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훈장의 뒤돌아보기(5) - 첫 담임
여름 방학을 하고 개학을 하였다.
8월말 1학년 4반 담임을 하던 원선생(여)이 원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원주가 고향이고 약혼자도 원주에 있다고 했다.
원선생이 전근을 가자 1학년 4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반 저반 대타로 하루나 며칠씩 임시담임을 한 적이 있지만 한 학급을 책임지는 담임 교사가 되게 되어 한편으로는 설레이기도 하였다.
내가 담임하게 된 4반은 재적수가 56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담임을 맡으며 학급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같으면 즐거운 학급을 만든다거나 하는 생각을 했겠지만 당시에는 성적을 올리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다)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체벌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수업태도가 나쁘다거나 학급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녀석들은 심한 벌을 받았다.
먼저 담임을 하던 원선생이 교육적으로는 나쁜 방법이지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아주 효율적인 비법을(?) 전수하여 주었다.
조사부라는 것을 조직하여(4명정도, 1주일씩 교대) 수업시간에 떠드는 녀석, 학급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녀석들을 적어 내게 하였다.
두표 이상 얻은 녀석들은 청소를 시켰고, 거듭해서 이름을 적히는 녀석들은 매를 맞기도 하였다.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우리 학급은 가장 조용하고 질서가 있는 모범(?)적인 학급이 되었다.
서로를 감시시키는 것이니 마치 북한과 같은 공포의 학급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적을 올리는 것인데 목표 성적을 제시하고 미달되거나, 성적이 많이 떨어진 녀석들에게는 혹독한 벌을 주었다.
수업시간에도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수시 시험을 보아서 기준성적(대개 40점)에 미달된 녀석들은 몽둥이로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당시 나는 아이들이 기초학력 부진이나 낮은 지능, 열악한 학습 환경 등으로 성적이 낮은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적이 나쁜 녀석들은 게으르기 때문이고, 공부를 하는 고통 이상으로 벌을 주면 공부를 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수학 수업시간이나 학급의 조종례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학급 분위기가 흩으러지면 단합대회(?)라는 것을 실시하여 단체 벌을 주었다.
한번 단합 대회를 하면 한달 가까이는 학급이 일사분란하게 운영이 되었다.
담임을 하려면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잘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아이들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어느 마을에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예고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안내할 녀석을 데리고 우리반 학생들 집을 일일이 방문하였다.
춘천농고에서 교생실습을 할 때 전현권 선생님이라는 분이 자기반 학생들을(당시 농고는 강원도 전역에서 학생들이 옴) 아무리 먼곳에 있는 경우라도 모두 방문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양구읍 한전리, 도사리, 남면의 청리, 도촌리 등의 마을에 산골짜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학생들 집을 방문하였다.
어떤 애들은 동생이 5-6명씩 되는 경우도 있었고,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 대분의 농촌 학생들은 가난하였다.
부모들이 일은 나가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경우는 부모님이 담임을 만나지 않으려 일부러 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 집을 돌아보다 보니 재미 있는 일도 많았다.
부대 앞에서 술집을 하는 학생이 있었는 데 아이의 아버지가 먼곳까지 찾아왔다고 사양하는 나를 억지로 붙잡아서 대접을 하였다.
종업원으로 있는 아가씨가 두명씩 내 옆에 앉아서 고기를 구워주며 술을 따라주는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청리라는 마을의 부대 앞에서 가게를 크게 하는 학생의 집이었는 데 아이의 아버지가 무척 반가와 했다.
대개의 경우 부모님을 잠시 만나 상담을 하고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를 대고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는 데 위의 경우와 같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붙잡혔다.
술이 몇잔 돌아가자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 고생하며 자수성가를 한 이야기를 했다.
자식만큼은 대학까지 꼭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상다리가 휘어지게 점심상이 들어 왔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대의 발언은 이어지는 데 녀석의 성적은 56명중 뒤에서 2-3등이었다.
성적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도 없고, 진수성찬은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고, 밥을 먹는 시간은 무척 길게만 느껴졌다.
청리에 사는 희명이네 집을 방문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끌고 하면서 30분이 넘도록 계곡을 따라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깊은 산골짜기에 희명이네 집이 있었다. 희명이는 자전거를 타고도 1시간 이상을 달려서 학교를 등교하고 있었다.
희명이 아버지는 6.25때 부상을 당해 팔 하나가 없었다.
이 분은 송이를 따는 데 달인이었다. 골짜기의 송이밭을 훤히 꿰고 있다고 했다.
나를 보더니 마을이 생긴 이래 중학교 선생님이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라고 하며 반가와 했다.
상담이 끝나고 돌아가려고 하니 무언가를 한뭉치 싸준다.
숙소에 와서 확인을 해보니 송이가 20개 정도가 되었다.
대부분 퍼지거나 하여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이지만 당시 송이 값이 아주 비싼 때라 등외품이라도 상당한 가격이 되었다.
집에를 몇개 가져 오고, 나머지는 윗분들께 선물로 드렸다.
주말마다 두달정도 돌아다니니 읍내를 빼고(읍내는 일부러 방문을 하지 않았음) 외곽지역의 학생들 집은 모두 방문하였다.
