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직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다. 1982년 스승의 날이 부활된 후 23번째 스승의 날을 맞이하였다. 그때마다 부끄러운 교사임을 자책하면서도 제자들이 불러주는 스승의 노래를 듣곤 하였다.
그 중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의 노래가 세 번 있었다.
1982년 면소재지 시골에 있는 갑천 고등학교(6학급의 작은 학교)에 근무할 때다.
그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1반을 담임하였다.
그런데 우리 반은 무척 말썽이 많은 반이었다.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녀석 등 온갖 말썽을 부리다가 잡혀 오는 녀석들은 압도적인 다수가 우리 반 녀석들이었다.
새 학년이 된지 석 달도 못되어 연인원 12명이 정학을 당하는 기록을 세웠다.
담임인 나는 말썽꾸러기 녀석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원을 진급시켰는데 훗날 두 가지 상반되는 평가가 나왔다.
내가 담임을 하였기 때문에 학급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는 설과, 내가 담임을 하였기 때문에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전원 진급을 시켰다는 평가인데 어느 평가가 맞는지는 내 자신 아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폐지되었던 스승의 날이 부활된 첫해였는데 실장이 내려 와서 교실에 같이 가자고 하여 교실에를 올라갔더니 어느 사이엔가 책상 몇 개씩을 모아 배열을 바꾸어 놓고 그 위에 백지를 깔고 과자 등을 차려 놓고 나와 선생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몇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가자 녀석들은 모두 일어나서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간 말썽을 부리는 녀석들을 잠시나마 미워했던 생각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그간의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반에서는 하지 않았던 행사를 우리 반 녀석들이 하는 덕분에 말썽꾸러기 반으로 낙인 찍혔던 학급의 위상도 회복이 되었고, 말썽꾸러기 녀석들도 더 큰 말썽은 부리지 않아 한 해를 잘 보내게 되었다.
2.
춘천여자 중학교에서 근무하던 1987년 봄은 민주화의 열기로 뜨거웠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사실은 악수)이었던 4.13호헌 선언은 타오르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어 전국에서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그치지를 않았고 5월에는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도 가세하는 상황이 되었다.
강원대학교에 인접하였던 학교의 옥상에 올라가면 강원대 정문 부근에서 시위하는 학생들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젊은 선생님들 몇몇은 시위가 벌어지면 수업이 없을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곤 하였는데 기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옥상에 와서 시위장면을 원격 촬영하곤 하였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은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스승의 날 기념식을 운동장에서 진행하고 있었는데 재학생들의 사은사가 있었고,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막 시작될 무렵 강원대 정문 쪽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발사한 최루탄 가스가 바람을 타고 운동장으로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눈물을 닦는 학생들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선생님들도 손수건을 꺼내 들기 시작하였다.
교장선생님은 서둘러 훈화를 마무리하고 학생들이 스승의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되었다.
이때는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여 학생이고 선생님이고 모두가 콜록대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고,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식이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는 학생들과 선생님들 모두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넌 학생들에게 나는 학생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라는 아주 비장한 이야기를 하고 수업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스승의 노래는 다시없을 것이다.
3.
1989년 여름은 전교조 결성으로 인한 정부와 전교조 측의 대립으로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전교조를 불법화하여 결성 자체를 와해시키려는 정부와 해직을 불사하고 교원노조를 결성하려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팽팽한 대결이 이어졌다.
마침내 명동성당에서 주동 교사들이 단식 농성을 하게 되고 정부는 노조 가입자를 모두 해임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밑의 남동생이 전교조 교사로 명동성당의 단식 농성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을 만나러 명동성당에를 가게 되었다. 몇 겹의 바리케이드를 지나고 검문을 받고 마침내 농성장에를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날이 단식농성을 마치고 해산을 하는 날이었다. 단식으로 수척하여진 교사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해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개 학년 정도가 되는 어느 여자 중학교 학생들이 길 양옆으로 도열하여 농성을 마치고 귀가하는 선생님들을 향해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를 할 수 없었다. 축대에 얼굴을 마주하고 한참을 울었다.
이제 농성에 참가하였던 선생님들은 모두 해직이 될 것이고 다시는 교단에 서지 못할 것이다.
동료교사들이 희생된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이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다는 데 대한 생각, 동료교사들이 해직되는 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력감에 대한 자책 등의 감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1982년 스승의 날 우리 반 학생들이 불러 주었던 스승의 노래와 1987년 스승의 날 최루탄 가스 속에서 제자들이 불렀던 스승의 노래 해직당하는 선생님들을 향해 어느 여중학생들이 명동성당에서 불렀던 스승의 노래 이 세 번의 스승의 노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2004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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