민수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일제가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하지 말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국내에서 더 이상 일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된 배민수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여행신청을 하였다. 여행허가가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2년 만에 허락이 나서 무사히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만일 이 때 도미하지 못했다면 1938년 유재기 목사 등이 투옥된 농촌연구소 사건과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되었을 것이고 목숨까지 잃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배민수는 3년여에 걸쳐 1,300여회의 강연을 하였고, 6,000불 이상의 헌금을 모아 조국에서의 농촌사업에 사용할 기금을 마련하였다. 1941년에서 1943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반일 의식이 강하고 일본어와 영어에 능한 그는 전쟁중 미국내 일본인 편지 검열관으로 일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해방후 한국에 돌아와 미군 군속으로 일하였으며, 1948년 미군철수 당시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메카레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한국전쟁 중 다시 돌아와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를 창설하였으며, 1953년에는 농촌경제의 자립을 이루기 위한 국가적인 활동으로 금융조합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자유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금융조합의 영농지도와 자금지원을 바탕으로 농촌지도자를 교육하고, 농촌부락을 협동조직화 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식산계부흥사업(殖産契復興事業)을 벌여 적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도입되면서 한국농촌의 자주적 발전이 어려웠고, 이 사업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협조 결여로 인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실망과 충격을 경험한 배민수는 이승만과 결별하였고 그 후에는 주로 농촌지도자 교육사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6년 대전에서 기독교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이 되었으며, 1962년에는 대전기독교여자농민학원, 1967년에는 삼애(三愛)농업기술학원 및 삼애실업학교를 설립하는 등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1968년 8월 25일 대전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60년 5월에 나온 다음의 삼애동지 선언문은 그 당시 배민수의 기독교 농업교육의 근본적 이념을 이해할 수 있게한다. (1)우리 삼애동지들이 자랑하고 주장하는 것은 '참'이요 거짓은 미워한다. 사람들 앞에서 알랑거리고 칭찬하다가 뒤로 가서는 중상모략하고 온갖 음모를 일삼는 구역질나는 일은 절대 배격한다. (2)우리 삼애동지들이 자랑하는 것은 겸손이요 교만을 미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의 독사 대가리 짓을 하면서 남의 인격과 자유와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만 옳다는 그 독선을 배격한다. (3)우리 삼애동지들이 자랑하는 것은 남에 봉사하고 사랑하는 동시에 자기 중심으로 자기만 위하려는 사욕을 미워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살다가 소천한 배민수는 1993년 8월 15일 아버지 배창근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되어 뒤늦게 나마 그의 애국심과 농촌사랑의 공로가 국가에 의해 인정되어졌다.
7. 『그 나라와 한국농촌』 속에 나타난 농촌선교 실천론
배민수는 1958년 『그 나라와 한국농촌』이라는 중요한 저작을 발표하였는데, 이 속에 들어있는 농촌선교 실천론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배민수는 천국이 이 땅위의 모든 백성들에게 현세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천국을 십자가의 정신으로 정의하면서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개인적 욕망을 넘어서고 인종, 국경, 계급, 혈연 등을 초월한다고 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난 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천국은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 농민은 현재 가장 빈곤하고 불운한 처지에 놓여있음으로 이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다고 믿었다. 배민수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상류층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가난한 한국의 농촌사업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민수는 공산주의를 배척하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일이 기독교를 믿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개탄하고 서구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급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종말의식이 그의 삶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종말의식은 최근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실도피적인 삶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주의, 실용주의와 연결되었다.
그는 농촌운동을 천국운동이라는 튼튼한 정신적 토대 위에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이 정신적 토대를 첫째,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려는 정신, 둘째, 자기를 낮추고 남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정신, 셋째, 참을 숭상하고 신용을 회복하며 정직한 언행과 생활을 하는 정신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정신 위에서 그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많이 제시하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락을 이끌어 갈 농촌지도자를 그 부락에서 선발하여 교육하기 위한 상세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농업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작물, 원예, 축산, 임업으로 나누어 각각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농사의 품목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또한 여러가지 생활개선책을 제시하였는데, 식당이나 화장실 개량 등과 같은 주택개선책을 구체적인 도면을 통해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음식과 의복 개량의 방법, 물 관리와 기생충 예방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논의하였다.
이러한 구체적 논의들은 1950년대 말 한국농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 농촌생활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하늘나라와 자본주의를 논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졌고, 협동조합과 금융기관의 효율적 이용을 생각하는 정책에 대한 감각을 가졌으며, 동시에 농촌생활의 가장 구체적인 문제들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서 그 해결방식을 모색하는 미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배민수에게 배워야 할 점은 기독교 신앙의 구체적 현실에서의 실현, 농촌문제에 대한 예리한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촌과 농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열악한 구조적 조건의 한계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현장에서 적지 않은 결실을 얻을 수 있지만, 열정이 없는 자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 다음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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