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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KBS 1TV에서 방영한 주기철 목사 순교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주기철 목사는 한국 개신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의 한분이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순교자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며 시행한 정책의 하나가 민족얼의 말살과 일본화 정책이다.

1876년 미국이 자신들에게 쓰던 방법을 그대로 베껴서 조선을 강제로 개국하게 한 일본은

당시 조선과 불평등조약을 맺어서 경제적인 수탈을 시작하였다.

1895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1910년에는 한일합병을 하여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고 강압통치를 실시하였다.

 

초창기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강압과 우민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화기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법령을 만들어 대부분의 학교를 강제로 문을 닫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가 교육을 독점함으로 민족교육을 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 일제는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을 설립하지 못하게 하여 고등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였고

식민지 통치를 위한 하급관료나 실무자를 양성하기 위한 1개군에 몇개의 초등교육기관과 대부분이 실업계인 중등교육기관을 1개 도에 몇개만 개교하여 운영하였을 뿐이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 오게 하였다.

더 이상 강압만으로 통치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일제는 소위 문화통치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 더 교활한 식민통치를 하게 된다.

민립대학의 설립을 막기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개교하였다.

그러나 의학부와 법문학부 두 개의 학부에 1년에 200명 정도만 선발하였는 데 2/3정도가 일본인이었으니 조선인으로서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숫자는 1년에 100명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하게 된다.

이때 조선은 수탈지역 외에도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이 부각되게 된다.

일제는 대륙침략에 필요한 물적 인적 자원을 조선에서 조달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중공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런 이유로 초등교육기관을 확충하여 면마다 초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또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계 중등교육기관도 확충한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선의 확대에 따라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게 되어 조선인들의 징집을 시행하게 된다.

조선인을 일본군으로 징집하여 활용하려면 언어가 소통되어야 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하게 할 필요가 부각되었다.

이를 위해 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하나) 운운하며 황국신민화 교육에 몰두하게 된다.

 

신사참배는 이러한 배경에서 강요된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것은 곧 일본의 황국신민화에 대한 저항으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인 것이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 불교계나 가토릭은 별다른 저항이 없이 굴종하였다.

개신교회만이 신사참배에 저항을 하였다.

일제는 교단별로 각개격파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1938년 장로교회 총회에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하였다.

비록 교단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였지만 개별 교회나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활동을 하였다.

주기철목사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존경받는 목사였기 때문에 일제는 주기철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주기철목사는 십계명의 제 1,2계명에 따라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여 신앙을 지켰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에 몸이 상하여 순교를 하게 된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개신교인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주기철목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순교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제는 주기철목사의 육체는 죽였을지라도 신앙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일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개신교회의 교단이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일부 소수를 제외한 다수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있다.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분들은 유독 개신교회의 신사참배만을 부각시켜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하여 신사참배를 한 것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하여 옥고를 치르거나 순교한 분들을 두고는 신앙에 따라 행동했을 뿐 애국을 한 것은 아니라고 비하한다.

물론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형평성을 잃고 편향된 시각으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내가 그 당시에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하는 가정을 해본다.

과연 내가 그때 있었다면 극심한 고문을 견디며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주기철 목사님이나 평신도였던 감리교회의 최인규 권사처럼 순교를 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물론 제 1,2계명을 어기는 신사참배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육체의 고통을 끝까지 견딜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청년시절 만났던 분 중에 임연목전도사라는 분이 계시다.

이분은 1915년생쯤 되는 분인데 평양이 고향이고 6.25때 월남하신 후 춘천에 정착하여 중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한 분이다.

이분과 같이 근무하였던 동료교사는 임선생님이야 말로 진실한 신앙인, 참신앙인이라고 평가했다. '

임전도사님은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던 교사직을 사임하고(자녀분이 많았다) 화천 시골 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하셨다.

(후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설치한 특별과정을 이수하고 은퇴를 몇년 앞둔 늦은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으셨다고 함)

필자가 임전도사님을 만났을 때는 1970년 교회관련 모임에서였다.

그후 그분의 따님들이 필자가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였기 때문에 임전도사님을 여러번 뵐 수 있었다.

임전도사님은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임전도사님은(당시 교사) 신앙양심상 신사참배를 할 수가 없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어 갔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임전도사님께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니 국민된 자라면 누구나 참배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임전도사님이 끝까지 거부하자 고문을 했다고 한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임전도사님은 결국 신사참배를 하기로 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풀려 나와 보니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교우들이 대부분 나와 있더라고 했다.

기독교인이 아닌 동료분들에게도 참신앙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교사의 길을 떠나 목회자의 길을 걸은 훌륭한 신앙인인 분도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였는 데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이를 이길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과연 이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의 극악한 모진 고문을 이기고 신앙을 지킨 주기철목사님이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부족하지만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닮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애국 정신이 길이 계승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