지금도 양구에 가면 "이곳에는 누가 살았고, 이곳에는 누가 살았고..."하는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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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전학을 가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까지 7년간을 살았던 곳이다.
지역 사정에 밝을 수밖에....
처음 담임을 맡았을 때다.
지각을 한 녀석이 있어서 왜 늦었냐고 했더니 ‘집이 멀어서’라고 했다.
학교까지 오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고 했다.
어느 마을 어디에 사느냐고 했더니 대답을 한다.
20분도 안걸리는 곳인데 어떻게 먼 곳이냐고 반문하며 혼을 내주었다.
수업을 들어가 보면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마을에서 기저귀를 차고 있던 녀석이 커서 중학생이 된 경우도 있었다.
애기때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는 데 많이 컸다고 농담을 하면 녀석은 선생님이 어떻게 내가 기저귀 찬 것을 보았느냐고 반문한다.
집에 가서 할머니께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한다.
다음 날 물어 보면 머리를 긁적이며 선생님 말이 맞다고 한다.
한 마을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동생 또래들, 외가댁 동네에서 온 녀석, 친구의 동생 등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녀석들이 많았다.
이런 경우 나를 아주 어려워 하고 나에게는 꼼짝을 못하였다.
우리 반에서 도난 사건이 났다. 그림 물감인지 크레파스인지 비싼 것을 가져 온 녀석이 있었는 데 이것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
실장은 Y가 도벽이 있으니 Y가 가져 갔을 가능성이 컸다고 했다.
나는 Y를 불러다 추궁하는 대신 종례때 간곡하게 말했다.
실수로 가져간 녀석이 있으면 주인 자리에 몰래 가져다 놓거나 아니면 나에게 가져 오면 불문에 붙이겠다고....
다음 날 그림물감은 주인 자리에 가있었다.
찬바람이 불자 떡치기를 하는 녀석들이 많이 생겼다.
동전을 쳐서 넘겨서 먹기를 하는 것인데 이것이 판이 커지면 도박 수준에 이르게 된다.
우리 반은 운동장을 건너 고등학교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학급으로 가려면 운동장을 횡단하여야 하는 데 아이들의 감시망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운동장을 건너는 담임을 보면 딴짓을 하다가도 정돈을 하니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적발하기 어려웠다.
하루는 고등학교 실과 교무실에 가 있다가 불시에 교실로 들어갔다.
떡치기를 하다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도박단(?)을 일망타진하고 판돈을 조사했더니 상상 이상의 액수였다.
관련된 녀석들을 엄벌에 처하고 수업이 빈 시간에 고등학교에 가있다가 불시에 들어 닥쳐 감시를 하고, 설문조사를 가끔씩 하니 우리 반에서 떡치기는 사라졌다.
담임의 업무 중 하나가 학급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매일 청소를 해야 하는 데 마을별로 요일별 당번을 정하여 청소를 하도록 했다.
같은 마을 아이들이 같이 하교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가끔씩 뺑손이를 치는 녀석들이 잇었다.
담임을 할 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직접 교실로 가서 청소검사를 했다.
고1 때 우리 조 청소 당번이 모두 뺑손이를 쳐서 나 혼자 청소를 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뺑손이를 치는 녀석들을 아주 싫어했다.
뺑손이를 친 녀석은 1주일간 청소를 시켰다. 내가 안볼 때 게으름을 피는 녀석은 있었겠지만 뺑손이를 치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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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는 우리 반에서 1등을 하였다.
집이 아주 가난했다. 아버지가 상처를 하고 재혼을 하여 늦게 본 자식이었다.
배다른 형이 있었지만 군인 부사관이었는 데 집안을 돌보지 않고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어머니가 채소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떤 때는 교납금을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며칠을 참아달라고 했고, 나는 서무과에 수현이가 교납금을 못내면 내가 대납을 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교납금을 미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대납을 한 적은 없었다.
수현이는 아주 성실하였고, 장래가 기대되었는 데 2학년 겨울 방학때 폐렴에 걸렸는 데 치료를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가서 그 소식을 듣고 많이 슬퍼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내 교직 생활 중 수현이의 죽음이 가장 슬펐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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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녀석이 6각형의 연필을 사각형으로 개조를 해서 각 면마다 홈을 파서(1개-4개) 연필을 굴리며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무척 답답하였기에 이런 연필을 만들었을 것이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더우기 공부를 못하는 녀석들에게는 가장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기초 학력이 부진하고, 공부하는 방법도 모르고, 가정에서 관심과 지원도 부족한 경우 저조한 성적을 향상시킬 방법이 없다.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성적이 저조한 녀석은 무조건 엄벌로 동기유발을 시키려 했다.
이때 매를 맞은 녀석들 중 일부는 이것이 쓴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교육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교사를 비난하는 악플을 올리는 네티즌들은 아마 이러한 쓴 경험이 있는 이들일 것이다.
성적이 나쁘다고 나에게 심한 벌을 받았던 제자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심정이다.
2011년 1월
앞으로는 시기의 순서대로가 아닌 생각나는대로 연재하도록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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